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리안 Apr 09. 2024

화첩기행

꽃 그림자 따라 물가로 오니 산그림자 해그림자 발아래 머무네



열두 번의 바람과

열두 번의 태양과

열두 개의 초록을 데리고 

길을 나선다


구름은 매번 나를 앞서고

꽃은 먼저 피어 있어

조용하다가 왁자하다가

솔깃하게 나를 부른다

꽃 피는 소리로

꽃 지는 소리로


눈을 뜨면 온통 햇살이 눈 부신 봄날. 한들한들 불던 바람이 꽃샘바람으로 변하며 거세지자 도심의 양지바른 길녘에 핀 '냉이꽃' 긴 꽃대가 흔들흔들 심하게 흔들려 그러나 부러지지 않고 꿋꿋이, 기어이 꽃을 피우던 봄날의 기록은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지. 봄 한가운데로 접어들어 오월이 가까워오면 목단이라 불리는 '모란'이 피기 시작한다. 시골 어느 집 싸리 울타리에 모란이 무성히 피어 있기로 그 길을 나는 부귀영화 길이라 부르기로 한다. 어설픈 손길로 처음 수를 놓은 꽃이 모란꽃, 함박스럽게 큰 꽃을 눈에 담아 수를 놓았다. 어쩐 일인지 가지에 달린 초록색 잎에 눈길이 더 가는 것이 아주 크지도 그리 작지도 않으면서 단조롭지만 세 갈래로 난 잎에 매료되었다. 서툰 솜씨지만 제법 꽃답게 보여 스스로 흡족해하며 오래 간직했다.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는 구월 끝자락, 소리 내어 불러보는 구월의 어감은 꽤 부드럽다. 시월처럼 선듯하지 않고 팔월처럼 분주하지 않다. 찬란하고 눈부셨던 여름의 영광은 모두 사라지고 다음 오는 계절을 맞기 위해 조용히, 아직은 더운 구월 중순. 수풀조차 움직임이 전혀 없는 것 같은 는적는적한 늦여름 오후, 정적을 깨고 후드득! 소낙비가 쏟아진다. 가뭄 끝에 오는 여름비는 기뻤을 게다, 놀라기도 했을 게다. 길가에 핀 달개비꽃 얼굴에 소나기는 보랏빛 물방울을 맺혀 놓았다. 여름비가 오고 나면 능소화 발그레한 꽃이 송이째 떨어지며 마당을 주홍빛으로 물들인다. 어떠한가, 하얀색 저고리에 주홍빛 치마폭 위로 능소화 초록 잎들이 꽃과 함께 떨어지는 광경은.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기운이 옷소매를 타고 들어오는 쾌적한 계절이 시작된다. '벌개미취'며 '쑥부쟁이' 등 '구절초'가 구절구절 꽃을 피우는 가을이 시작되면 꽃향기를 비롯한 세상의 모든 냄새가 분명해진다. 도시에서조차 여기저기 노란 소국의 모습이 자주 보인다. 강원도 미시령 고개를 넘어가는 길목에 쑥부쟁이가 소담 지게 피어 있어 마음이 들뜬 기억이 오래 남는다. 그러다 계절은 아쉬움을 남기고 속도를 달리해 스산한 초겨울로 인도한다. 각양각색의 구절초는 구 씨 일가의 길섶 부근에 커다란 붓으로 '가화만사성'이라 써 주어도 마땅할 정도로 많은 종이 분포해 있지 않나 싶다. 소박해 보이나 기실, 자자손손 부흥한 세력가 아니든가 말이다. 우리가 통칭 들국화라 부르는 것이 바로 구절초요 산국이요 '감국'이요 '키큰산국' 등등으로 불리는 걸 보면 구 씨 일가의 위세가 대단하다 하겠다. 


먼 길 나서서 걷는 길에 눈발 날리더니 소리 없이 눈이 내린다. 어쩌자는 생각인지 한없이 내리고 또 내려 꽃가지 위에도 소복이 쌓이는데 추위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겨울 '동백꽃'이 피었다. 세상 어느 꽃보다도 사람이 먼저 다가가는 꽃이라 하겠다. 윤기 흐르는 짙은 녹색 잎에 붉고 단정한 자태지만 결코 허영을 부리지 않아 보이는 동백은 봉오리를 맺을 때나, 꽃이 질 때도 황홀함을 안겨 준다. 붉디붉은 동백꽃에 독특한 눈매로 총명해 보이는 동박새 한 마리 날아들면 그야말로 화룡점정, 그대로 동양화 한 폭이 펼쳐진다. 동백꽃과 동박새는 서로 공생 관계이니 잘 어울리는 조화로운 그림이 된다. 전남 여수를 천천히 걷다 보니 가로수가 동백나무다. 붉지만 밤에도 환한 꽃이라 말하면 심한 과장이 될까? 꽃송이째 툭툭 떨어지며 피고 지는 꽃 만나러 동백나무 동산 가까이 다가가면 이미 멀리 보이는 붉게 물든 흙길은 애잔한 풍경이다, 가슴 벅찬 광경이다, 사무치는 아련함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봄까치꽃' 이미 다가선 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