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이 운다〉(류승완, 2005)
〈아라한 장풍대작전〉(2004)은 사라져 가는 무림을 낭만적으로 보존하기 위한 영화적 시도였다. ‘강호의 도리가 땅에 떨어진’ 시대에, 무武와 협俠이라는 전통적 가치를 지키는 방법은 상상계에나마 곤륜산을 건설하는 것일 테다. 〈아라한〉의 장르적 세계는 현실을 배경으로 하지만 현실에 속하지 않는다. 〈아라한〉은 상징적 질서가 해체된 현실에 상상이라는 틈을 내어 상징을 다시 메꾸는 것을 목표로 하는 영화다.
반면 〈주먹이 운다〉(2005)에는 상상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상환과 태식은 각자의 사정으로 극한의 상황에 몰려 있으며, 협을 행할 올곧은 마음가짐은 각박한 현실에 밀려 자취를 감췄다. 문명은 무력을 독점하고 야만은 비가시화된다. 비가시화된 야만은 이내 의협심을 내쫓는다. 성깔과 울분만 남은 주먹은 쓸모가 없고, 쓸모없는 주먹은 범죄의 도구나 앵벌이 수단으로 전락할 뿐이다.
문명과 야만이라는 테마는 어김없이 서부극을 소환한다. 말하자면 〈주먹이 운다〉는 황량한 서부의 풍경을 황폐한 서울의 내면으로 대체한 일종의 포스트 서부극이다. 힘을 쓸 수 없는 무사는 누구를 위해, 무엇과 싸워야 하는가? 류승완은 자기 자신을 적으로 내세운다. 주먹은 복싱이라는 형식을 통해 아들과 아버지의 참회 의식으로 화한다. 감독 스스로 “마지막 장면을 찍기 위해 (영화를) 찍었다”고 말할 때, 6라운드를 통째로 보여주는 마지막 복싱 경기는 장르에 대한 헌사로 읽히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 헌사는 다소 기만적인데, 상환과 태식이 자기 자신을 적으로 호명할 때 대결 영역은 문명의 야만에서 개인의 야만으로 축소되기 때문이다. “세상에 사연 있는 사람 너 하나뿐이 아니”라는 최사장의 대사는 인간사에 대한 통찰이라기보다는 문명에 의한 교도 작업으로 들린다. 그마저도 삶의 포괄적 조건에 대한 응전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자기 자신과의 피학적 싸움은 문명화된 야만에 의한 처벌을 대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은 극중 인물들을 넘어 이 영화가 지닌 액션 장르로서의 자의식에까지 확장된다. 액션이라는 장르는 누구나 지니고 있는 폭력 충동을 영화라는 가상의 세계에서 대신 충족시키는 장르다. 그 스스로 ‘문명화된 야만’인 셈이다. 고로 액션 장르와의 싸움은 그러한 문명화된 야만과의 싸움이 돼야 한다. 〈아라한〉의 액션이 심지어 상환이 깡패들에게 복수하는 장면에서조차 멋지게 그려지는 것과 달리, 어설프고 아마추어스러운 〈주먹이 운다〉의 폭력은 액션 마니아인 감독의 장르에 대한 고민을 드러내는 듯도 하다.
그러나 상환이 동료 재소자의 귀를 물어뜯고 피칠갑을 하는 장면은 인물의 악마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주먹이 운다〉의 메타적 성격을 의심케 하며, 결국 〈주먹이 운다〉는 스스로 내포한 장르영화로서의 정체성과 제대로 맞붙기 전에 휴머니즘에 취하는 손쉬운 길로 빠진다. 애써 길게 뽑아낸 처연한 마지막 복싱 시퀀스는 장르에 대한 헌사로 나아가지 못하고 개인적 취향에 머물고 마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영화인 〈짝패〉(2006)에서 류승완은 액션영화에 대한 탐구는 제쳐 두고 폭력에 대한 취향을 극한으로 밀어붙이는 길을 택한다. 취향에 대한 탐닉만으로도 류승완의 영화는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재밌는 영화지만, 주먹을 더 뻗을 수 있는 지점에서 멈추고 스트레이트를 먹이지 못했다는 점에서 〈주먹이 운다〉가 더욱 아쉽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