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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nui Jul 16. 2020

사랑과 욕망의 윤리

〈정사〉(L'Avventura /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1960)


“나도 모르겠는데요. 누가 그 여자가 자살했다고 그러던데 그런 것 같지는 않아요”




    감독인 안토니오니가 영화의 주요 사건인 안나의 실종에 대하여 한 얘기이다. 감독도 어찌 되었는지 잘 모르겠단다.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이야기가 있는 영화를 찾고 그 이야기가 복잡할수록 추켜세우는 요즈음의 관객들에게 〈정사〉는 그만큼 불친절한 영화다. 분명 시간에 따라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음에도 인물들의 관계는 생략되어 있고 설명도 거의 없어서 관객들이 이야기의 흐름을 잡기가 벅차다. 그러나 불필요한 서술을 최소화하고 그 대신 유려한 촬영과 느린 호흡의 이미지들을 통해 인물을 담아내는 이 불친절한 방식은 —그것이 가장 ‘영화’적인 방식이라는 것은 일단 미뤄두고— 감독이 시종일관 포커스를 맞추고 있는 '사랑', '욕망', '외로움'이라는 테마에 다가서기에 가장 적절한 방식인지도 모른다. 욕망이나 사랑이라는 것은 언제나 사후적으로, 그 사건이 일어나는 순간과 관계없이 나중에야 규명되는 것일 테니. 어디 설명할 수 있는 욕망이 있느냔 말이다. 설명이 된다면 그것은 욕망도, 사랑도 아니다. 


    이러저러해서 나는 저 사람을 사랑한다, 이러저러해서 저 사람을 욕망한다고 설명하는 것은 그 욕망과 사랑이 이미 지나간 뒤에야 가능한 자기기만이다. 욕망과 사랑이라는 것은 말이 되는 이유 없이 가장 깊은 내면에서부터 움트는 것이며 거기에는 어떠한 당위도 없다. 이에 그것들을 감각하는 주체는 한없이 고독해지며, 그 고독을 잊기 위해 더 광적으로 욕망을 탐식하고 사랑을 찾아 헤맨다. (주의 깊게 영화를 본 관객들이라면 이미 한 달 만에 만난 산드로와 갑작스레 정사를 벌이는 안나의 공허한 표정을 기억할 것이다.)


정사를 나누는 와중에도 공허한 안나의 표정


    그렇지만 누구나 알다시피 욕망의 충족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과 매한가지이고 사랑의 충만감은 앗 하는 사이에 달아나 버리기 일쑤다. 요즘 말로 관계 뒤에 찾아오는 '현자타임'이라는 것은 사랑이나 욕망의 유통기한이 다했을 때 불가피하게 주체를 덮치는 소외와 그 소외가 가능케 하는 냉정한 세계 인식의 동의어가 아닌가? 


    그 유명한 〈중경삼림〉 1부의 막바지에서, 금성무는 “사랑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면 나의 사랑은 만 년으로 하고 싶다”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아쉽게도 이미 에로스적 사랑은 길어야 3년에 그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실 구태여 금성무의 대사를 끌어와서 냉소하지 않더라도 욕망, 심지어는 사랑마저도 허무하고 허무하고 또 허무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 아닌가?

    이를테면 주체는 언제나 고독할 따름이다.


    결국 욕망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주체가,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두 가지밖에 없다. 사랑과 욕망의 전면적인 포기, 혹은 이 영화의 원제와 같은 모험으로의 투신. 이 모험은 다시 둘로 나뉜다. 욕망—L’Avventura라는 단어가 이탈리아어로 원나잇스탠드를 뜻한다는 것 또한 잊지 말자—에 충실할 것인가, 진정한 사랑에 헌신할 것인가? 우리가 살아있는 한, 어떤 방식으로든 타자와 엮이게 되는 한, 이러한 선택은 매 순간 우리를 다시 찾아오며, 매 순간 새로이 나타난다. 


