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프터썬〉(샬롯 웰스, 2022)
아니 에르노의 『남자의 자리』—원제는 “La Place”—를 읽고 얼마 되지 않아 샬롯 웰스의 〈애프터썬〉을 보게 되었다. 남겨진 딸이 돌아가신 아버지를 회고하며 이해하려 노력한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같은 모티프를 공유하는데, 그러면서도 서로 다른 점이 많다. 에르노의 에세이-소설이 좀 더 중립적이고 객관적이라면 웰스의 영화는 좀 더 감정적이고 주관적으로 다가온다. 물론 딸내미로서 품을 수밖에 없는 아빠에 대한 복잡하고 절절한 감정이 에르노의 작품에서도 묻어나오긴 하는데, 〈애프터썬〉에 비하면 그 농도가 옅다. 내 생각엔 아버지에 대한 심리적 거리감의 차이가 결과물의 차이로 나타난 게 아닌가 싶다.
에르노는 아버지와 다른 종류의 사람이다. 그들은 다른 세계에 속한다. 에르노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 그녀의 아버지는 “단순하고 하찮은 혹은 용감한 사람들의 부류”였다.(그러면 에르노는 어떤 부류의 사람일까? ‘복잡하고 중요한 그리고 겁 많은 사람들의 부류’?) “진짜 문학”을 탐독하며 “그의 태도를 바꿔 주려고” 했던 고상한 에르노에게 그녀의 아버지는 대꾸한다. “책, 음악, 그런 건 너한테나 좋은 거다. 내가 살아가는 데는 필요 없어.”
에르노는 어느 순간 그의 아버지가 없는 세계, 쁘띠부르주아의 세계로 이행했다. 『남자의 자리』의 또 다른 모티프는 어린 시절에 속했던 세계를 두고 멀리 떠나온 사람의 부끄러움이다.(이는 사실상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모티프와 같은 것이다.) 아버지는 그녀가 한때 속했던 세계다. 그녀는 그 세계를 회고하지만, 아마 돌아갈 생각은 없을 것이다. 다만 에르노는 지나온 세계가 자신의 일부임을, 그리고 아버지의 세계가 결코 부끄러워해야 하는 지양의 대상이 아니었음을 인정하고 싶을 뿐이다. 더불어 에르노는 자신이 나쁜 딸이었음을 은근히 시인하기도 한다. “어쩌면 그는 다른 딸을 원했을지도 모른다.”
“이제 와서 이 세세한 것들의 의미 해석을 꼭 필요한 일 이상으로 스스로에 강요하는 것은, 그것이 무시해도 좋은 것이라고 확신하며 거부했었기 때문이다. 모욕적이었던 기억만이 그 일들을 간직하게 해줬다. 아래에 있던 세계의 추억을 마치 저급한 취향의 어떤 것처럼 잊게 하려고 애쓰는 세계,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욕망 앞에 무릎을 꿇었던 것이다.”
“글을 쓰며 하류라 여겨지는 삶의 방식에 대한 명예 회복과 그에 따른 소외를 고발하는 일 사이에서 좁다란 길을 본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우리의 것이었고 심지어 행복하기도 했으며, 우리가 살던 환경의 수치스러운 장벽들(<우리 집은 잘 살지 못한다>는 인식)이기도 했으니까. 행복이자 동시에 소외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아니 그보다도 이 모순 사이에서 흔들리는 느낌이다.”
반면 샬롯 웰스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훨씬 더 애틋하게 여기는 것 같다. 어떤 인터뷰를 보니 감독은 〈애프터썬〉이 그녀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로만 읽히지 않기를 바라는 것 같던데(그녀는 ‘정서적으로 자전적인 emotionally autobiographical’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창작자로서는 당연한 요구다. 제아무리 자전적인 이야기라도 편집과 각색을 동반하기 마련이니까. 창작물과 자기를 완전히 동일시하는 시선들이 달갑지 않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단서들로 미루어볼 때 소피에게서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웰스는 아버지를 그저 회고하는 데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기억을 재생산하려 하는데, 다루는 테마가 워낙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것이다 보니 영화도 얼마간 그런 뉘앙스를 띠지 않나 싶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나는 (역설적이게도!) 〈애프터썬〉이 충분히 감정적이지 않다고 느꼈는데, 뭔가를 꾹꾹 억누르려고 하거나 반대로 억지로 드러내려고 하는 듯한 부자연스러움이 약간 엿보였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솔직히 말하면 총 세 번 정도 삽입된 검은 조명 아래서의 춤 씬을 보면서 나는 조금 거북했다. 거북함의 정체는 김병규 평론가의 단평으로 갈음하겠다.
