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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nui Jun 30. 2022

완결의 본능과 미결된 결심

〈헤어질 결심〉(박찬욱, 2022)




※영화 속 상징 등에 관한 해설은 없습니다.





완결의 본능과 미결된 결심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덜컹거리며 달리는 버스 속에서 나는, 어디쯤에선가, 길가에 세워진 하얀 팻말을 보았다. 거기에는 선명한 검은 글씨로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라고 씌어 있었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무진기행」)


〈원초적 본능〉(폴 버호벤, 1992)

샤론 스톤은 다리를 꼰다. 탕웨이는 치마만 살짝 들춘다. 히치콕류 팜므파탈 스릴러의 계보를 잇는 〈원초적 본능〉과 〈헤어질 결심〉의 결정적 차이는 여기에 있다. 악마적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작가 캐서린(샤론 스톤 扮)은 속옷을 입지 않고 짧은 원피스를 입는다. 그녀가 남자 형사들 앞에서 다리를 꼴 때 시선의 주체는 객체에 종속된다. 주객의 전도. 형사들은 피의자의 다리 사이를 유심히 들여다보지만 비밀은 드러나지 않고 사건은 오리무중에 빠진다. 나중에 캐서린은 감히 진실을 캐고자 하는 형사 닉에게 말한다: “당신은 내가 원하는 만큼만 알 수 있어요.”(“You won’t learn anything I don’t want you to know.”)


송서래는 귀여운 여자다. 그녀는 나름 영리하지만(“공자님 이르시길,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인자한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나는 인자하지 않습니다.”) 캐서린만큼 능수능란하지 못하다. 진실을 영원히 유예해 버리는 캐서린과 달리 서래의 미스터리는 형사를 속여넘기기 직전에 들통난다. 서사는 완결된다. 이해엔 빈틈이 없다.


〈원초적 본능〉과 〈헤어질 결심〉을 나란히 놓는 것은 그러니 적당하지 않다. 애당초 박찬욱의 관심은 서사—또는 진실—의 불확정성에서 비껴 서 있다. 그리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는바, 〈헤어질 결심〉의 완결된 서사를 경유하여 박찬욱이 다다르고자 하는 바다에는 ‘완결되지 못한 사랑이 더 애틋하다’는 그의 진실이 산처럼 우뚝 서 있다. 우리는 왜 황순원의 「소나기」를 여태 기억하는가? 소년과 소녀의 사랑이 이뤄지기 전에 소녀가 죽었기 때문이다. 카프카의 장편소설은 어째서 아직도 읽히는가? 그가 소설의 끝을 맺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때 미스터리는 단지 매혹을 위한 술수로, 즉 기능적으로, 다시 말해 민낯을 가리기 위한 화장도구로써 요구된다. 뚜렷하게 대비되는 일련의 메타포들을 갈라 놓는 안개는 관객들로 하여금 의문을 품게 만들지만, 이항(二項) 사이를 착실하게 오가는 두 주인공 덕에 의문은 금방 해소되고 산은 꼿꼿이 서게 된다. 서래와 해준은 계속해서 미끄러지는 듯하지만, 미끄럼틀의 끝에는 예정된 죽음이 먹이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죽음은 서래를 삼킨다. 해준은 파묻힌 서래의 무덤 위를 방황할 것이다.


그리고 관객은 집에 간다. 그는 그날 밤 〈헤어질 결심〉의 매혹적인 장면과 미결된 남녀관계에 대해 떠올릴 것이고, 몇 가지 메타포들을 머릿속으로 이어붙여 보다가 늦게 잠에 들 것이다.


며칠 뒤 그는 잊어버린다. 해준은 서래의 무덤 위에 묻힌다.





〈400번의 구타〉(프랑수와 트뤼포, 1959)

미결의 미학과 완결된 서사의 대응. 〈헤어질 결심〉의 이러한 아이러니에서 거꾸로 트뤼포를 떠올리는 것은 이상한 일일까. 〈400번의 구타〉의 마지막 장면. 앙트완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표정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면 프레임은 그대로 정지한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서사랄 것도 없는 서사를 표류한 끝에 트뤼포가 다다른 바다에는 망망한 대해와 새로운 파도—뉴웨이브—가 막막한 소년을 기다리고 있다. 소년은 영영 그곳에 갇힌다. 그러나 프레임의 완결은 영화의 완결을 뜻하지 않는다. 관객은 앙트완과 같이 그곳에 갇힌다. 영화는 끝나지 않고, 스크린 바깥으로 확장된다.






서래는 어째서 해준에게 젖어드는가. 해준이 “현대인 치고” 품위가 있기 때문이다.


