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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nui Mar 06. 2023

플레이, 플레이, 플레이, 플레이 플레이 플레이

〈플레이타임〉(자크 타티, 1967)



플레이, 플레이, 플레이, 플레이 플레이 플레이


자크 타티


기분이 우울했다. 영화를 보러 갔다. 영화를 보러 가는 사람은 딱 두 부류로 나뉜다. 소중한 사람과 시간을 보내러 가는 사람과 그냥 외로운 사람. 나는 후자였고 외로운 사람들은 가끔 우울한 날이 있다.


외로운 사람들은 외롭지 않은 사람들보다 어떤 영화를 볼지 말지 더 민감하게 따지곤 하는데, 동네 CGV에는 볼 영화가 없어서 간만에 혼자 서울에 갈까 싶었다. 귀찮은데 갈까 말까 고민하다가 가기로 했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자크 타티 회고전을 하고 있어서. 겸사겸사 바람도 쐬고.


자크 타티의 이름을 처음 들은 건 문학동네 인스타 라이브에서였는데 오한기가 무슨 신간을 냈다고 했었나 그랬던 것 같다. 나는 그런 걸 할 때 제 시간에 들어갔던 적이 거의 없고 사실 들어갈 생각도 없었는데 저녁을 먹고 할 일이 없어 인스타그램을 켰다가 우연히 들어간 것이기 때문에 라이브를 켰을 때는 이미 끝날 즈음이었다.


라이브를 진행하던 정지돈이었나 금정연이었나가 Q&A를 받고 있었고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며 서둘러 진행하고 있었다. 오한기에게 어떤 영화감독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오한기가 쓴 단편 「나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정말 즐겁게 읽었고 나도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좋아했기 때문에 내심 그가 클린트 이스트우드라고 대답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오한기는 그러지 않았다. 그 대신 자크 타티라고 했다. 자크 타티. 네 글자만. 길게 생각하지도 않고. 자크 타티. 자, 다음 질문은… 


클린트 이스트우드


그러고 보면 오한기가 그리워하는 오한기의 이스트우드는 구레나룻을 사자처럼 기른 젊은 시절의 서부 사나이 이스트우드였고 백발이 성성한 노감독 이스트우드가 아니었으므로 그가 좋아하는 영화감독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이스트우드라고 하지 않을 거라는 것쯤은 알아챘어야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오한기의 글을 좋아하고 오한기가 좋아한다는 영화감독이 대체 어떤 양반인지 궁금하기도 해서 자크 타티의 영화를 다운받으려고 했는데 한국에서 자크 타티의 영화를 볼 수 있는 합법적인 경로는 없었고 나는 어쩔 수 없이 뒷골목을 쏘다니는 영화 밀매상이 되어 불법적인 경로를 뒤지고 다녔지만 토렌트로도 볼 수 없었다. 시드가 없더라고.


그뒤로 언젠가 시네마테크 같은 곳에서 자크 타티를 틀어주면 자크 타티를 봐야지라고 생각만 했는데 오늘 드디어 자크 타티를 본 것이다.






존 케이지 4분33초


존 케이지의 〈4분33초〉는 음악 없는 음악이다. 악보 대신 우연에 의해, 음계가 아닌 소음을 통해, 작위적인 무작위거나 무작위적인 작위에 의해 곡이 전개된다. TACET, 연주하지 말고 쉬어라. 


완벽한 침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귀를 기울이면 당신 주변의 모든 것이 음악입니다.

귀 기울이는 자가 곧 작곡가다!


