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 르페라, <내 안의 어린아이가 울고 있다> 큐레이션
자꾸 내 연락을 씹는 건
나를 생각할 가치도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기 때문이야!
난 그래서 화가 나는 거야!
최근 들어 툭하면 짜증이 나고, 내 문자에 바로 답장하지 않는 연인이나 친한 친구에게 화를 내게 된다면 이 글을 읽어보길 바란다.
혹시 사랑하는 사람에게 화가 날 때 소리를 지르고 뒤돌아서 후회했던 적은 없는가? 내 고통스러운 감정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기보다 외부로 투사시켜 떠넘기는 스스로가 무가치하게 느껴진 적은 없는가?
주위에서 살짝 기분 나쁜 말을 들었다고 피가 끓어오르거나, 상대를 비난하면서까지 이기고 싶어 지거나,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신의 의견이 옳다고 인정받으려 할 때가 있다. 너무 빨리 남을 판단하고 폄하하거나, 비교하거나, 아직 뭔가를 하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느끼며 중요한 일을 자주 미루게 하는 이 모든 일의 주범은 바로 자아이다.
자아는 자신의 견해가 모두 실제 현실이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타인과 불화가 있거나 타인으로부터 비판을 들었다면 그것을 곧 직접적인 위협이라고 해석한다. 자아 상태ego state에서는 자신의 믿음과 생각이 바로 자신이 된다. 그래서 누군가 그 이야기에 의문을 제기한다면 적대시하는 감정부터 올라온다. 누군가 자기 의견에 의문을 제기하면 자신의 핵심 가치가 위협받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자아는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예측 가능한, 익숙한 이야기에 둘러싸인 삶을 유지하려고 한다. 자아의 핵심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정체성을 보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아는 부드럽고 무방비한 내면아이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완강한 보호자가 된다. 그래서 매우 방어적이고 두려움에 기반해 모든 것을 판단한다. 엄격한 이중잣대를 가진 자아가 바라보는 세상은 좋거나 나쁘거나, 옳거나 그른 것, 이렇게 두 가지로 나뉜다.
자아가 활성화되면 모든 것이 개인적으로 변한다.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이 모두 자신이 원인인 것만 같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남의 기분에 맞추려고 하거나 무리하게 타인의 평가에 집착하게 된다. 수치심을 크게 느끼는 자아일수록 더 큰 수치심을 경험할 수 있는 미래를 더욱더 피하려 하고, 다시는 상처받지 않으려고 장벽을 세운다. 그러나 모든 긍정적인 변화의 기회 속에는 실패의 고통을 겪을 가능성이 있다. 이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넘지 못한다면 자아는 실행으로 이어질 수 없도록, 결정을 더디게 하도록 당신을 조종할 것이다.
자아를 주시하는 연습을 하지 않으면 자아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주장을 내세우고 지배권을 얻으려고 싸운다. ‘난 누구인가’라는 인식을 보호하려 과도하게 노력하게 되어 버린다. 착하거나 바람직한 사람이 되고 싶고, 가능한 사랑을 많이 받고 싶어서 나쁘거나 잘못됐다고 느끼는 모든 감정을 부인하거나 억누르게 한다. 결과적으로는 ‘우리 자신’을 방어하려고 과도하게 노력하면서 불안감이 생기고 자존감이 낮아진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이런 자아에게서 벗어날 수 있도록 당장 실천할 수 있는 자아의 반응을 알아채는 연습 3가지를 소개한다.
일상생활을 하면서 떠오르는 여러분의 수많은 생각 중에서 '나로 시작되는 말을 주의 깊게 살펴보기 바란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나'라는 말은 다음에 따라 나올 패턴을 예고해 주는 신호다.
‘난 영리해. 난 지루해. 난 착해. 난 나빠.’
자아는 자기감이자 개인적 정체성, 자기 가치에 대해 수많은 말을 한다. 자아는 뛰어난 이야기꾼이라 자신이 어떤 사람이라고 믿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지어내 유지해 나간다. 자아 자체는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다. 자아는 그냥 자아일 뿐이다. 그리고 그 모든 말들은 진실이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아가 평가하는 모든 말들이 마치 불변의 진리처럼 여기게 된다. 당신의 생각 중에 ‘나’로 시작하는 문장은 어떤 말들인가? 나라는 단어가 붙는 것은 모두 자아의 확장이라는 점을 유념하며 들어보자.
