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종교가 말하는 인간의 그림자

에크하르트 톨레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큐레이션

인도 출신 영적 스승인 라마나 마하리쉬는 이렇게 말했다.


마음은 마야이다.


힌두교에서는 대부분의 인간의 마음에는 비정상적 장애 내지는 광기라고 부를 수 있는 요소가 있다고 설명한다. 그들은 이것을 마야, 망상의 장막이라고 부른다. 불교에서는 이를 ‘두카’라고 부른다. 두카는 고통, 불만족, 혹은 평범한 불행으로 번역된다. 붓다에 따르면,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당신은 두카와 마주치게 될 것이고 모든 상황에 모습을 나타낼 것이라고 한다.


기독교에서는 이를 ‘원죄’라고 말했다. 신약성서에 사용된 고대 희랍어를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죄’라는 단어는 화살을 쏘는 사람이 과녁을 빗맞히듯 과녁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란 핵심에서 벗어난 인간의 존재 방식을 의미한다. 장님이 장님과 대화하는 것처럼 서로 눈이 먼 채로 사는 것이며, 그리하여 고통을 겪으면서 고통을 야기하게 되는 것이다.



21세기 인류는 눈부신 성취를 이뤘다. 음악, 문학, 미술, 건축 등 최고의 작품들이 탄생되었다. 엄청난 과학과 기술의 발달에 따라 삶의 방식이 근본적으로 변했다. 불과 백 년 전이라면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의심의 여지없이 인간은 매우 지성적인 존재다.


그러나 그 지성은 광기로 물들어 있다. 지성적인 인간의 머리는 폭탄, 기관총, 독가스를 발명했다. 한마디로 광기에 봉사하는 지성인 것이다. 20세기까지 인간의 손에 폭력적인 죽음을 맞이한 숫자는 1억을 넘는다. 단순히 국가 간 전쟁뿐 아니라 대량 살육, 집단 학살에 의해서도 수많은 이들이 죽음을 맞았다. 스탈린 통치, 홀로코스트, 캄보디아 등 역사가 증명한 공포의 광기는 사실상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 잔인함은 같은 종인 인간을 넘어 여러 동물과 숲, 드넓은 바다를 향해서도 이어지고 있다.


사실 개인 관계에서도 끊임없이 일어나는 갈등의 원인은 이러한 광기이다. 인간은 타인뿐 아니라 자신에 대한 인식 왜곡으로 인해 온갖 상황을 잘못 해석하고,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두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잘못된 행동으로 이끌려 간다. 두려움, 탐욕, 권력욕이 근본 원인이 아니다. 선의로 시작된 것들도 마찬 가지이다. 더 좋은 인간, 더 나은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은 고상한 일처럼 들리지만, 의식의 전환이 없는 노력은 결국 실패할 뿐이다. 왜냐하면 좋은 사람이 되려는 것 역시 똑같은 광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또한 본래 고결한 이상으로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고결함은 인간이 먼저 자신의 의식 상태를 변화시키려고 하지 않고 외부적 현실의 변화에만 집착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 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다.


모든 인간이 내면의 ‘에고’라는 광기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고결한 이상은 쉽게 잔혹함으로 탈바꿈한다.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 역시 자신이 관념 속에서 ‘나‘라고 여기는 이미지를 더 크게, 더 강하게 만들려는 욕망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좋은 사람은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자신 안에 있는 좋은 것을 발견하고, 그게 밖으로 나오게 통합함으로써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러려면 근본적인 의식 상태의 변화가 일어나야만 한다.




오래된 종교와 전통들에는 대부분 인간의 본질과 관련된 통찰이 있다. 바로 인간 의식의 근본적인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힌두교와 불교에서는 이 변화를 ‘깨달음‘이라고 부르며, 예수는 이를 ’구원’이라고 말했다. 불교에서는 이 변화를 ‘고통의 소멸’을 위한 ’해탈’과 ‘깨어남’이라고도 설명한다.


인류의 가장 위대한 성취는 예술도 과학도 아닌 광기의 인식이다. 광기를 알아차리는 것 자체가 치유와 초월의 시작이다. 싯다르타(붓다), 노자, 예수처럼 드물게 새로운 차원의 의식으로 사람들에게 망상에 대해, 고통에 대해, 죄에 대해 이야기했던 사람들은 스스로가 만들어 내는 고통을 볼 수 있다면 악몽으로부터 깨어날 수 있는 길이 열린다고 말했다.


그들의 가르침은 단순했으나 왜곡되고 잘못 기록되어 버렸다. 가르침들은 철저히 오해를 받아 집단적 광기의 일부로 작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모든 종교가 인간을 통합하기보다는 분열시키는 힘이 되었다. 종교는 이념이 되고, 그 이념에 동일시된 사람들이 허구의 자아를 강화시키는 신념이 되어 더 심한 폭력과 증오를 낳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 믿음으로 자신은 옳고 상대는 틀리다고 단정 지었으며, 그럼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대립하는 자들을 죽이는 것도 정당화했다. 인간은 자신의 모습을 본떠 ‘신’을 만든 것이다. 그것이 종교에서 말하는 ‘우상‘의 개념이다.


마찬가지로 악에 대한 정의 또한 이렇게 내릴 수 있다. 악은 ‘형상을 자기 자신이라고 완전히 믿는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깨어있는지는 무엇을 믿고 있는가가 아니라, 어떤 의식 상태에 있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그것이 세상 속에서 그 사람의 행동을 비롯해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작용까지 결정한다.



지구의 생명체는 맨 처음 바다에서 진화했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어느 시점엔가 바다 생명체 하나가 메마른 뭍으로 진출하는 모험을 했다. 아마 처음에는 거대한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훨씬 쉽게 살아갈 수 있는 물속으로 되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지상으로 진출을 시도하고, 또다시 시도하고, 몇 번이나 계속 시도한 끝에 마침내 지상의 생활에 적응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과거의 존재 방식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근본적인 위기가 생겨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모든 생명체는 죽거나 멸종한다. 아니면 진화의 도약을 통해 한계를 뛰어넘어 비상한다. 그리고 우리는 신화뿐 아니라 모든 이념과 믿음 체계의 종말을 향해 다가가는 격변하는 시대 속에 살고 있다. 진정한 변화는 생각보다도 더 깊은 곳에서, 생각보다도 더 높은 곳에서, 생각을 초월해 무한한 차원이 자신의 내부에서 진행된다.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는 지금까지 자신으로 여겼던 끊임없는 생각의 흐름 속에서 자신을 찾지 않을 것이다. 생각하는 자신을 보고 있는, 생각 그 이전의 알아차림, 감정과 감각 지각이 일어나는 공간에서 자신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근본인 깨어남의 핵심은 깨어 있지 않은 자신을 자각하는 일이다. 자신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에고를 알아보는 일이다. 나아가 집단에 속해서 휩쓸려가다 알아차리지 못했던 집단 심리 작용도 이해하는 일이다. 에고의 배후에서 작용하는 기본 구조를 알지 못하면 에고를 알아차릴 수도 없고, 그 때문에 에고의 속임수에 넘어가 에고를 자신이라고 착각한다. 에고는 간단히 말하면 당신인 척 가장하는 사기꾼이다. 이때, 그 사실을 알아보는 것 그 자체가 깨어남이다. 어둠과 싸울 수 없듯 에고와 싸워서는 이길 수는 없다. 필요한 것은 의식이라는 빛이다. 당신이 그 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