뭔가를 재현하려 하는 표제음악과 달리 〈4분33초〉는 뭔가를 재현하려 들지 않고 오로지 전개, 전개만이 있을 뿐인데 전개되는 것은 소음이고 소음은 음계를 지니지 않는 소리이며 음계를 지니지 않는다는 것은 음계간의 질서라는 의미장 바깥에 있다는 것이고 존 케이지는 그럼으로써 역설적인 의미를 확보하는 데 성공한다. 역설적인 의미는 일반적인 의미와 같지 않다. 둘은 다르다. 질적으로 다르다. 둘은 다른 차원에 있다. (예술에서의) 일반적인 의미가 작품의 내적인 요소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생성되는 것이라면 역설적인 의미, 그러니까 존 케이지가 연주하지 않는 연주곡으로써 획득한 의미는 외부의 맥락과 역사성에 의해 새롭게 부여된 의미다. 그건 완전히 자의적이고 창의적인 의미, 자유, 이를테면 마르셀 뒤샹이 소변기를 떼어다가 〈샘〉이라는 표제를 달아 전시회에 출품했을 때 얻어지는 의미, 말하자면 음이 없는 의미 같은 것이다. 음이 없는 의미는 재현 없는 회화, 아니 추상까지도 없는, 그러니까 이젤 없이 캔버스만 남은, 잭슨 폴록의 액션페인팅 같은 것인데, 거기서 중요한 것은 행위, 보다 정확히 말하면 행위의 감각으로서의 작품이다. 


〈4분33초〉는 어떤 대상을 표상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그냥 곡의 재생시간인 4분33초 동안의—꼭 4분33초가 아니어도 되는—소음이다. 〈4분33초〉는 4분33초다. 4분33초는 플레이타임이다.






영화가 끝난 뒤엔 GV가 있었다. 이명세 감독은 로버트 알트만의 〈플레이어〉를 언급했다: 그 영화엔 어떤 영화를 25단어 이내로 설명해 보시오라는 대목이 있는데 〈플레이타임〉을 그렇게 설명해 보라고 하면 타티 본인도 설명을 못 하지 않을까요? 〈플레이타임〉이라는 영화엔 오로지 하나의 키워드, ‘플레이타임’이라는 키워드만 남아 있는 거 아닐까요?


2시간6분은 〈플레이타임〉의 러닝타임이다. 〈플레이타임〉은 2시간6분 동안 소음과 잡음, 리듬과 템포, 움직임과 유머만으로 전개되는 영화다. 자기 전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아닌 잠들지 않는 놀이 시간이다. 놀이 시간은 플레이타임이다. 〈플레이타임〉은 2시간6분이다. 2시간6분은 플레이타임이다. 〈플레이타임〉은 플레이타임이다.


‘플레이타임’은 〈플레이타임〉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투명한 단어다. 이건 상징이 아니다.





『게임: 행위성의 예술』(C. 티 응우옌). 워크룸프레스는 책을 참 예쁘게 만든다.


지난달에 워크룸프레스에서 나온 C. 티 응우옌의 『게임: 행위성의 예술』을 읽었다. 이 책에서 티 응우옌은 예술이나 미학에 관한 본격적인 논의를 펼치는 데엔 별로 관심이 없고 어느 대목에선 당신이 모종의 이유로 게임이 예술이라는 나의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그러지 않아도 좋습니다, 예술을 ‘여러 주요 측면에서 예술과 흡사한 작품들(works)’로 바꿔 읽어도 좋습니다라고까지 말하는데, 티 응우옌은 게임이 불필요한 장애물을 극복하려는 자발적 시도라는 버나드 슈츠의 정의에 입각하여 ‘행위성’이 게임이라고 하는 '예술과 흡사한 작품들'이 통과하는 매체라고, 가령 음악이 소리를, 이야기가 서사를 기록하게 해준다면 게임은 인간 행위의 유형과 성격 들을 기록하고 저장하고 전달하는 매체라고 주장한다.


