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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nui Jul 16. 2020

홍상수 영화: 사적인 발견의 계기로서의 보편적 경험

〈생활의 발견〉(홍상수, 2002)에 대한 단상

 



    대체 무얼 발견했다는 것일까. 실마리를 얻기 위해 영화의 영어 제목을 살펴보자. On the Occasion Of Remembering The Turning Gate — ‘회전문을 기억하는 때/경우’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다. 홍상수 영화에서 영화의 원제와 영어 제목이 영 딴판인 경우는 쉬이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어찌 되었건 같은 영화의 서로 다른 두 제목이 최소한의 연결고리로라도 묶여 있을 것이라는 합리적인 추론을 받아들인다면, 그 때/경우는 곧 어떠한 발견이 이루어지는 구체적인 시점 혹은 발견의 대상일 거라는 그럴듯한 결론에 어렵지 않게 도달할 수 있다.


    사실 우리는 영화를 보는 도중에 이미 이런 순간들과 숱하게 마주쳤다. 발견의 순간들. 회전문을 떠올리게 되는 순간 말이다. 영화는 초반부에 성우의 입을 빌려 청평사 회전문에 얽힌 설화를 관객들에게 넌지시 던져 놓는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선영의 집 대문 앞까지 갔다가 돌아 나오는 경수를 볼 때,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회전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경수는 결국 선영의 집 대문에서 돌아 나온다



    종소리만 듣고도 침을 흘리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우리의 연상 과정은 조건반사적이다. 구태여 애를 쓰지 않아도 떠오르는 어떤 기억의 잔상들로 인해 경수는 어느새 회전문 앞에 서게 된다. 이때 회전문은 그저 문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기호가 된다. 기호는 상징적이다. 경수는 사랑의 실패를 실감하며 회전문 설화—설화는 가장 상징적인 이야기 구조다—를 떠올린다. 조금 전에는 웃어넘겼지만, 지금 경수의 표정은 짐짓 무거워 보인다.






①한 청년이 공주를 사랑한다.

②공주의 아버지가 청년을 죽인다.

③청년은 뱀으로 환생해서 공주를 감는다.

④공주가 뱀에게 밥을 가져올 것을 약속하고 청평사로 들어간다.

⑤공주는 돌아오지 않고 뱀은 문을 돌아 나온다.


    영화가 주로 다루는 사랑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되는 것은 세 번째 시퀀스 이후이다. 〈생활의 발견〉은 총 일곱 개의 시퀀스로 구성되는데, 홍상수는 각 시퀀스의 시작점마다 시퀀스의 전반적인 내용을 요약하는 시놉시스를 삽입하여 이어질 장의 내용을 미리 언질 한다. 경수가 처한 상황을 관객들에게 제시하기 위한 처음 두 시퀀스에 이어지는 세 번째 시퀀스의 제목은 [3 명숙이 경수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다]이다. 그러나 이 장에서 명숙은 경수에게 사랑 고백을 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어색한 거나 깨게 뽀뽀나 할까요”라든지 “우리 이제부터 거짓말하지 말아요”하는 식으로 에둘러 추파를 던질 뿐이다. 드라마틱한 고백은 없다. 미묘한 눈치싸움만 있다. 결국 홍상수의 영화에는 달아오른 욕구와 외로움을 더듬다 흩어지는 공허한 말들만 남는다.



명숙과 선영이 경수에게 남긴 쪽지에서 반복되는 표현들



    기존의 관객들이 픽션에서 기대하는 것은 판타지의 충족이다. 각자가 꿈꾸는 판타지의 모습들은 대개 비슷하다. 파리의 연인의 그 유명한 명대사, [이 안에 너 있다]와 〈생활의 발견〉의 두 여자주인공의 편지에서 반복되는 [내 안의 그대, 그대 안의 나]라는 문구는 놀랍게도 닮아 있다. 심지어 대상의 외형이나 매력에도 실은 어느 정도 객관적인 기준이 있다. 판타지는 그 기준을 생산하기도 하고, 그 기준에 따라 생산되기도 한다. 범람하는 판타지의 시대에는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매력이 있다’는 말보다는 차라리 ‘짚신도 제 짝이 있다’는 속담이 더 진실하다. 사회는 판타지를 생산하고 사람들은 판타지를 소비한다. 일반적인 로맨스 픽션들이 하는 작업은 이러한 판타지의 재가공과 다름이 없다. 물론 판타지는 언제나 망상으로 그친다.


    홍상수의 영화는 이런 기존의 픽션들과 사뭇 다르다. 기존의 영화적 경험을 기대한다면 홍상수의 영화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극중인물들은 결핍을 메꾸지 못한다. 사랑은 아무렇게나 실패한다. 언뜻 익숙하게 보이던 한 줌의 리얼리티마저 어느 순간에 낯설어진다. 조악한 영화의 구조에 붙들린 날 것 그대로의 사실적인 대화들은 친숙하다가도 이질적이다. 인물과 상황, 구도와 시점을 조금씩 비틀면서 홍상수는 관객들을 홀린다. 홍상수의 영화를 극사실주의로도 볼 수 있고, 초현실주의로도 볼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홍상수 영화의 묘는 여기에 있다. (때문에 필자는 “홍상수 영화는 다 비슷하므로 아무거나 하나만 보면 그 이후는 시간 낭비”라는 주장은 대개 홍상수에 대한 오독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사람 되는 거 힘들어. 그래도 우리 괴물은 되지 말자.”는 대사가 여러 차례 반복될 때, 명숙과 선영의 편지에서 같은 멘트의 야릇한 변주를 보았을 때, 회전문 설화의 모티프가 서로 다른 인물들 간의 관계에서 다르게 나타날 때, 여섯 번째 시퀀스의 제목처럼 경수가 이미 만난 적이 있는 선영을 ‘뒤늦게’ 알아볼 때, 이미지로 현상된 각각의 특수한 상황들은 무어라 특정할 수 없는 미묘한 분위기를 띠게 된다. 이는 그 미묘한 분위기를 감지하지 못하고 같은 행동을 미련하게 반복하는 극중인물들—선영의 남편에게 기만과 비겁함을 지적하고자 하는 경수—보다 영화 바깥에 있는 관객들의 눈에 더 또렷이 포착된다. 자기 바둑판에서는 안 보이는 수들이 남에게 훈수를 둘 때는 잘 보이는 법이 아니던가. 즉 〈생활의 발견〉은 극중인물이 생활 안에서 무언가를 발견하는 순간보다도, 우리 모두를 빼닮은 어떤 인물의 생활에 관객 자신의 상像이 겹쳐지는 순간, 바로 그런 순간의 발견을 말하는 것일 테다.





    물론 이 순간들은 철저히 개인적이다. 그리고 홍상수는 이 개인적이고 낯부끄러운 순간을 결코 감춰주지 않는다. 홍상수는 자신의 영화가 숨어있던 각자의 맨 얼굴을 기어코 대면하게 하는 보편적인 계기가 되어야 함을 믿는다. 심지어 그 민낯이 뱀과 같은 것일지라도. 홍상수 영화의 원형이라고 불리는 〈생활의 발견〉에서 홍상수가 발견해 낸 것은 누구에게나 감춰져 있는 그러한 ‘날 것 그대로의 순간들’이 아닐까. 그래서 홍상수의 영화를 볼 때에는 항상 다짐해야 한다. 들키고 싶지 않은 것을 기어이 들켜주겠다는 다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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