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션 임파서블:데드 레코닝 PART 1〉(크리스토퍼 맥쿼리, 2023)
https://www.youtube.com/watch?v=EmYF7CdGsB0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불완전하게 알 뿐이지만 그때에 가서는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_고린도전서 13장12절
무대의 뒤편이 드러나고, 톰 크루즈가 처음 다른 사람의 얼굴 거죽을 벗어제낄 때의 기이한 감각. 〈미션 임파서블〉의 가장 독창적인 매력은 거기에 있었다. 그것을 으스스함이라고 하자. 마크 피셔가 지적한바, 으스스함The Eerie이라는 감각은 뭔가가 존재하거나 부재한다는 사실 자체의 이상함에서 기인한다. 이것은 어떻게 존재하는 것인가? 도대체 어째서 이게 없을 수가 있나? 대체 어떤 말도 안 되는 힘이 여기에 작용하는 것인가? 보편적인 경험과 지식의 지평 안에서 해소되지 않는 존재와 부재의 미스터리는 "우리의 삶과 세계를 지배하는 힘"을 의문시하게 만들며, 우리를 미혹하고 끌어당기는 동시에 거부하고 튕겨 내친다.
브라이언 드 팔마의 〈미션 임파서블〉은 관객들의 망막에 끝내주는 스펙터클을 제공하는 한편, 대뇌피질에 입력된 시각 신호들의 연쇄작용을 그들이 스스로 의심하게 함으로써 본다는 것의 불확실함을 체감하게 하는 영화였다. 키틀러의 말마따나 영화가 “그 시작부터 시각 신경에 대한 조작이며, 그 시대 자체에 대한 조작”이라면, 영화를 찍고 본다는 것은 그 물질적 조건에서나 의미론적인 차원에서나 상상을 실재로 만드는 불가능한 미션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상상과 실재의 간극과 교집합. 존재하는 것과 부재하는 것의 시차 또는 동시성. 우리가 보는 이미지는 늘 조작된 이미지다. 실재는 베일 뒤에 가려져 있고, 평평한 스크린의 배후를 관객은 결코 들춰볼 수 없다. 그러니까, 영화에는 언제나 으스스한 구석이 있다. 마치 달의 뒷면 같은. 드 팔마의 〈미션 임파서블〉은 영화 매체, 나아가 어떤 매체를 통하여 매개되지 않고서는 나타날 수 없는 실재 자체의 으스스함을 상기시킬 뿐만 아니라, 그러한 진실에의 접근 불가능성을 동사적 수행의 가능성으로 전환하려는 한 예술가의 미션 또는 비전이었다.
톰 크루즈의 신체, 라기보단 차라리 톰 크루즈라는 기호에 육화된 〈미션 임파서블〉이라는 전설은 언제까지 그 으스스함을 지속할 수 있을까. 어쩌면 〈미션 임파서블〉의 역사는 드 팔마가 메가폰을 놓은 이래로 꾸준히, 조금씩, 으스스함을 잃어버리는 과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덧 3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른 시리즈는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AI를 내세움으로써 지극히 현대적인 공포를 체현하려 한다. 이것은 시리즈 특유의 으스스함을 되살려 내려는 시도인가? 존재의 양자적 속성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에단 헌트와 친구들’의 성격이기도 하다는 점을 떠올려 보면, ‘실체는 없지만 모든 곳에 편재하는’ AI 빌런이라는 설정은 이를 다분히 의식한 듯도 보인다.(덤으로 AI라는 소재 자체가 아직까지는 시의적절하기도 하고 말이다.)
엔티티entity라는 이름부터가 존재의 확고부동함을 선언하는데, 그런 엔티티의 존재는 역설적으로 오늘날 인간 존재가 처한 불확실성을 깨닫게 한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엔티티의 각본에 의해 부정당한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디지털화되었기 때문이다. 대의 또한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힘의 각축과 모략만이 있을 뿐이다. 엔티티를 살해하는 열쇠가 십자가라는 사실은 엔티티가 기존의 보편성에 대립하는 뉴타입-카톨릭임을 암시한다(Catholic은 원래 ‘보편적’ ‘전체적’이라는 뜻이다.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엔티티의 의지는 가브리엘이라는 매개를 통해서만 드러나는데, 알다시피 가브리엘은 예언자 천사의 이름이다.
으스스함은 종교가 기능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모든 종교는 교인들에게 으스스함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야 한다. 야훼에게 인식 가능한 얼굴이 있다면 우리는 그를 섬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구닥다리 윈도우 미디어 플레이어, 또는 훨씬 전 히치콕의 〈현기증〉에서 예시된 파동형 그래픽을 떠오르게 하는 엔티티의 낯익은 얼굴엔 상상하기 어려운 요소가 전혀 없어서, 95년도 영화인 〈공각기동대〉의 인형사만큼의 전율도 주지 못한다. 엔티티의 각본이란 것도 허술하기 짝이 없어서 그것 자체로는 별다른 긴장감과 미스터리한 감각을 조성하지 못한다. (〈데드 레코닝 1〉의 짜릿함은 순전히 톰 크루즈와 맥쿼리가 편성한 액션 시퀀스의 쫄깃함에서 나온다.)
