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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nui Feb 01. 2021

맛있는 정크푸드

〈녹터널 애니멀스〉(톰 포드, 2016)

페이드-인. 뭔가 출렁이는 것이 보임. 출렁이는 형태는 이내 초고도비만 여성의 나체인 것으로 판명됨. 영상은 슬로 모션으로 흐르며 비계 낀 여성들의 맨몸과 괴이한 표정만이 몇 분간 스크린에 떠오름. 




역겨울 수도 있어 최대한 크기를 줄였다.



먼저, 솔직해지기로 하자. 나는 초반부의 장면에서 메스꺼움과 구토감을 느꼈다. 이동진 평론가는 이 인상적인 오프닝 시퀀스에서 사회의 이상적인 기준에서 벗어난 여성들의 환희와 역동, 그리고 사회의 이상적인 기준을 충족하였음에도 불행하기만 한 수잔의 내적 균열을 읽었다지만, 나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소리는 죽고, 속도도 느리게 흐르는 영상 속에서 살덩어리들의 출렁임은 생동하는 것이 아니라 되레 역겨움만을 유발한다. 

  뭐, 내가 여성의 몸매에 대한 선입견에 절여진 한남이라 그렇다는 사람들도 있을 테지만, 그러한 비난과는 별개로 나는 톰 포드 감독이 삶의 환희와 그것을 잃어버린 수잔을 대비시키고자 이런 충격적인 장면을 쓴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보다도 톰 포드 감독의 목적은 충격 그 자체에 있는 듯하다. 물론 아무렇게나 추하고 역겨운 것을 보여준다고 해서 영화가 되지는 않는다. 영화는 수잔이라는 인물을 앞세워 그녀의 내면에 자리 잡은 추한 몰골과 비대한 몸뚱어리를 끄집어낸다. 아마도 미적 기준의 파괴니 아방가르드니 하는 태그를 달고 전시되었을 자신의 작품을 수잔은 쓰레기(정크)로 취급하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는 스스로도 갈피를 못 잡고 있다. 그리고 감독은 그녀의 과거와 전남편이 보내온 소설을 교차하며 현실의 경계를 흔들고, 현실주의자를 자처하던 그녀로 하여금 자신의 추한 민낯을 마주하도록 한다.

  기실 〈녹터널 애니멀스〉는 첫 장면에서 시작하고 첫 장면에서 끝나는 영화라고 해도 무방하다.




복수하면 떠오르는 영화 몇 편


〈녹터널 애니멀스〉의 주된 테마는 복수다. 그런데 이 복수는 일반적인 복수극과는 다르다. 잘 만든 영화와 못 만든 영화가 있듯이, 잘 만든 복수극과 못 만든 복수극이 있다고 치자. 비평가들의 기준에 따르면 잘 만든 복수극은 대개 잘 주조된 복수의 동기나 인물들의 관계와 더불어, 복수라는 행위가 인간의 실존에 끼치는 영향력을 간과하지 않는 작품일 테고(〈햄릿〉이라든지…), 못 만든 복수극은 오로지 복수만을 위한 복수, 복수가 야기하는 내적인 고뇌나 외적인 맥락을 덜어내고 말초적인 자극에만 전념하는 ‘정크들’을 이르는 것일 테다. 

  〈녹터널 애니멀스〉는 둘 중 어디에도 간단하게 포함시킬 수 없다. 따라서 나는 이 영화가 수잔의 전시회와 다를 바 없는 정크인지, 또는 어떠한 진실의 편린을 숨기고 있는 색다른 웰메이드 복수극인지 판단해야 한다는 나름의 의무감으로 이 글을 쓴다.


이 영화의 복수는 두 가지 층위에서 동시에 작동한다. 영화 안의 세계, 그리고 영화 안의 소설의 세계에서. 한 가지 더. 복수자 에드워드-토니는 다른 복수극의 주인공들과 달리 주체할 길 없는 극도의 분노로 이성을 잃는 인물이 아니다. 그는 자신을 파괴한 레이-수잔에게조차 함부로 물리적인 위해를 입히려 들지 않는다. 

