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정권이 붕괴되고 신군부에 의한 또 다른 군사독재의 서막이 시작되었다
1979년 '12·12 군사 반란' 사건이 일어난다. 일명 '12·12 사태' 실화의 긴장감을 밀도 있게 연출한 김성수 감독 영화 '서울의 봄'은 굴절된 역사 현장을 이미 알고 있는 세대에게는 다시 끓어오르는 분개를, 그 당시 시국을 잘 모르는 지금의 젊은 세대들에게는 흥분과 분노를 일으키며 만만세로 주행하고 있다.
간결하게 서론 하자면 "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 아닙니까!"라며 포효하던 전두광 역, 배우 황정민의 극 중 대사처럼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혁명을 위장한 반역을 꾀해 군내 사조직 '하나회'를 축으로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다. 혼돈의 시기를 틈탄 북한을 염두에 둔다거나 국민의 안위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군 병력을 자신의 욕망으로 동원하기에 이른다. 1979년 '10·26 사태'로 국가 원수가 사망하고 어수선한 정세를 생각해 볼 때 참으로 아찔한 군사 이동이었다.
영화에서 '하나회'는 자주 언급된다. 학연이나 인맥이 입신출세의 무시할 수 없는 요인으로 작용했던 그 시절, 군부 내 조직원들로 구성된 하나회 동맹이었으니 영화에서 실현된 것처럼 보안사의 감청과 공조로 그 공은 혁혁하게 낱낱이 연출된다. 유신 체제로 오랜 집권을 해온 박정희의 사망으로 유신정권이 붕괴하였지만 신군부에 의한 또 다른 군사독재의 서막이 시작되는 아연실색할 시점이다.
극 중 이태신 역의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을 진중하게 연기한 배우 정우성은 표정이며 뒷모습에서조차, 홀로 분투하는 장군의 깊은 고독이 그의 등마루에서 고스란히 느껴졌다. 전두환 역을 전두광이라는 비슷한 이름으로 설정한 것과 달리 장 사령관과 화법이나 성향이 판이하게 다르고 '태'자 하나만 넣어 성까지 달리 한 것은, 실재 인물인 듯 아닌 듯 여지를 남겨두며 클라이맥스의 극대화를 위한 의도된 설정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장태완 사령관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긴급 연행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격노하여 진두지휘하며 사태 말미까지 고군분투한다. 그의 굴하지 않는 진압 계획은 취사병과 행정병까지 모두 동원해 겨우 100여 명의 군사와 전차 4대 병력으로 맞서지만 진압군과 반란군 양측을 회군시키자는 전두환의 교활한 꾀로 인해 유일한 지원 병력이었던 9공수여단이 회선을 돌려 부대로 복귀하게 된다.
이 아슬아슬한 장면은 자진 제시한 교섭조차 지키지 않은 반란군과 진압군이 전차 전조등 불빛 앞에, 서로 대조를 이루며 클라이맥스에 다다른다. 사회적 습성이 몹시 저악하고 간교한 전두환의 무모함으로 어처구니없이 돌아가는 암담한 사태를 영화에서도 사실에 가깝게 재현한다.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가면서 예상치 못한 군가 '전선을 간다'가 울려 퍼진다. 이미 퇴장하는 관람객의 귀에 웅장한 이 군가가 울리자 어떤 이는 주춤하고 어떤 이는 다시 앉고, 어떤 이는 선 채로 듣는 "눈 내린 전선을 우리는 간다"라는 대목이 나의 마음을 움직인다. 위태로운 그날 밤, 절실하게 급박했던 현장감을 사실에 가깝게 담아낸 '서울의 봄'에 비장하고도 결연함을 자아내는 이 곡을 엔딩 크레디트로 선택한 것은 정확히 신의 한 수로 작용했다. 연주곡과 합창곡 등 여러 버전이 있지만, 느린 템포 '이재진 편곡'의 남성 중창곡으로 듣는 것이 더 비장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 전선을 간다 > 작곡 : 최창권 작사 : 우용삼 OST 편곡 : 이재진, 정은택
높은 산 깊은 골 적막한 산하 눈 내린 전선을 우리는 간다
젊은 넋 숨져간 그때 그 자리 상처 입은 노송은 말을 잊었네
전우여 들리는가 그 성난 목소리 전우여 보이는가 한 맺힌 눈동자
푸른 숲 맑은 물 숨 쉬는 산하 봄이 온 전선을 우리는 간다
젊은 피 스며든 그때 그 자리 이끼 낀 바위는 말을 잊었네
전우여 들리는가 그 성난 목소리 전우여 보이는가 한 맺힌 눈동자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대통령 박정희 시해 사건' 발생. 당일 늦은 시각까지도 국민들에게 보도하지 않은 사령부는 혼란 속에서 대통령 유고에 대한 보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옥신각신하다가 다음 날인 27일 새벽, 국가 원수의 사망을 보도했다.