'난 항상 늦어'
'난 기억력이 나빠'
'난 항상 이상한 사람만 만나.'
자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면 그 말에 대해 판단하지도, 격분하지도, 실망하지도 말자. 그냥 자신의 공책이나 휴대전화에 기록해 두는 것이다. 그리고 그저 당신의 마음이 당신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하는지 살펴본다.
대화의 주제를 얼마나 자주 자신에 관한 이야기로 돌려놓는가?
자신의 감정에 관한 이야기를 회피하는가?
‘나’라는 단어 다음에 얼마나 부정적인 말들이 따라 나오는가?
그 이야기는 모두 자아의 이야기다. 자신의 자아 반응을 의식하기 전에는 그러한 패턴과 내면 아이의 상처에 무의식적으로 휘둘리며 살아간다. 새로운 이야기를 선택할 기회를 스스로에게 선사하자. 반복할수록 더 잘할 수 있다. 반복은 두뇌에 새로운 길을 열어주고, 자아 주시를 더 쉽게 할 수 있게 한다.
뚱딴지같은 소리로 들릴지 모르지만, 자아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자아와 분리되는 강력한 조치다. 자아를 발견하고 이름을 붙이면 자아 반응과 자신을 분리할 수 있다. 이를 테면 괜찮지 않은 상황에서 자꾸 괜찮은 척, 상처받지 않은 척, 쿨한 척하는 나에게 "쿨 시온"이라고 이름을 붙여보는 거다. "쿨 시온"이 가끔 왔다 가는 것을 지켜보자. 가끔 자기 멋대로 몇 시간씩 사라졌다가 불쑥 다시 나타나서 내 욕망과 욕구를 억누르고 나를 무시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괜찮다. 중요한 건 그 "쿨 시온"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때로는 "폭군 시온"이 나타날 때도 있다. "폭군 시온"이 나타나 짜증을 부리거나 뭔가 퉁명스러운 소리를 내뱉으려고 할 때, "아, 폭군 시온이 또 성질을 부리네."하고 알아차릴 수 있다. 놀랍게도 이런 말을 입 밖으로 내뱉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된다. 잠시 숨을 가다듬고 폭군 시온을 제지할지, 아니면 폭군 시온이 날뛰게 내버려 둘지 선택할 수 있다.
자신의 자아에 이름을 지어주자. 당신의 자아의 이름은 무엇인가?
의식의 수준을 넓히면 자아가 지어내는 이야기가 당신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다. 누구나 생각을 한다. 하지만 그 모든 생각이 당신과 상관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당신의 생각이 모두 진실은 아니다. 생각은 대부분 당신의 정체성을 방어하려고 시도하는 자아에 불과하다.
내가 타인에게 공격을 받아 정서적으로 예민해질 때, 불편해지거나 화가 날 때의 모든 상황을 기록해 보자. 무슨 소리가 들렸는가? 어떤 말이, 어떤 부분이 자아가 이야기를 하도록 활성화했는가? 그 모든 자아의 목소리를 한 번 적어보는 것이다. 자신의 목소리가 불쑥 들릴 때 반드시 기록해 놓기 바란다.
그 기록에서 주의할 점은 실제 내가 들은 말과, 내 생각으로 해석한 말을 분리해서 적어보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피곤해 보여."라고 여동생이 말했을 때, 나의 자아인 <짜증 시온>은 "당연히 피곤해 보이지. 일주일에 60시간씩 일하면서 아이를 키우니까. 난 너처럼 자유 시간이 많지 않거든? 좋겠다, 넌 완벽해 보여서!"라고 빈정거리는 투로 대꾸했다.
객관적으로 들은 것은 이것이다. "피곤해 보여."
그러나 자아는 이렇게 듣는다. "뭐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한다고 그렇게 자기 관리도 못하고 티 내고 다니는 거야? 한심해 보여."
그래서 자아는 이렇게 반응했다. "넌 항상 그렇게 무례하고 잘난 척해. 내가 얼마나 힘든 일을 헤쳐 나가고 있는지, 내가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인정하려 들지 않아."
