김혜남, 박종석, <어른이 되면 괜찮을 줄 알았다> 큐레이션
잠을 못 자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 예민해진 신경은 ‘한 놈만 걸려라‘는 식으로 한껏 뾰족해져 칼날을 갈고 있다. 모든 것에 짜증이 나고 답답한 마음에 욕지거리를 뱉는다. 그러다 때로는 멍하게 있기도 한다. 평일엔 정신없이 바쁘다 보니 내가 사라진 것만 같다. 집에 와도 밀린 집안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 제대로 쉴 수가 없다. 할 일들도 많고 짜증 날 일도 많아진다. 너무 바쁘면서도 지겨운 나의 상황에 현타가 온다.
번아웃이 오면 우리는 위와 같은 증상을 느끼게 된다. 마음은 점점 메마르고 건조해지고, 에너지가 바닥나 이대로 더는 버틸 수 없을 것만 같다. 탈진 상태에 가까운 몸은 무겁게 바닥으로 가라앉는 것 같고 예민해진 신경은 가장 소중한 사람들을 찔러댄다. 뒤돌아서면 이게 아닌데 싶은 나날의 연속이다.
번아웃은 목표나 야망이 크고 이를 이루기 위해 전력을 다해 달리는 3번 유형이 자주 겪을 수 있는 함정이다. 3 유형을 상징하는 단어는 탁월함이다. 이들은 어떤 일을 가든 기준을 뛰어넘고 성공하기 위해, 탁월함을 느끼기 위해 노력한다. 높은 생산성에 가치를 두고 어떤 경쟁이든 이기고 싶어 하기도 한다. 특히나 스트레스 상황에서의 3번은 탁월해지기 위한 노력을 그만 두면 평범한 사람으로 남을까 봐, 그렇게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할까 봐 두려워한다.
가뜩이나 현대 사회는 열심히 달리지 않을 수 없도록 사람들을 몰아가고 있다. 타인의 인정이 중요한 3번에게는 더더욱 압박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러나 자신을 불태우는 노동량에 걸맞은 충분한 휴식 없이 계속 달리기만 한다면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잠재적 번아웃 증후군에 돌입해 가는 상태이다.
뇌과학적으로 우리 몸의 에너지원인 도파민과 만족을 담당하는 보상회로의 이상,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티솔이 불균형을 이루게 되면 번아웃이 생기게 된다. 내가 너무 지쳤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로, 혹은 인지했더라도 일을 계속할 수밖에 없을 때, 내 체력의 한계를 넘어 계속 일을 할 때 번아웃에 빠진다.
스스로 지친 걸 알아도 주위와 비교하면서 ’남들도 다 힘든데 뭐, 나보다 힘든 사람도 많잖아? 힘든데 어떡해, 어쩔 수 없지‘하고 생각하며 번아웃의 신호를 애써 무시한다. 외면당한 몸과 마음은 눈치 없는 주인에게 알아달라고 점점 거센 신체적, 감정적 신호를 보낸다. 별거 아닌 일에 언성이 높아지고 예민하게 행동하게 되며 견딜 수 없이 짜증이 치미게 된다.
그러다 더 지나면 사소한 업무도 미루게 되고 사람을 만나는 것뿐 아니라 연락도 받기 싫어진다. 이때부터 불안과 우울의 감정이 조금씩 생기는데, 이때 충분한 휴식으로 세로토닌이 만들어져야 피곤한 뇌와 마음을 달래줄 수 있다. 그러나 번아웃 상태에서는 이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감정은 격해지고, 가슴이 불타는 것 같고, 각종 염증에 불면증까지 시달리게 된다. 이 지경까지 오면 회복탄력성도 떨어져 주말에 쉰다고 해도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성공을 최상의 가치로 여기며 열심히, 잘, 최선을 다하기를 부추긴다. 힘들고 지쳐서 쉬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그런 상태론 인정받을 수 없다고, 있는 그대로의 너는 아직 부족하다고, 계속 달려보라고 등 떠민다. 무언가를 성취해 성공의 기쁨을 즐기려는 사람에게도 정체되지 말고 더 큰 것을 향해 달려가라고 부추긴다. 천천히 가자고, 쉬다 가자고, 목적지로 가는 여정의 풍경을 온전히 느껴보자고 말해주는 사람은 드물다.
내 삶의 방향을 정하는 핸들은 물론, 그 속도를 조절하는 엑셀과 브레이크도 오롯이 나의 의지로 누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옆 사람이 아닌 나의 페이스에 살펴가며 속도를 맞춰야 한다. 비교하며 일희일비한다면 타인에게 나의 제어권을 넘겨주는 것과 다름없다. 내가 결정한 삶의 목표를 향해, 타인의 속도에 연연하지 않고 나의 페이스를 유지하며 달려가는 것이다. 한번 속도의 균형이 깨지고 과속을 이어가면 탈진을 면할 수 없다. 멈춤보다는 지속적으로 꾸준히 나아가는 것이 더 멀리 오래가는 법이다.
인생은 마라톤에 비유 된다. 자신의 페이스를 찾지 못한 마라토너는 완주가 힘들다. 이런 당연한 진리에도 자꾸 실수를 하는 것은 타인에게 휘말린 채 끌려가기 때문이다. 저마다의 마라톤에서 넘어지고 일어서는 것은 철저히 스스로의 몫이다. 내 삶은 내 것이니 만큼 나의 속도를 즐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조금 더 이기적으로 살 필요가 있다. 타인에게 비치는 이미지에 매달려 온종일 에너지를 짜내며 동동거리는 데서 벗어나 우선 나부터 잘 챙겨야 한다. 특히 몸과 마음의 신호를 잘 알아채고 힘들 때는 가끔 모든 것을 제쳐두고 휴식과 재충전을 해주어야 한다.
번아웃 시기에는 모든 게 귀찮고 의욕이 생기지 않아 이제껏 잘 감당해 오던 것들의 균형을 유지하는 일이 힘들어진다. 내가 무너지고 있는데, 뭘 해도 도망하고 싶다는 생각뿐인데 어떻게 타인과의 관계에 충실할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을 다 놓아버리기 힘들다면 정말 중요한 딱 한 가지를 선택하고 나머지는 내버려 두는 것도 방법이다. 아주 놀랍게도, 정말 의외로 큰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오히려 서운할 정도로 세상은 여전히 평온하고, 여전히 잘 굴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