엔티티가 물리적 실체를 지닌 존재라는 점은 그의 으스스함을 훼손하진 않는다. 영화라는 매체의 물질성이 그것의 마법성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듯 말이다. 문제는 엔티티가 작동하는 방식에 조금도 마법적인 면이 없다는 것이다. 초월적 존재인 엔티티의 작동은 너무나도 훤히 눈에 읽히며, 오로지 액션의 카타르시스만을 위해 차려진 〈데드 레코닝 1〉의 직선적인 연출은 드 팔마의 마법 같은 눈속임에 비하면 너무나도 초라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데드 레코닝 1〉은 여전히 재밌다. 하지만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는 이제 더이상 으스스하지 않다. 자기가 '유령'임을 자기 입으로 되풀이하여 확인해야 하는 유령은 더이상 유령이 아니다. 엔티티가 그렇듯이 에단 헌트와 친구들의 계획도 허술하기 짝이 없다. 송경원이 지적한 대로 “에단 헌트의 행보는 엉망진창 편의적인 상황투성이다.” 거기에는 무언가 유령적인, 스크린 위의 전설적인 존재였던 에단 헌트는 없다. 다만 톰 크루즈의 몸만이 현현할 뿐이다. 유령요원 에단 헌트는 언제 무데뽀 아저씨가 되고 말았나?
https://www.youtube.com/watch?v=I720xCnnPUY
으스스함을 잃어버리는 그 순간, 전설은 전설로서의 지위를 상실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전설을 필요로 한다. 전설은 유지되어야 한다. 톰 크루즈와 맥쿼리에 의해 새로 씌어진 ‘믿을 수 없는 스턴트 액션의 극한’이라는 전설이 이때 끼어든다. 톰 크루즈는 어느 순간 스스로 에단 헌트가 되기로 결정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드 팔마의 비전은 말도 안 되는 끝장 액션의 향연으로 대체된다. 톰 크루즈가 깎아지른 절벽을 맨몸으로 기어오르고, 초고층 빌딩의 외벽을 날아다니고, 그러고도 성에 차지 않아 비행기에 매달렸다는 기막힌 사실이 에단 헌트의 신출귀몰한 첩보 전설을 대신한다. (아니 글쎄, 무려 600번이나 패러글라이딩을 연습하고 30번이나 절벽에서 뛰어내렸다네!) 말하자면 뒤집힌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다. “사실이 전설이 될 때, 사실을 전설로 기록합니다.” 물론 이건 시시한 동어반복이다.
전설이 되기로 한 사실은 얼마나 오래갈 수 있을까. 아무리 믿기 어려운 사실이라 봐야 그건 유사pseudo-전설일 뿐 아닌가.
〈데드 레코닝 1〉은 〈미션 임파서블〉이라는 전설이 이제 슬슬 끝자락에 닿아 간다는 걸 어렴풋이 예감하게 한다. 이것이 '액션영화' 일반의 운명을 대리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버스터 키튼에서부터 성룡을 거쳐 톰 크루즈에까지 도달한 액션스타의 계보는 어디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이건 단지 톰 크루즈의 노쇠화에 대한 걱정이 아니다. 그보다는 액션영화가 지닌 시각적 경이의 잠재력이 이제 거의 다 소진되어버린 게 아닐까 하는 불안이라고 하는 편이 낫겠다. (이미 시리즈의 1편과 최근의 노익장 〈인디아나 존스〉까지 숱한 영화에서 보아온) 달리는 기차 위에서 벌이는 악당과의 사투조차 ‘손에 땀을 쥔다’는 관용구의 진부함만큼이나 진부한 액션이 되지 않았는가. 액션영화에서 빠질 수 없는 자동차 추격 씬은 이번 영화에서도 대체로 호평을 받고 있지만, 〈데드 레코닝 1〉과 〈존 윅 4〉와 같은 영화들은 화려한 자동차 액션조차 금세 시큰둥하게 만들 것이다. 으스스함의 실종과 더불어, 새로운 액션 또한 더 이상 꿈꿀 수 없게 되는 건 아닐까?
이왕 앞서가는 김에 조금 더 대범하게 질러 보자. 불가능을 가능케 하(것처럼 보이게 하)는 “시각 신경에 대한 조작”으로서의 영화는, 이제 슬슬 끝자락을 향해 다가가는 것이 아닌가?
https://www.youtube.com/watch?v=UaYfi-A7xY0
며칠 전 뤼미에르 형제 〈눈싸움〉(1897)의 컬러 복원판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그 시기의 영화에는 아직까지 자신이 무엇이 될 것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순진무구함, 단지 그저 살아있는 사람들이 움직이며 뛰어노는 생생한 활력이 솟구쳤다. 그건 오늘날 영화에서는 도무지 찾아보기 힘든 놀라운 광경이었다. 과연 오늘날 영화는 다시금 그러한 생기를 되찾을 수 있을까? 만약 그게 불가능한 미션이라면, 영화는 앞으로 무엇이 될 것인가?
아마도 우리는 또다시 불가능에 도전해야 할 것이다. “다가오지만 도착하진 않는” 영화의 종말과 맞서싸우며. 또는 창조적인 연상작용을 방해하는 진부한 실천들과.
P. S. 그렇지만 다시 강조하건대,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는 여전히 재밌고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