  굳이 따지자면 그는 햄릿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러나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광기와 불가해함 속에서 실존적 사투를 벌이는 인간으로 그려지는 데에 반해 에드워드-토니는 그저 타고나기를 나약하게 태어났고, 태어난 대로 나약하게 자라온 사람으로 그려진다. 톰 포드는 중층적인 복수의 구조와 새로운 유형의 나약한 복수자를 제시하며 이 영화가 일반적인 복수극으로 분류되는 것을 거부한다.

  나약한 복수자. 이 복수자의 복수 방식은 둘로 나뉘지만, 에드워드-토니는 결코 분열하지 않는다. 펜대를 쥐거나 총을 움켜쥔 두 명의 복수자는 끝에 가서 하나로 합쳐진다. 그냥 총도, 그냥 펜도 아닌, 총 같은 펜을 든 복수자로.




수잔은 오래전 헤어진 전남편 에드워드가 그녀를 위해 집필한 소설을 선물 받는다. 수잔의 반응에서 관객들은 미묘한 불편함을 감지한다. 혹 이 소설은 과거 수잔과 에드워드의 이야기가 담긴 자전적인 작품은 아닐까? 관객들은 충격적인 소설의 내용이 그들 부부에게 정말로 일어났던 일이라고 믿을 뻔하지만, 영화는 점차 그것이 실제로 벌어진 일이 아님을 밝힌다. 그러나 그렇다면 소설을 읽는 수잔은 왜 그렇게 힘들어하는가? 공감능력이 탁월한 사람이라서? 그것도 아니다. 어머니를 닮은 그녀는 ‘지나치게 냉소적인 현실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이다. 그녀가 전남편의 소설을 읽으며 고통받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든 그것이 그녀와 그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에드워드의 소설에서 수잔은 수잔이며, 레이이고, 루이다. 에드워드에게 수잔은 두 눈을 부릅뜨고 어둠 속에서 사냥감을 기다리는 야행성 동물이며, 그의 펜촉이 겨냥하는 곳은 야행성 동물인 수잔의 심장이다.

  칼처럼 휘두르는 펜, 시뻘건 피를 볼 각오로 기꺼이 검은 피를 토하는 펜은 때로 칼보다도 더 무서워질 수 있다. 추한 속내와 몰골을 감추지 않는, 목숨을 걸고 독자와 싸우겠다는 작자의 결심이 담긴 글은 독자를 움직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수사학으로 포장한들, 현실에서 ‘야행성 동물들’의 살기등등한 눈빛을 마주친 글쟁이 같은 예민한 족속들은 언제나 먹잇감으로 전락하고 벌벌 떨기 마련이다. 물론 초식동물도 초식동물 나름이라 든든한 근육질의 다리로 종종 포식자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 사슴이나 기린 같은 동물도 있지만, 글을 쓰고 예술을 하려는 이들의 대부분은 사슴이나 기린도 못 되는 철저한 피식자다. 주위의 아주 사소한 기척에도 신경을 곤두세우는 이들은, 항상 몸을 웅크리고 커다란 귀만을 쫑긋 세운 채로 방어태세를 취하는 토끼와 다름없다. 

  토끼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토끼 같은 ‘인간들’에게는 퍽 다행스럽게도, 인간에게는 상상이라는 화약과 말과 글이라는 탄환이 있다. 토끼 같은 인간들의 태생적인 나약함은 그의 펜대-총구가 오로지 한곳만을 겨냥할 때, 끈질긴 집요함으로 변모하여 야수의 심장을 관통하기도 한다. 어떤 식으로든 표현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물리적, 현실적 위력을 잃은 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타인에게 들리도록 하는 방식이다.

  에드워드는 기어이 물리적인 위력이 아닌 정신적인 염동력을 동원하여 수잔의 내면에 파문을 일으켰다. 그것은 수잔이 이미 겪고 있던 실존적인 균열을 부추기는 것일 수도 있고, 수잔이 외면하던 그녀 자신의 추한 모습을 포박하여 바깥으로 끌고 나와 그녀를 무너뜨리는 일이 될 수도 있다. 혹은 그냥 잔잔한 파문, 잠시 잠깐의 소동으로 일단락될 수도 있다. 에드워드의 현재를 보여주지 않는 영화는 수잔의 미래에 대해서도 섣불리 단언하지 않는다.