최근에 나는 행위가 예술의 매체가 될 수 있는가를 자주 생각했다. 처음엔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나는 예술은 항상 현실과 거리를 둔다는 아서 단토의 언명을 신뢰하고 말인즉슨 나에게 있어 예술이란 어느 정도 관조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는 능동적 참여인데 행위라는 것은 관조보다 훨씬 현실에 가까운, 현실에 흡착해 있는 것이고 현실에 흡착해 있는 것은 능동적이라기보다 자동적∙수동적일 수밖에 없으므로 예술이 될 수 없다는 게 그간의 내 지론이었다. 존 케이지의 〈4분33초〉나 뒤샹의 〈샘〉이 예술이라면 그것은 작가들이 행한—또는 수용자들이 작품 앞에서 행한—행위의 성격 때문이라기보다는 예술사적인 이유, 달리 말해 외부의 맥락 때문에 예술인 것이 아닌가라고 나는 생각해왔고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어제 〈플레이타임〉을 보고 난 뒤에 나는 행위와 현실을 등치시키는 것이 어쩌면 성급한 오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됐고 작가와 관객의 상호작용이라는 행위에 앞서 예술사 운운하는 것은 앞뒤가 뒤바뀐 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오리무중에 이르고 말았다. 존 케이지의 〈4분33초〉나 잭슨 폴록의 작품들이 캐논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면 그것은 이들이 자기 분야에서 거의 가장 먼저 예술의 개념을 뒤흔든 선구자적인 작품들이기 때문일 뿐이고 그들의 독특한 작업을 지금 시점에서 다시 재연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을 거라고 나는 원래 생각했는데, 지금은 폴록의 액션페인팅이나 케이지의 〈4분33초〉를 ‘행위로써’ 재연하는 것도 나름의 새로운 의미를 창출할 수 있지 않을까 의심하게 됐다.






〈플레이타임〉의 사운드 디자인은 과장되어 있다. 영화 초반에 윌로 씨가 안내원의 안내를 받아 사방이 유리로 둘러싸인 무균실 같은 방 안에 있을 때조차 타티는 백색 소음을 삽입해 놨는데, 마치 아로노프스키의 〈레퀴엠〉에서의 과장된 사운드가 관객을 불안하고 긴장하게 만들듯이 〈플레이타임〉을 보는 동안에 나는 모종의 심한 불안과 긴장을 느꼈다. 〈플레이타임〉은 거나한 취기, 또는 약에 취한 듯한, 감각을 감각하게 하며 그건 처음도 끝도 없이 전개, 전개, 전개되기만 한다. 윌로 씨와 바바라라는 두 초점인물이 있기야 있지만 카메라의 초점은 그들에게 맞춰져 있지 않으며 그들은 단지 게임 속의 NPC처럼 제 멋대로 움직이고 돌아다니다가 제 멋대로 움직이는 카메라와 가끔씩 마주쳤다가 헤어진다. 〈플레이타임〉은 자유로운 동선movement의 영화다. 〈플레이타임〉은 자동기술법으로 씌어진 영화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써제낀다고 소설이 되는 것은 아니며, 아무거나 찍는다고 영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플레이타임〉의 자유로움은 오히려 무수한 배우들의 동선을 조정하기 위한 고도의 디렉팅에 의해 구성된 자유다. 예술은 작위의 산물이며 항상 구성되는 것이므로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구성이 아니라 구성의 효과—자유다.


〈플레이타임〉은 자유를, 자유의 거울상인 불안을, 불안에 내재한 기쁨을 감각하게 한다. 행위의 감각으로서의 영화.






보통의 서사 예술은 이야기를 저장하고 전달한다. 어떤 서사 예술은 이야기를 폐기함으로써, 스스로 서사 예술이기를 포기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이를테면 〈히로시마 내 사랑〉이나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와 같은 영화에서 알랭 레네는 이야기의 빈자리를 기억으로 채운다. 레네의 영화가 기억의 가능한 한 형식, 기억을 저장할 수 있는 물질적 추상이라면 〈플레이타임〉에서 자크 타티는 빈자리를 감각으로 채운다. 타티에게 〈플레이타임〉은 감각의 가능한 한 형식이다.


이제 〈플레이타임〉에 대해 제기되는 질문은 이런 것이다: 감각은 서사를 대체할 수 있는가? 감각-영화는 서사-영화의 깊이를 획득할 수 있는가? 깊이가 아니라면 다른 가치 있는 것을? 그것은 자유인가? 〈플레이타임〉이 가능케 하는 자유라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아, 잘 모르겠다.






도저히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문제 앞에서 때로는 결단해야 한다고, 그게 책임감 있는 태도라고 단언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결단을 끝까지 유보해야만 한다고, 어쩌면 그런 종류의 문제는 유보의 유보의 유보로서만 성립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후자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은 잘 모르겠다. 더 쓰기도 귀찮고. 일단은 계속 영화를 열심히 보는 걸로.



〈플레이타임〉(자크 타티,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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