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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nui Jul 16. 2020

낭만적 거짓과 영화적 진실, 그리고 낭만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Rushmore / 웨스 앤더슨, 1998)



    1. 웨스 앤더슨의 영화에는 다른 감독들로부터 그를 구분 짓는 뚜렷한 특징이 있다. 그의 영화는 매우 연극적이고 또한 영화적이며, 극중인물들은 전부 현실 논리의 퍽퍽함에서 삐져나와 있다. 나사가 빠진 듯하다고 해도 좋고, 모자라 보인다고 해도 좋다. 현실에선 쉬이 찾아볼 수 없는 그들에게는 관객들이나 주변 인물들이 거부할 수 없을 만큼 특별한 매력이 있다. 비정상적으로 무엇인가에 매여 있는 사람들. 그들은 이제는 낡아버린 낭만에 빠져 사는 로맨티시스트들이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무슈 구스타브와 제로가 그랬고, 〈문라이즈 킹덤〉의 소년 샘이 그랬다. 〈개들의 섬〉의 일본인 꼬마 아타리도 빼면 섭하다.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의 맥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무슈 구스타브와 제로, 〈문라이즈 킹덤〉의 샘과 수지


    맥스의 경우도 그렇다. 친구들과 선생님에게 인정받는 수재이고 싶은 맥스는 공부를 잘하지 못한다. 그 대신 맥스는 별의별 과외활동에 정력적으로 임한다. 언뜻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맥스의 과외활동에 대한 집착은 곧 유치원 교사 로즈메리에 대한 집착으로 전이된다. 일련의 과정들에서 드러나는 맥스의 욕망은 사실 기만적이다. 타인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맥스는 너무나도 포장에 능하다. 이발사인 아버지는 어느덧 뇌신경의학자가 되어 있고, 낙제생 맥스는 하버드를 노리는 수재가 되어 있다. 맥스가 공부를 잘하고 싶어 하거나 러시모어 고교의 온갖 활동에 열과 성을 쏟는 이유는 결국 인정받기 위함인 셈이다. 로즈메리에 대한 맥스의 풋사랑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아이가 장난감을 가지고 싶듯이 맥스는 그저 로즈메리가 가지고 싶다. 이는 사랑이라기보다는 유아적 퇴행에 가깝다. 고정된 대상—아름답고 지적인 연상녀—에 대한 고착 —즉 맥스의 첫사랑은 페티시즘이다.


    한편, 맥스가 다니는 사립고교 러시모어의 이사장을 할 정도로 부자이면서도 마음 붙일 곳 하나 없는 허먼 블룸은 보통 아이들과 다른 맥스에게 호감을 느끼고 친구가 되지만, 맥스의 연애사업을 돕다가 도리어 로즈메리와 내연관계가 된다. 허먼 또한 자신이 로즈메리를 사랑한다고 굳게 믿지만, 처음부터 그의 욕망은 맥스의 욕망으로부터 온 것임을 영화는 도식적으로 보여준다. 이들의 대상이 되는 로즈메리도 실은 이들과 별다를 바 없다. 그녀는 벌써 한참 전에 죽은 남편의 기억에 매여 살고 있다. 맥스에게 간혹 보여주는 그녀의 친절함은 맥스가 자신의 전 남편을 조금 닮았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이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무엇인가에 비정상적으로 묶여 있는 사람들이다.






    2. 르네 지라르는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에서 욕망이 자발적이라는 믿음의 허구성을 밝힌 바 있다. 라깡의 말마따나 우리는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소설은 이러한 삶의 껍데기를 까발린다. 소설이 현실보다 진실하다. 우리가 문학을 읽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이는 또한 영화를 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라르는 전자를 낭만적 거짓으로, 후자를 소설적 진실로 명명한다. 보통의 생활에서 이러한 ‘낭만적 거짓’을 눈치채기는 쉽지 않다. 삶을 영위하는 데에는 항상 우리가 스스로 무언가를 욕망한다는 자기기만이 수반되므로. 심지어 때로는 기만이 삶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라 만차의 돈 키호테와 러시모어의 맥스는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다.