서래에게 ‘현대인’이란 품위 없음의 동의어다. 감독의 관점이 드러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박찬욱은 굉장히 꽉 짜인 연출과 고전적 형식미를 추구하는 작가다. 그것이 박찬욱에게는 ‘품위’다. 박찬욱의 미학은 홍상수와 비교할 때 더욱 두드러진다. 두 사람의 영화는 언뜻 봐도 판이하다. 대사, 배우의 어투와 제스처에서부터 촬영 방식에 이르기까지 홍상수의 영화는 극히 사실적이고, 그래서 품위가 없다. 홍상수는 한국에서 가장 현대적인 감독이다. 홍상수에게 이미지는 이미지일 뿐이다. 이미지는 언제든 다른 이미지와 교환 가능하다. 그러나 박찬욱에게 이미지는 강렬한 매혹을 선사하는 것이며, 개별 이미지는 그의 일관되고 고전적인 미학적 취향과 연결된다. (그러나 〈박쥐〉나 〈아가씨〉 같은 영화에서 특히 강조되던 그의 탐미적 취향은 〈헤어질 결심〉에 이르러서는 다소 옅어진다. 어쩌면 “헤어질 결심”은 취향과의 결별을 암시하는 제목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해준과 서래가 ‘사진’이 ‘말씀’보다 좋다고 말할 때, 그것을 이미지와 언어의 대립으로 단순화시키는 것은 오류다. 이들이 말하는 ‘사진’은 홍상수가 다루는 ‘이미지’와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만일 홍상수와 박찬욱에게 끔찍하지만 보기에 따라 매혹적일 수 있는 살인 현장의 사진을 보여주면 둘은 어떻게 반응할까? 박찬욱은 사진 이면의 사건에 관심을 기울일 테다. 홍상수는? “뭐 어쩌라고?”하면서 코웃음이나 칠 것이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여자와 다정하게 찍은 기도수의 핸드폰 배경화면을 보고, 형사들은 그들이 부녀 관계일 것으로 단정한다.(홍상수라면 아마 그러지 않을 것이다. 연인관계라고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물론 그러한 단정은 금세 박살난다. 〈헤어질 결심〉 전반부의 초점은 이미지(또는 ‘말씀’) 자체를 통한 의미화 작업의 불가능성, 즉 보이는 것과 실재의 어긋남을 반추하는 데에 맞춰져 있다. 이는 물론 박찬욱이 그간 해오던 작업을 되돌아보는 것이기도 하다.


후반부에 제기되는 행간의 문제 또한 ‘현대적’인 것과 관련을 맺는다.[1] 박찬욱은 '말씀’이 아니라 말, ‘사진’이 아니라 이미지가 현대적 예술의 조건임을 인식한다. “사랑한다”는 드라마틱한 고백보다 “붕괴”와 “핸드폰을 바다 멀리 가라앉게 하라”는 말에서 서래는 사랑을 읽는다.[2]


요컨대, 〈헤어질 결심〉은 박찬욱의 고전적인 미학이 현대적인 콘텍스트와 화학 작용을 하고 있다는 신호인지도 모른다.[3]






고전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 품위 있는 것과 품위 없는 것의 구별은 단지 개별 이미지와 대사를 활용하는 방식에 의해 결정되지는 않는다. 아무리 대사와 장면의 행간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 한들, 전체 서사가 한 점에서 완벽하게 정리되어 버린다면 그것은 반쪽짜리일 따름이다.


결국 〈헤어질 결심〉은 고전과 현대의 변증법적 종합에까지 이르지는 못한다. 그 자신의 고전적 미학과 "헤어질 결심” 고전를 고수하고자 하는 회귀본능 혼란스럽게 뒤엉키더니, 마치 해준과 헤어지려던 서래가 해준의 마음속에 어지지 않는 미결사건으로 남기 위해 자살하듯이, "헤어지지 않을 결심"으로 반전되고 만다. 각주에서 언급한 〈복수는 나의 것〉의 장면이 전체 서사와 정합적으로 맞물리듯이, 여기서 제기되는 행간의 문제는 완결된 서사에 복무하는 데에서 그친다.


서래를 바다에 묻고 해변을 헤매는 해준에 이입하여 비애감을 강조하는 〈헤어질 결심〉의 결말은, 멜로드라마적 여운을 남기는 대신 관객이 영화를 사유할 기회를 박탈하는 것은 아닌가. 서래—그리고 해준—의 꼿꼿함과 그것의 원치 않는 결과인 ‘죽음 충동’은, 예술가로서 품위를 추종하는 박찬욱이 지닌 서사를 완결하려는 충동이기도 하다. 똑같이 바닷가에서 맞이하는 〈박쥐〉의 결말이 그러하듯, 이 영화는 영화 이후의 여백을 남겨두지 않는다. 미결된 것이 더 애틋하다”는 〈헤어질 결심〉의 선명한 주제의식과 닫힌 형식은, 그 자체 미학적 모순처럼 보인다.


*


그렇다고 이 영화가 나쁜 영화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잘 만든 영화다. 재미도 있다. 박찬욱 감독의 미학에 벌어진 균열도 꽤 유의미한 생각거리를 던져줄 뿐만 아니라, 뚜렷하게 양분된 메타포들 사이에서 방황하는 두 주인공과도 어느 정도 조응하는 지점이 있지 않나 싶다. 하지만 걸작이 될 것 같지는 않다. 나라면 서래를 죽이지 않고, 그냥 어딘가로 사라지게 만들었을 것 같다. 그게 더 나은 결말이라고 생각한다.





……박찬욱의 최고작은 여전히 〈복수는 나의 것〉이 아닐지.




          

[1]


물론 박찬욱은 〈복수는 나의 것)과 같은 영화에서 아픈 여자의 신음을 교성으로 착각하고 자위하는 청년들을 보여주는 식으로 이미 행간을 문제 삼은 적이 있지만, 이때에는 아이러니를 강조하기 위함이었을 뿐 이미지의 의미화라는 주제를 다루려던 것은 아니었다.




[2]


해당 대목은 홍상수의 〈생활의 발견) 3장을 떠올리게도 한다. 이 장의 제목은 ‘명숙이 경수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다’이지만 영화 속에서 명숙은 그런 고백을 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어색한 거나 깨게 뽀뽀나 할까요”하는 투로 떠보는 식이다.




[3]


직접적인 관련성은 없지만 기존의 진지한 영화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웠던 스마트폰과 문자텍스트 같은 요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도 이러한 변화의 연장선상에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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