    이때 주의할 것. 우리는 ‘선택’의 의미를 조금 더 깊게 고찰해야 한다. 상술하였듯, 욕망과 사랑의 제 문제라는 것은 결코 언어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객관식 문제를 풀 듯이, ①A를 사랑하기로 한다. ②A를 사랑하지 않기로 한다. ③B를 욕망한다. ④B를 욕망하지 않기로… 하는 식으로 구성된 또렷한 선택지 중에 가장 합리적인 하나의 정답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광기와 같은’ 공기에 휩쓸려 그것을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예컨대 이 영화의 클라우디아가 겪는 실종된 친구의 애인이 나에게 구애하는 상황을 떠올려 보라.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혹자는 우정이 먼저냐 사랑이 먼저냐 하는 식의 이지선다를 강요할지도 모르나, 우리가 삶 속에서 마주치는 물음표들은 그보다 훨씬 더 포괄적이며, 우리가 내려야 하는 선택은 훨씬 더 비논리적이다. 우리는 그저 세계를 가로지르는 독립적인 사건들 속에 선 주체로서, 정해진 바 없는 ‘삶’이라는 빈 종이를 바로 그 ‘삶’이라는 펜으로 다시금 채워 나갈 뿐이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했듯이, 우리는 이 ‘고독한 결단’을 통해 실존하는 주체로서 ‘절대적 책임’을 감수한다. 누구를 어떻게 사랑하고 사랑하지 않을 것인가, 이 물음에 자기만의 답을 써 내려가는 것. 이것이 주체가 선택한다는 것의 진짜 의미이다. 어쩌면 결혼 같은 관습이 우리에게 부과하는 종류의 법적인 책임보다 몇 배는 더 본질적인.


유혹 당하는 클라우디아


    그리고 이 욕망과 사랑의 격랑에 휩쓸리는 와중에 주체가 형성하는 태도. 우리는 그것을 각자의 윤리라고 부른다. 무엇을 욕망해도 되는지, 무엇을 욕망하면 안 되는지, 무엇을 욕망하지 않을 것인지, 무엇을 욕망할 것인지, 누구를 어떻게 얼마큼 사랑할 것인지, 그리고 이 모든 물음에 옳고 그름이 있는지, 있다면 그 기준은 무엇인지. 이 ‘욕망과 사랑의 윤리’ 이외에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달리 무엇이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가 이 영화에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무엇일까. 답은 이미 나왔다. 사랑과 욕망의 선택이 주어졌을 때 각 인물들은 무엇을 선택하는가 혹은 휩쓸리는가? 어째서 그들은 그런 결단을 내리는가 혹은 내릴 수밖에 없는가? 남녀 주인공인 산드로의 경우와 클라우디아의 경우, 극의 초반부를 끌고 가는 안나의 경우, 그 외에 연하남과 불륜을 저지르는 줄리아의 경우에 이르기까지 인물들 각자가 처한 상황과 각자가 떠안아야 할 결단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안토니오니 감독은 영화의 초반 20여 분을 연인인 산드로와의 관계에서 내적 혼란에 빠지는 안나의 심리 상태를 묘사하는 데에 할애한다. 하지만 그 뒤로 안나는 뜬금없이 극에서 퇴장하고, 남은 2시간 동안 안나는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일단 등장한 인물은 제 역할을 하여야 한다, 서사에서 쓸데없이 등장하는 인물은 없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서사 창작 논리에 반하는 연출이다. 그렇지만 안나는 쓸데없지도 않고, 퇴장하지도 않았다. 실종된 안나는 망령처럼 계속 스크린을 떠도는데, 산드로의 새로운 애인이 된 클라우디아에게 있어서 —더불어 관객들에게 있어서도— 안나의 존재(부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중요한 메타포인 까닭이다. 


    그럼 안나는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 우선 안나는 ‘사랑과 욕망의 문제’에 대한 하나의 분명한 태도를 보여준다. 그것의 전면적인 포기이다. 안나는 애인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있지도 않은 상어를 만들어내야 하는 황량한 섬에서 머물기를 원하지 않는다. 감독 스스로도 안나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고 했지만, 실제의 안나는 어쩌면 실수로 발을 헛디뎠을지도 모를 노릇이지만, 몇 가지 단서들이 관객들로 하여금 안나가 살아있으며 또 스스로 도망을 쳤다고 믿도록 만든다. 이른바 정황 증거에 빗대어 봤을 때, 안나는 살아 있을 것이라고 관객들은 유추한다. 이 가능성이 맞는다면 안나는 주체적인 사랑의 포기를 결단한 것이다. 어쩌면 수녀가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설령 자살이라고 해도 얘기는 바뀌지 않는다. 자살 또한 사랑과 욕망을 포기하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가 아닌가?