    그들의 엉뚱하고 귀여운 행동들은 종종 민폐가 되기도 한다. 사랑이란 명분 하에 맥스가 행하는 복수나 구애는 죄다 뒤틀린 꼴로 나타난다. 포기할 것 같지 않던 맥스는 결국 감정이 폭발한 로즈메리에게 충격을 받은 이후 모든 전의를 상실하고 만다. 상상 속에서 자신이 만들어 낸 로즈메리와 진짜 로즈메리가 다르다는 것을 맥스는 모르고 있었다.


    모종의 이유로 멀어졌던 친구 더크가 그를 찾아오고, 둘은 함께 연을 날린다. 맥스는 연날리기 동아리를 만들겠다고 다짐한다. 실에 묶인 채로만 날 수 있는 연은, 묶여 있음을 전혀 개의치 않음으로써 자유로워진다. 맥스는 러시모어와 로즈메리를, 또 사랑과 우정을 있는 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 낭만적 거짓은 산산이 부서지고 진실의 파편들이 그곳에 남는다. 예술이 드러내는 진실이라는 것은 종종 알고 싶지 않은 것일 때도 있지만, 웨스 앤더슨에게 있어서 이러한 진실은 결코 참혹할 필요는 없다. 그는 자신의 작품 안에서 숨 쉬는 인물들에게도, 그들을 지켜보는 관객들에게도, 충격보다는 감동을 선사하는 작가다.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더크와 연을 날리는 맥스


    과장과 익살을 마다하지 않는 웨스 앤더슨 영화의 ‘나사 빠진’ 인물들 —인물이라기보다 캐릭터에 가까운— 은, 우리와 그렇게 멀리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웨스 앤더슨은 치밀하게 주조된 극과 캐릭터들을 십분 활용하여 관객들에게 소설적, 아니 영화적 진실을 전달하는 데에 도가 튼 사람이다. 세상이 무너지더라도 순수와 낭만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의 근작들에서도 일관되는 이 테마는 이미 이 시기에 전부 완성되어 있었던 것 같다.






    3. 그의 두 번째 연출작인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의 원제는 극중 맥스가 사랑하는 모교의 이름인 ‘러시모어’이다. 몇몇 사람들은 원제와 완전히 다른 번안한 제목이 별로라고 느끼는 듯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썩 귀여운 네이밍이다. 맥스군은 사랑에 빠졌고, 우리는 영화와, 그리고 이런 영화를 써 내는 감독과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다. 물론 연출 초기작인 만큼 군데군데 느슨하고 성긴 부분들도 보인다. 앤더슨 영화를 상징하는 애니메이션스러운 감성과 화려한 색감, 강박적인 미장센들과 같은 시각적인 특징들도 아직까지는 미세한 전조만 드러낼 뿐이다. 그러나,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는 그 느슨함과 촌스러운 제목마저, 아니 오히려 그 촌스러움과 어설픔 덕분에 더욱더 사랑스러워지는 영화다.


    근대소설의 시작을 알린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는 중세의 구습들을 풍자한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렇게 단순하진 않다. 돈 키호테는 자기만의 신념을 추구하다 고꾸라지고 마는 아름답지만 안타까운 인물이다.


 웨스 앤더슨은, 터무니없는 공상에 빠져 있는 돈 키호테들을 비웃는 대신에 그들에게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낸다. 세르반테스가 기사도 소설을 넘어 근대적 픽션의 시대를 열었다면 웨스 앤더슨은 근대적 픽션의 스크린에 지나간 시대의 로망스를 다시금 소환한다. 21세기식으로 솜씨 좋게 각색한 채로. 이제는 낭만의 과잉이 아니라 낭만의 부족이 문제가 되어 버린 현대사회의 한복판에서, 웨스 앤더슨은 가볍지만 가볍지 않게 줄곧 묵직한 물음을 던진다.




    맥스와 로즈메리의 첫 만남 장면. 학교에서 더 이상 “죽은 언어인 라틴어”를 가르치지 않게 되었다는 맥스의 말에 로즈메리는 혼잣말을 한다. 어쩌면 웨스 앤더슨의 모든 영화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대사가 귓전을 스친다.



    “Nihilo sanctum estne?” — (신성한 것은 없을까?)


   로즈메리의 물음에 맥스는 이렇게 답한다.

"영광도 언젠간 사라져요. 제 이름은 맥스 피셔예요."


그러나  아마도,  

낭만은 영원할 것이다.


웨스 앤더슨 영화가 사라지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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