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조금 든 페터 한트케의 경우
페터 한트케의 경우:
‘순수한 언어/형식’이 정말로 문학의 미래일까? (2)
나이를 조금 먹은 페터 한트케의 경우
4. 「아이 이야기」(1981)
내용으로의 귀환은 9년의 텀을 두고 발표된 「아이 이야기」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아이 이야기」는 한트케가 자신의 딸을 기르며 생각하고 느낀 것들을 서술한 소설이다. 이 작품에서도 한트케는 자기 자신을 “그”라는 대명사로, 자식을 “아이”라는 대명사로 지칭하며 객관적인 시점을 유지하려 한다. 문체 역시 전과 다름없이 담담하다. 그러나 어머니에 대한 감상을 최대한 억누르며, 또 바로 그렇기에 더욱 구슬펐던 「소망 없는 불행」에서와 달리 「아이 이야기」에서 한트케는 본인의 세계관을 훨씬 또렷하게 제시한다. 한트케는 프랑스에 대한 동경과 독일에 대한 혐오, 아내와의 사이에서 느꼈던 복잡 미묘한 감정, 아이를 키우며 느꼈던 생활의 감동과 지리멸렬함, 그리고 작가로서의 꿈과 아버지로서의 현실 사이의 간극에서 솟아오르는 단상을 가리지 않고 작품을 통해 드러낸다. ‘내용 없는 형식’을 부르짖었던 젊은 작가의 초점은 이제 자기 삶의 내용으로 옮겨온 듯하다.
작품의 마지막 단락인 8장에 이르러서, 한트케는 아이라는 하나의 세계를 길러내는 동안 자신의 세계가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솔직하게 고백한다. 오늘날 아이를 낳는 것은 더 이상 필수가 아닌 선택 사항이다. 이것이야말로 한트케와 작금의 젊은 세대가 공유하는 ‘현대’적인 마인드일 테다. 현대의 젊은이들은 아이를 싫어하거나, 싫어하진 않더라도 귀찮은 존재로 여기거나, 설령 아이를 귀여워하더라도 자기가 낳아 기르는 것은 전혀 별개의 일로 생각한다. 한트케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한트케는 이제 아이를 절대적인 존재로 숭배하는 전통적인 가치를 복권시킨다. 여기엔 별다른 근거는 없다. 당위만 있을 뿐이다. 겪은 자가 아니고서는 이를 이해할 수 없다. 그는 “아이들은 모든 인간에게 영혼이다. 이것을 체험하지 못한 자가 누리는 편안함은 온당치 못한 행복이다”라는, 다소 진부하기까지 한 고대 극작가의 말을 인용한다. 그는 심지어 자신을 사로잡았던 “현대”라는 것이 실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은 아닐까 의문을 품으며, 아이의 두 눈에서 “영원한 정신”을 읽어내려 한다.
그리고 아버지-한트케와 작가-한트케는 별개로 존재하지 않는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경험은 불가피하게 한트케의 문학관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현대라 함은 아무것도 영원할 수 없는 시대이고, 모든 것이 모든 것과 갈등하는 시대이며, ’현대의 문학’이라는 것은 모름지기 ‘내용 없는 형식’을 향해 달음박질치는 ‘반문학의 문학’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아이의 존재는 영원을 보증한다. 모호함을 즐기던 전위적인 작가 한트케는, 플라타너스의 열매와 거리의 풍경, 발코니와 번쩍거리는 창문, 그리고 “그 길을 걸어가고 있는 아이들이 등에 멘 책가방의 금속 자물쇠와 이름표”를 기껍게 묘사한다. 그는 “칸틸레네—사랑과 모든 열정적인 행복이 충만하길”이라는 어느 시인의 문장으로 「아이 이야기」를 끝맺는다.
즉, 80년대에 접어들며 한트케의 문학에서 형식과 내용은 더 이상 불화하지 않는다. 한트케는 더 이상 전통적인 디제시스를 꺼리지 않는다. 「아이 이야기」를 한트케가 주선한 문학적 화해의 장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의 문학에 있어 이제 적대적인 불화는 멎은 듯하다.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간접적 계기, 그리고 아이라는 직접적 매개를 통하여 한트케는 내용과 형식의 균형을 찾는다. 이것을 문학적 퇴행이라고 봐야 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퇴행이라고 할지라도 필자는 그 퇴행은 긍정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랫동안 예술가들을 괴롭혀온 하나의 문제가 있다.