이렇게 영화를 보고 난 뒤에, 우리는 다음의 물음을 마주친다. "그래서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냐?" 어떤 한 명의 사람이 다른 한 명의 사람에게 집요한 복수를 시도한—확실한 성공인지 실패인지는 아직 알 수 없는—이야기가, 당사자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는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가 에드워드의 시시껄렁한 복수를 대체 왜 봐줘야 하느냔 말이다. 

  정신적인 힘과 물질적인 힘의 위계를 뒤바꾸려는 에드워드의 시도, 도착적인 복수의 메커니즘을 안이 아닌 바깥에서 바라본다는 것은 물론 그 자체로 색다른 경험이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사유의 끝에서 씹히는 것은 공허함뿐이다. 녹터널 애니멀스가 실패하는 지점은 바로 이곳이다. 톰 포드가 우리에게 이러한 복수담을, 한 여자의 비계 낀 내면을, 강간당하는 딸과 아내를, 그러한 지독한 상실을 감내해야 하는 토니의 고통받는 얼굴을, 구태여 드러내는 까닭은 무엇인가? (강간당하는 장면은 아주 짧은 푸티지로 잠깐 지나갈 뿐이지만 감독이 관객을 충격에 빠뜨리려는 것은 분명하다.) 그는 관객들에게 충격을 유발하지만 생각을 산출하지는 못한다. 결국 〈녹터널 애니멀스〉는 말초적인 충격과 영화에 대한 기계적 분석만을 남기고 스크린에서 스러진다. 혹자는 이 영화의 공허함을 복수의 공허함이라는 주제의식으로 애써 발전시키려 할지도 모르겠으나, 둘은 구분되어야 한다. 톰 포드는 복수의 공허함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다. 폭발적인 배우들의 연기와 숨 막히는 연출이라는 화려한 외피를 덧입혀 되레 공허함을 감추려는 것처럼 보인다. (이 지점에선 확실히 성공했다. 잘 만들었다.)

부러 우악스럽게 말하자면, 〈녹터널 애니멀스〉는 ‘보여주기’ 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패션계에 종사한 감독의 영화답다고 할 수도 있겠다. (내가 이렇게 용감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패션에 대해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패션을 좋아하는 분들께 너그러운 양해를 구한다.)




우리는 에드워드가 글을 쓰는 이유를 기억하고 있다. (왜 글을 쓰는 거야? 마침내 죽을 것들을 save하기 위해서.) 톰 포드가 카메라를 든 이유도 에드워드와 다르지 않으리라. 그러나 에드워드가 펜을 듦으로써 영원히 남기기를(“It will last forever”) 기대한 것과는 달리 톰 포드의 영화는 강렬한 잔상 외에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다. 마치 수잔이 과거 자신이 사들인 복수(REVENGE)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누구도 자기가 아닌 걸 쓸 수는 없다는(“Nobody writes about anything but themselves”) 에드워드의 대사는 변명이 아니라 사실이다. 예민한 에드워드는 곪은 상처를 헤집을 줄밖에 모르고, 수잔은 자기 안의 역겨움을 전시하는 것밖에 하지 못한다. (본인이 예술가가 될 깜냥이 안 된다는 젊은 수잔의 진단은 꽤 정확했던 셈이다.) 그리고 톰 포드는 한껏 치장한 영화를 전시하지만, 그 결과물은 어째 늙고 뚱뚱한 여인들의 나체와 흡사해 보인다.

  결국 톰 포드는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데에는 성공하지만 에드워드의 기대에 부합하는 데에는 실패한다. 즉, 〈녹터널 애니멀스〉는 정크다. 근데 정크면 뭐 어때. 맛만 좋으면 됐지.


네 배우 다 연기 뒤지게 잘한다. 특히 초반부 고속도로 시퀀스는 정말 끔찍하게 잘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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