여기서 자아는 핵심 감정으로 무가치함을 느꼈다. 그건 고통스러운 감정이다. 당신이 감정을 처리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면, 그리고 충분한 훈련이 되어있지 않다면 당신의 자아는 그 감정을 타인(여동생)에게 투사시킬 것이다. 자아는 고통스러운 감정을 자신이 끌어안기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전가하는 것을 훨씬 편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위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가 달리 어떤 반응을 선택할 수 있었을까? 예컨대 이렇게 반응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 그 말을 들으니까 마음이 아프네. 넌 그럴 생각이 아니었겠지만 네 말이 나의 아픈 곳을 건드린 것 같아." 이런 식으로 당신의 상처를 묻어버리지 않고 인정해 보는 것이다.
자아 탐색에 대한 연습이 되어 역량을 강화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위협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까다로운 대화로 이어갈 수 있다. 그럴수록 더 부드러우면서도 만만하지 않은, 자신감이 있으면서도 통합되고 성숙한 자아를 다룰 수 있다.
당신이 관찰하고 있는 것에 대해 솔직해져 보자. 당신 내면에 존재하는 자신의 목소리에 대해 귀를 기울이고, 어쩌면 못나 보일 수도 있는 그 면을 솔직하게 받아들이는 데서 변화는 시작된다.
누구나 내면에 좋지 못한 부분, 수치스럽게 여겨 부인하려고 하는 과거로 형성된 그림자가 있다. 자아는 이런 그림자가 드러나지 않게 하려고 엄청나게 애를 쓴다. 그러나 위와 같은 연습으로 당신이 자아에 의문을 제기하는 법을 연습한다면, 당신 자신의 일부분이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때로는 타인을 판단하거나 투사하는 모습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중요한 건, 이 연습을 통해 당신이 자아와 분리되는 경험을 쌓을수록, 당신은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멀리서 상황을 바라보는 것처럼 침착하고 현명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자아ego가 존재하게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마음의 구조는 동일시identification이다. 동일시라는 단어는 ‘같다’는 의미의 라틴어 ‘이뎀idem’과 만들다는 뜻의 ’파케레facere’에서 유래했다. 따라서 내가 어떤 것과 자신을 동일시하면 나는 그것을 ‘같게 만드는‘것이 된다.
무엇과 같게 만드는가? 바로 ‘나’와 같게 만드는 것이다. 나는 어떤 것에 나의 자아를 부여하고 그것은 나의 ‘정체성’의 일부가 된다. 당신이 ‘나’라고 말할 때, 보통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진정한 당신이 아니다.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는 모든 것들과 혼동된 무엇이다.
어릴 적 우리는 ’나의‘ 장난감이 부서지면 강렬한 고통을 느꼈다. 그때 느낀 고통은 장난감 자체가 가진 가치 때문이 아니었다. 그 고통은 ’나의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온다. 장난감은 어린 우리의 자아, 즉 ’나‘의 일부가 되어 버렸기 때문에 아픈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나의 장난감이었던 그 정체성은 자라면서 나의 차, 나의 집, 나의 직업 등이 되었다. 나는 그 속에서 나를 찾으려 하지만 결과는 그 속에서 나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끊임없이 마음이 재잘거리는 소리와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생각들을 자신과 완전히 동일시한다. 아인슈타인은 자아의식을 ‘의식이 일으키는 시각적 환상’이라고 불렀다. 그 환상이 자아가 해석한 모든 것의 토대가 된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실체를 오해하는 토대가 되고, 당신의 모든 사고 과정, 상호작용, 관계의 근본이 된다. 당신이 창조한 당신 주위의 모든 현실은 이 근본적인 환상의 반영이다.
여기서 아주 좋은 소식이 하나 있다. 환상은 환상임을 알아차릴 때 소멸한다는 것이다. 환상의 알아차림은 환상의 종말이다. 당신이 오해하고 있는 동안에만 환상은 생존할 수 있다. ‘무엇이 내가 아닌가’를 아는 순간 ’나는 누구인가‘의 답을 알 수 있다. 자신이 무언가와 동일시 되어있음을 알아차리면 그 동일시는 더 이상 완전하지 않다. 집착이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 그 알아차림이 바로 나 자신이다. 그것이 의식 변화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