“(샬롯 웰스) 감독은 '예술적' 아이디어와 형식에 지나치게 의존해 장면 내에서 활용되어야 할 연출적 상황을 방치해두고 있으며, 화면에는 보편적 데쿠파주와 다르게 숏을 운영해야 한다는 강박이 돌출적으로 남겨진다. 모호하기보다는 뭉뚱그려져 있고, 기억의 효과는 감각적 자극 없이 뻣뻣하게 구사된다.”
https://www.youtube.com/watch?v=912Ntw7oYOg
〈애프터썬〉을 본 직후에는 그 검은 조명 아래서의 Under Pressure씬을 빼고, 바로 앞의 흐릿한 폴라로이드 사진 장면에서 바로 뒷 장면으로 넘어가길 바랐다. 방금 글을 쓰면서 해당 장면만 다시 찾아보았는데, 소피와 캘럼이 춤을 추는 장면 자체는 정말 맘에 든다. 퀸의 노래 선곡도 훌륭하다. 영화 보는 당시에는 놓친 거 같은데 오히려 지금 보니 굉장히 아름다워 보인다. 다만 검은 조명 씬과의 교차편집은 지금 봐도 과잉인 것 같다. 솔직히 슬로우모션과 클로즈업도 필요 없을 듯하고, 소피와 캘럼의 춤만 제대로 담아냈으면 더 좋지 않았겠나 싶다.
김병규와 내가 느낀 떨떠름함이 어디서 기인하는지, 같은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나 역시 샬롯 웰스 감독의 주관적 강박이 이 영화에 존재한다고 느꼈는데,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애프터썬〉의 거의 모든 장면에는 뚜렷한 연출적 의도가 감독의 계산에 서 있는 듯하다. 클로즈업과 오프포커싱의 빈번한 사용, 홈비디오의 특성을 활용한 장면들, 프레임 내의 인물 배치 구도를 통한 주제 의식의 점진적 변화, 마지막 장면에서의 라운드패닝, 그리고 영화적 디제시스 밖으로 툭 튀어나와 있는 검은 조명 씬까지. (각각의 연출적 전략들이 다 싫었다거나 잘못 됐다거나 그런 얘기가 아니니 오해하지 마라.)
〈애프터썬〉은 엄청나게 감정적인, 감정적일 수밖에 없는 테마를 다룬다. 그리고 실제로 이 영화는 감정적이고 주관적이다. 그건 괜찮다. 나는 샬롯 웰스 감독이 아니 에르노와 같은 방식을 취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와 글은 애초에 다른 매체일뿐더러, 두 사람 역시 애당초 같은 방식으로 아버지에 접근할 수 없는 사람들일 것이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감정은 때로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가 감정적이려면 그런 불가해함을 다뤄야 한다는 것이다. 〈애프터썬〉에서는 그런 느낌을 별로 받지 못했다. 〈애프터썬〉의 감정은 모두 손쉽고 안전하게 이해의 범위 내로 들어온다. 웰스는 주관적 감정은 모두 전략적 선택의 틀 안에서 작동하는 것 같다.
어쩌다 보니 아쉬운 지점만 잔뜩 언급하게 됐는데, 나는 이 영화가 좋다. 나중에 또 보라고 해도 볼 의사가 있다. 전략적 선택의 틀 안에서 작동한 그 감정들이, 나는 싫지 않았다.(검은 조명 씬만 빼고…)
(그러고 보면 보통 나로 하여금 글을 쓰게 하는 영화는 꽤나 좋았는데 왠지 모르게 아쉬움이 남는 그런 영화들인 것 같다. 백 퍼센트 납득할 순 없더라도, 아쉬움의 정체를 나름대로 소명하고 싶어진달까.)