그리고,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당시는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 통행금지 시간이 있던 시기였는데 계엄령 이후 통행금지 시간은 10시로 앞 당겨져 밤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로 시간이 제한되었다. 더불어 바빠진 것은 신문사와 방송국 또한 마찬가지였다. 국가원수 피살 뉴스가 보도된 27일부터 방송국은 티브이와 라디오를 비롯해 하루종일, 가곡과 진혼곡 등 클래식 음악만을 방출하였다.
내가 속한 합창단으로도 '대통령 서거 추모 음악'을 타이틀로 출연 요청이 들어왔다. 그 당시는 'TBC 동양방송국'이 존재하던 시절이었는데 서소문동과 운현궁에 있던 TBC 방송국 중 우리는 운현궁 스튜디오에서 녹화를 했다. 그 시절 가장 활발하게 운영되던 제일의 방송국이었지만, 1980년 신군부의 '언론통폐합'이라는 명분 아래 KBS에 흡수되고 폐국되었다. 80년대 초에 'TBC 여의도 사옥'을 지었으나 이 건물 또한 신군부의 위력으로 쓰지 못하게 되었다. 지금의 KBS 별관이 바로 그 TBC의 사옥이다.
'언론 통폐합' 명분은 지방과 수도권 각 언론사 경영주 십여 명을 보안 사령부로 소집해 온갖 모욕과 수난을 가하고 협박하여 조건 여하 없이 언론사를 포기한다는 내용의 강제 '포기 각서'를 쓰게 한다. 신군부의 총칼 앞에 언론의 입은 재갈이 물리고, 검열과 함께 쓰라는 대로 쓰고 읽어야 하는 이른바 '언론 탄압'의 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여러 차례 반복되며 지연되는 녹화 방송에 통금 시간이 가까워져 올수록 초초해하며 녹화를 마쳤다. 서둘러 방송국을 빠져나왔지만 계엄령이 선포된 서울 중앙 한복판의 어두운 밤길과 마주한 나는, 휑한 거리에 낙엽만 뒹굴고 가을바람이 황량하게 불던 밤으로 기억한다. 안국동 일대에 차량이나 일반 시민은 거의 없고 총을 멘 군인들이 곳곳에 배치해 서 있었던 공포와 불안이 엄습한 스산한 밤이었다. 이 기억은 오랫동안 내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은 채 멈춰 있다가 문득문득 생각나는 장면이 된다.
위태로운 시기를 보냈다, 그리고 봄이 왔다. 신군부 세력의 말도 안 되는 만행과 실정으로 인해 민주화 열기는 점점 더 고조되어 거세지고 전두환 장악 기간 중 가장 잔인한 학살로 기록되는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다. 역대 어느 대통령도 이처럼 간악하지 않았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한 시대가 아니었기도 하지만 통로와 보도 등 모든 것이 차단된 '광주 항쟁'의 진실은, 신군부에 의해 날조되고 폐쇄되었던 그야말로 잔혹한 봄을 맞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