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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nui Jul 16. 2020

통제 욕구의 좌절: 근원적 불안에 대하여

〈유전〉(The Heredity / 아리 애스터, 2018)




〈링〉의 저주는 비디오테이프라는 매체를 통해 퍼져 나간다


기존의 호러영화들은 주인공에의 몰입과 영화 속 세계와의 동일시를 기반으로 공포를 불러 일으킨다. 나는 개인적으로 여태껏 본 영화 중에 〈주온〉을 제일 무서워하는데, 〈주온〉이 관객에게 공포를 주는 방식은 간단히 말해서 ‘침투’다. 관객은 진짜 저주라도 씐 것처럼 으스스한 영화를 보면서 극에 몰입하고, 극장에서 빠져나오지만 이미 이때에는 영화 속의 저주가 현실의 어딘가로 침투하여 퍼져 나간 뒤이다. 요컨대 기존의 잘 만든 호러영화는 현실과 포개지는, 그리하여 영화의 저주와 현실의 경계선을 흐리게 만드는 영화였다.


한때 공포영화의 대명사로 통용되었던 〈링〉의 센세이셔널함 역시 여기에 있다. 비디오 세대를 관통하는 저주받은 비디오의 유통. 현재 시점에서 〈링〉이 별로 무섭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단순히 예전 영화이기 때문이 아니라, 비디오나 CD 같은 미디어가 종적을 감추면서 현실과의 연결고리가 느슨해졌기 때문이다. 사다코는 조만간 폐기될 비디오테이프 안에서 영원히 잠들 운명인 것이다.





영화의 시작. 창밖의 오두막에서부터 천천히 패닝한 카메라는 방 안의 미니어처 집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그러나 〈유전〉의 공포는 이와는 맥락을 달리 한다. 아리 애스터는 관객에게 동일시를 요구하지 않는다. 영화는 여전히 현실세계와 맞닿아 있지만 깔끔하게 포개지는 것은 한사코 거부한다. 아마도 감독은 오히려 관객이 조금 거리를 두고 현실과 영화의 불일치를 맛봤으면 하는 것 같다. 동일시에서 연원하는 말초적이고 감각적인 공포를 넘어, 아리 애스터는 관객이 영화와의 이상야릇한 거리감에서, 그 사이의 어두운 틈새에서 불안해하며 오돌오돌 떨기를 원한다.


〈유전〉은 매우 직접적으로, 각본과 몽타주, 미쟝센과 촬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법들을 모두 동원해서 스스로의 ‘작위성’을 전시한다. 가령 영화의 첫 쇼트를 떠올려 보자. 창밖의 오두막을 바라보던 카메라가 천천히 패닝하더니 미니어처 집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실제 배우가 등장하면서 미니어처는 곧바로 실물 크기의 세트장—영화 속의 실제 세계로 전환된다.  첫 쇼트에서부터 암시된 이 영화 속 세계의 자의적 크기 변환은, 영화를 본다는 것이 사실은 감독의 손아귀 안에서 놀아나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새삼 환기하는 것만 같다.


극이 클라이막스에 들어서면서부터 이는 노골적으로 드러나는데, 밤과 낮에 같은 구도에서 찍은 화면을 매우 빠르게 이어 붙이면서 하룻밤을 찰나에 압축시키는가 하면, 애니가 조안의 집을 찾아갈 때에는 카메라의 상하를 뒤집었다가 다시 원위치하면서 과시적으로 카메라의 움직임을 드러내기도 한다. 








같은 지점에서 다른 시간에 찍은 화면을 이어 붙이면서, 낮부터 밤까지의 시간을 눈 깜짝할 새로 압축시킨다. 애니가 공간을 축소시키듯이 아리 애스터는 시간까지 축소시켜 버리는 것이다



상술한 연출들의 결과물로서 관객들이 느끼게 되는 이질감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 〈유전〉을 읽는 적절한 방법이 될 것이다. 먼저 ‘통제’라는 테마를 통하여 이에 접근해 보자. 〈유전〉은 내내 무언가를 통제하고자 하는 욕구와 그 욕구의 좌절에 잇따르는 절망을 그리고 있다. 자, 애니의 직업을 떠올려 보라. 그녀는 손에 잡히지 않는 것들을 손에 넣을 수 있는 크기로 축소하는 사람이다. 손에 쥘 수 있는 것. 즉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애니에게는 소중하다. 물론 현실은 녹록치 않은 법. 애니는 세상 당연한 자식이나 부모와의 애착관계조차 제대로 형성하고 관리하지 못한다. 그 계기는 이번에도 통제의 실패에 있다. 심지어 애니는 잠결에 자식들에게 시너를 들이붓고 성냥불을 켜는 몽유병 환자가 아니던가.



영화 중반부의 한 장면. '통제'라는 주제로 영화를 읽을 때 이 장면의 대사들은 의미심장하다.



이제 〈유전〉이라는 제목을 다시 생각해 보자. 유전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유의어이다. 영화에서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은 모두 애니의 핏줄과 관련되어 있다. 엘렌의 부고로 막을 올릴 때조차 영화의 결말이 정해져 있듯이, 애니의 운명은 벌써 탄생과 함께 결정된 것이리라. 〈유전〉은 모든 종류의 통제욕구를 근원적 회의에 부치는 영화인 것이다.


교수가 소포클레스의 비극과 헤라클레스를 논하는 장면. 헤라클레스에게 선택지가 있었더라면 덜 비극적이었겠느냐고 교수는 묻는다. 피터 대신 답변한 어느 여학생의 답변에 이 영화의, 그리고 모든 비극과 문학의 정수가 담겨 있다. 



“모두 필연적인 일이라면 인물들은 희망이 없잖아요.”


그보다 조금 앞선 교수의 질문. 교수는 학생들에게 헤라클레스의 결점을 물었고, 피터 앞자리의 여학생은 교만이라고 답한다. 교만. 교만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죄악이다. 교만은 어디에서 오는가? 인간주체가 무엇이든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에서 비롯한다. 신보다 위대한 인간,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는 초월적 존재인 헤라클레스는 그러나 비극적 죽음은 피하지 못한다.


뱀처럼 유유히 미끄러지는 아리 애스터의 카메라가 마침내 닿는 곳에는 바로 이러한 ‘통제의 유혹과 실패’가 도사리고 있다. 영화는 악마 중 하나인 파이몬 대왕의 강림의식을 성공시키면서 끝을 맺는다. 희생이 큰 상으로 보답받을 것이라는 엘렌의 유서를 우리는 기억할 수 있다. 신화에 따르면 파이몬 대왕은 솔로몬의 72악마 중 서열 9위의 악마로, 인간에게 모든 종류의 지식을 알려준다고 한다. 지식이란 통제의 수단이고 이는 곧 권력이라는 것을 푸코는 이미 논증한 바 있다. 파이몬 대왕에 대한 이들의 숭배는 좌초된 통제욕구의 또 다른 탈출구이다.


결국 〈유전〉이란 영화는 인위적으로 완벽히 설계된 건축물을 통하여 역설적으로 관객들을 통제 불가능한 지점까지 데려다 놓는, 그럼으로써 말초적인 공포보다는 근원적인 불안을 건드리는, 기묘한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주온〉과 같은 호러가 더 무섭다는 점. 아리 애스터든 요즘 뜨는 새로운 호러영화 감독이든, 누가 〈주온〉과는 다른 방식으로 〈주온〉보다 무서운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얼른 증명해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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