    반대로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정말로 발을 잘못 디뎌서 실종되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납치되어 팔려 갔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아무 상관없다. 안토니오니에게 이러한 서사의 확정성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는 그저 인물들이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사건들을 던져 놓고, 그 사건들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각각의 인물들에게 어떤 흔적을 남기는지를 필름에 새길 뿐이다. 이때 안나는 클라우디아의 ‘윤리’가 변해가는 과정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결단을 촉구하는 분기점이자 상징으로 기능한다. 클라우디아는 처음엔 안나를 되찾고자 하며 산드로를 미워하지만, 산드로와 이상 기류가 발생하자마자 안나는 클라우디아의 욕망을 억압하는 기제로 전이된다. 그러나 산드로의 끈질긴 구애 끝에 클라우디아는 산드로를 받아들이고, 안나는 이제 클라우디아의 불안을 유발하는 존재로 전락한다. 아름다운 금발을 흩날리는 클라우디아가 안나의 머리색과 같은 가발을 써 보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여 우리는 클라우디아라는 인물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클라우디아의 ‘사랑 윤리’는 이만큼이나 복잡하고 진지한 것이다. 그렇기에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는 사랑을 배신한 남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같이 눈물을 흘려주기도 한다.


안나의 머리색과 같은 가발을 써 보는 클라우디아


    한편 안나가 사라진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산드로에게는 안나가 클라우디아와의 접점을 만드는 수단에 불과한 하찮은 것으로 변질된다. 산드로는 동업자와의 사업을 그만두고 건축 일을 다시 해야겠다고 다짐하지만 그는 그럴 수 없다. 산드로 스스로도 내심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 하여 산드로는 고전 건축물을 스케치하는 젊은 건축가의 스케치북에 실수를 가장한 테러를 저지르기까지 한다. 우리는 산드로의 행동을 통해 그를 읽는다. 그렇기에 마지막 순간 창녀에게 화대를 던져 주는 산드로의 모습은 어색하지 않다. 부적절한 장면을 클라우디아에게 들켰을 때,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뛰쳐나가 눈물을 흘리는 산드로도 어색하지 않다. 다만 산드로에게는 어떠한 ‘사랑 윤리’도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안나를 사랑하지도 않았고, 클라우디아를 사랑하지도 않았다. 아니, 클라우디아와 사랑에 빠지기 며칠 전에도 산드로는 안나를 사랑했을 것이고, 창녀를 욕망하기 몇 시간 전에도 그는 클라우디아를 사랑했을 테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산드로는 주체적 결단이나 절대적 책임이 수반되는 진정한 삶의 윤리에는 단 한 번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사랑이 거의 파탄 나기 직전까지 와서야 이를 깨닫고 눈물을 흘린다. 물론 이 눈물이 그의 윤리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가능성이 될지, 클라우디아의 사랑에 호소하기 위한 악어의 눈물이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어찌 되었건 간에 우리는 섣불리 산드로를 비난할 수도 없다. 산드로에겐 없고 클라우디아에겐 있는 ‘윤리’는 결국 아무도 구원하지는 못한다. 사랑의 유통기한은, 만 년은커녕 실제의 통조림보다도 짧은 것이 다반사이니.


    허무로부터의 탈출, 그것이 자살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든 욕망의 자발적인 거세, 사랑하기를 그만두기라는 형태로 나타나든, 나는 그것이 삶을 긍정하려는 하나의 절대적인 결단이라는 점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가 사랑하기를 영원히 포기할 수 없는 한, 우리가 살아가기로 하고 욕망하기로 하고 사랑하기로 하는 ‘모험’을 하고자 한 이상, 각자에겐 각자의 윤리가 필요하다. 그것은 법이나 기존 상식의 테두리 안에서 머무는 것 따위에 그쳐서는 안 된다. 당연한 것들을 깨부수고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전적으로 비합리적이고 광기로 물든 것일지라도, 적어도 자기 몫의 윤리 한 줌 없는 삶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안토니오니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진중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사랑과 욕망의 무의미한 반복 속에서, 당신은 어떠한 결단을 내릴 것인가?


〈정사〉의 마지막 쇼트


#촬영, 구도와 카메라 워킹이 너무 훌륭하다. 오프닝 씬에서 걸어 나오는 안나를 잡은 구도와 그녀의 걸음에 따라 매끈하게 물러서는 카메라의 움직임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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