사실 〈애프터썬〉을 보고 나서 처음 쓴 글은 픽션에 가까웠다. 글을 쓰다 보니 아니 에르노의 『남자의 자리』가 불현듯 떠올랐고, 에르노가 ‘아버지’를 ‘그’라고 호명했던 것이 떠올랐다. (자살한 어머니에 대한 소설인 페터 한트케의 『소망 없는 불행』에서도 한트케는 어머니를 ‘그녀’로 지칭한다.) 다음의 글은 이에 착안하여 〈애프터썬〉의 감정적 거리감의 변화에 따라 구성해 보려고 한 픽션적 회고다. 처음 쓸 땐 되게 잘쓴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까 진부한 문장도 있는 거 같고, 이 짧은 글에도 감정적인 과잉이 조금 있는 거 같기도 하고… 아닌가? 하여튼 〈애프터썬〉에 대해 글을 쓰면서 안 싣기도 뭐해서 그냥 아래 싣는다.
어느덧 그 시절 아버지의 나이가 되었다. 더 이상 생일이 설레지 않았다. 간밤에 꾸었던 이상한 꿈엔 아버지가 나왔더랬다. 벌써 가물거리는 꿈결이 야속했다. 그가 그리워져서 캠코더를 꺼냈다. 오랜만에 만난 그는 기억보다 앳돼 보였다. 나는 오랫동안 그를 원망하다가 다시 오랫동안 잊고 지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아침마다 그가 남긴 카펫을 밟고 일어나면서. 그의 나이는 131에서 멈췄다.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하여 태엽을 되감아 봤다. 모두 허사였다. 나는 그 시절의 나만 떠올렸다. 열쇠구멍 사이로 본 언니들과 오토바이의 그 남자애. 포켓볼을 같이 쳤던 오빠들과 노란색 자유이용권, 파인애플맛 환타를. 초점이 나간 풍경과 화면을 가득 채운 피사체들, 파편처럼 흩어져 있는 그를 나는 허리 숙여 주우려 했다. 어두컴컴 속에서. 깜빡거리는 사이키 조명을 등불 삼아. 그때 내가 물안경을 잃어버렸었지. 그가 내게 건네다가 빠뜨렸던 걸까. 그는 물속으로 깊이 들어갔고 오랫동안 나오지 않았다. 수면은 고요하게 흔들렸고 나는 그가 올라오는 모습을 기억할 수 없었다.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왜 나를 떠났을까. 아니면 내가 그를 떠났던 걸까? 나는 당신을 사랑했고 당신도 나를 사랑했다. 우리는 같이 즐거웠지만 당신은 그때 나를 보내고 있었다. 당신은 손목을 잡혔을 때 빠져나오는 법을 알려주었지만 뒤에서 입을 막을 땐 어떡해야 하는지 가르쳐주지 않았다.
해가 졌다. 조금 더 떠있어도 좋았는데. 그는 그로서도 어쩔 수 없다고 했다. 미안하다고 했다. 해가 졌어도 너는 거기 있으라 했다. 그럴 거면 썬크림을 발라 주지나 말지. 그를 이해할 순 없었지만 그가 어쩔 수 없었다는 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미안하다고 했다. 그때 그 유황의 촉감을 아직 떠올릴 수 있어서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캠코더는 여느 추억의 홈비디오처럼 줌인과 줌아웃을 반복하고 있었고 그녀는 이제 줌아웃된 채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는 거기에 있었고 그녀는 여기에 있다. 캠코더는 컷을 하지 않고 한바퀴 빙 돌았고 그녀는 그때 그에게 했던 얘기를 떠올렸다. 그와 같은 하늘 아래 있어서 좋다고. 바다에 비친 것이든 둥둥 떠있는 것이든. 그는 여기에 있다. 그녀는 이제 패러글라이딩을 할 수 있다.
덧. 소피 역의 프랭키 코리오가 너무 귀엽게 연기를 잘해줬는데 미처 언급하지 못했다. 아버지 캘럼 역의 폴 메스칼 연기도 좋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