내용인가 형식인가?
현대라는 판정관은 형식의 손을 들어 주었다. 그러나 『관객 모독』의 경우에서 보듯 내용을 살해한 형식은 (조금 심하게 말해서) 조현병 환자의 넋두리로만 나타난다. 거기엔 어떠한 소통의 가능성도 없다. 더욱이 그러한 넋두리가 놓치고 있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그러한 넋두리조차 실은 시대, 역사, 작가, 주체라는 내용과 불가분의 관계로 묶여 있다는 것이다. 한트케가 이 희곡의 배우들에게 비틀즈와 롤링스톤즈의 음악을 듣고, 게리 쿠퍼의 서부극을 보라고 주문하는 것은 어떤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의 희곡 또한 철저히 동시대의 산물인 까닭이다. ‘순수한 언어극’이라는 것은 결국 꿈속에서만 가능하다. (그가 이 희곡의 헌사에서 존 레넌을 언급하는 것은 아마도 존 레넌 또한 그와 같은 몽상가이기 때문은 아닐까.)
요컨대『관객 모독』 같은 작품은 『관객 모독』 하나로 족하다. 적어도 한 시대에 이러한 작품이 여러 개일 필요는 없다. 그것은 실험으로서의 의의를 지니며 기존의 문학에 파장을 일으킬 수는 있겠지만, 그다음 단계에 무엇이 있을지, 진보된 문학이라는 것이 과연 정말로 존재하기는 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내용을 살해한 형식’이라는 표현이 너무 거창하게 들린다면 다르게 말해도 좋다. 서사 없는 문학. 이미지만 남은 영화. 서사도 서정도 없이 말맛만 남은 시. 조화로운 선율을 포기한 음악. 구상도 추상도 포기한 미술.
이것은 동시대 예술에 대한 진단이다. 오늘날 예술가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형식미를 추구하지만, 그 끝에는 기괴한 몰골의 형상만 남을 뿐이다. 아니 그것은 남지도 않는다. 다만 휘발될 뿐이다.
전위적인 실험을 일삼던 한트케는 끝에 가서 ‘아이’라는 조화에 안착했고, 다시 “이야기”를 하기로 결정했다. 「아이 이야기」는 곧 ‘한트케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시대의 질곡과 문학의 변천사를 담고 있는 한트케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현대 예술의 알레고리로 다가온다.
그가 각본가로 참여한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는 인간이 되기로 결단한 천사에 관한 영화이다. 흑백의 프레임 안에서 살던 불멸의 존재는, 영화 말미에 이르러 생과 색의 세계로 추락한다. 그러나 그것은 신에 의하여 내쫓긴 것이 아니라, 스스로 몸을 내던진 기쁨의 추락이자 삶으로의 약동이었다. 그러니 순수한 언어라는 형식을 추구하다 삶이란 내용으로 복귀한 한 작가에게서 날개가 떨어진 천사를 보는 것도 큰 무리는 아닐 테다.
결국 이야기에는 보편성이 있다. 예술이 무언가 지속적인 가치를 남기기를 염원한다면, 설령 극단적으로 쪼그라든 형태일지언정, 섣불리 내용을 살해하고 예술의 바깥으로 몰아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닐까? 물론 오늘날 예술가들은 더 이상 내용에 몰두할 필요는 없다. 어쨌든 우리는 예술의 가치가 그것이 무얼 다루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다루느냐에 있다는 사실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 이는 현대가 예술에 선사한 중대한 가르침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지막 내용’을 보존해야 한다. 그 마지막 내용은 아직까지는 공석이다. 비어 있는 내용의 공간에 과연 무엇을 채워야 할까? 무엇을 채울 수 있을까?
오늘날의 예술가들이 당면한 과제는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이 과제는 아마 골드바흐의 추측과 같은 수학계의 난제들이 모두 풀릴 때까지도 풀리지 않은 채로 남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예술가가 할 일은 다만 예술과 삶에 관한 치열한 고민 속에서, 영영 찾아지지 않을 조화로운 오아시스를 찾아 열심히 헤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신기루와 신기루들 속에서. 한트케가 그리하였듯이. 그리고 베를린 땅으로 내려온 천사가 그리하였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