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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nui Jul 16. 2020

에우리디케의 주체적 이별
오르페우스에게 안녕을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셀린 시아마, 2019)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원근법을 활용하여 그려진 그림이다



전통적 회화의 근간은 착시이다. 입체를 평면에 옮기는 작업은 필연적으로 상의 왜곡을 수반하게 된다.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에 대하여 논할 때 그는 근대의 일반적 인식구조와 원근법의 관계에 대해서도 말한다. 화면 정중앙의 소실점을 기준으로 화폭을 수놓는 풍경들은 사실 어떤 특정한 시선을 대변하는 것에 불과하며, [객관적인 풍경]과 [고정적인 시점]이라는 것을 상상할 수 있도록 했던 원근법의 창시는 곧 주관의 발견과도 이어졌다는 것이다. 고진은 또 이렇게도 말한다.



“원근법적 공간에 익숙해지면 그것이 [작도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잊고 마치 그때까지의 회화가 [객관적]인 현실을 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그렇다. 근대회화는 실재의 왜곡을 승인하고 그것을 숨김으로써만 가능해진다. 풍경화가 아닌 초상화에서도 사정은 매한가지. 엘로이즈를 잘 알지 못하는 채로 —전적으로 자신의 뇌리에 맺힌 상에 근거하여, 부재하는 대상을 억지로 붙잡아 초상화를 그렸던 마리안느를 떠올릴 것. 엘로이즈는 마리안느의 첫 그림에 혹평을 내린다. 이야기의 흐름상으로는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속였기에, 그에 대한 반발심에서 나온 어리광이라고 설득할 수도 있겠으나, 이전까지 카메라가 지나온 궤적에 근거할 때, 그리고 이 영화가 천착하는 메인 테마에 근거할 때 이러한 설득은 어딘지 마뜩지 않다. 엘로이즈는 이미 자신을 흘끔거리는 마리안느를 여러 차례 보았다. 그럼에도 엘로이즈가 처음 그림에 대해 혹평을 내린 것은, 물론 반발심리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그보다 근본적인 지점에서 사유해 볼 것을 관객에게 요구한다. 엘로이즈도, 마리안느도 만족시키지 못했던 그 그림은 어디가 잘못된 것일까. 대체 엘로이즈가 말하는 생명력과 존재의 정체가 무엇이냐는 말이다.


먼저 묻겠다. 마리안느(주체)가 그린 초상화는 엘로이즈(대상)를 [객관적]으로 [재현] 한 것인가? 궁시렁거리는 엘로이즈에게 미술의 관습과 규칙을 운운하는 마리안느는 익숙한 누군가를 닮은 것만 같다. 우리는 “네가 뭘 아냐”는 식으로 대중의 취향을 백안시하는 콧대 높은 예술가의 전형을 떠올릴 수 있다. 플로베르가 “예술가가 되지 못하면 비평가가 된다”고 말한 것처럼 자기 작품의 비판에 대한 예술가들의 예민한 반응은 일견 이해도 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마리안느의 신경질적인 반박에서 모종의 우월감을 읽어내지 않을 수 없다. (곧이어 자기 그림의 모자람—아무래도 기술적인 문제는 아닐 테다—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미술 비평가인 줄은 몰랐네”라는 비아냥의 기저에는 권력과 위계질서의 문제가 깔려 있는 것이다.


사르트르와 푸코의 이론적 담금질을 거치면서 시선과 권력의 상관관계는 보다 명확해졌다. 스탠리 큐브릭의 유작 〈아이즈 와이드 셧〉의 유명한 제의祭儀 시퀀스를 떠올리면 이해가 쉽겠다. 가면 뒤에서 벌거벗은 주인공을 바라보는 수백 개의 눈들은 어떤 무기보다도 위력적이다. 그 시선의 비대칭성 앞에서 톰 크루즈는 한없이 오그라든다.



〈아이즈 와이드 셧〉의 제의 시퀀스. 가면 뒤의 시선들이 주는 압박감은 톰 크루즈를 오그라들게 만든다.



좀 더 간단한 예시를 들어보자. 아르바이트라도 해보았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텐데, 알바생 입장에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 중 하나는 업무시간 내내 씨씨티비로 감시하는 사장이다. 그것은 푸코가 말한 바대로 주체의 예속을 초래한다. 오로지 시선의 그 비대칭적인 관계에 의하여 주체는 저항 불능의 상태로 내몰린다. 권력은 그렇게 모든 곳에서 작동한다.



초상화와 시선의 비대칭성



이러한 시선의 문제는 앞서 살펴본 ‘초상화’라는 계기를 통하여 첨예화된다. 감독은 엘로이즈가 마리안느 이전에 온 화가에게는 결단코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음을 넌지시 알려준다. 얼굴을 가린다는 것은 대상화를 거부한다는 것이며, 마리안느에게 그녀가 얼굴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은 앞으로 그들이 쌓아 나갈 동등한 관계의 단초가 되는 것이다. (피고용인인 마리안느나 하녀인 소피와도 평등한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엘로이즈의 바람은 이러한 대상화와 관련하여 이해할 때 더욱 깊게 이해할 수 있다.)








엘로이즈와 마리안느는 비로소 서로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문제는 해소되지 않았다. 어머니가 돌아오기 전에 엘로이즈는 다시 대상이 되어야 하고 마리안느는 시선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요컨대 그들을 묶어 놓은 초상화란 굴레는 아직 굳건하기만 하다. 부동자세로 한참을 가만히 있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군필자라면 누구나 알 터. 엘로이즈는 그 어려운 운명에서 도망치지 않는다. 그녀는 기꺼이 ‘대상’이 되기로 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의문을 가진다. ‘대상’이 스스로 ‘대상’이 되는 일이 가능한가? “스스로 되기”라는 수사에는 주체의 의지가 함축되어 있다. 엘로이즈는 대상이 됨으로써 주체가 된다. 이 결단이 그들이 속한 굴레에 균열을 일으킨다. 바디우는 사랑을 “타자의 실존에 대한 근원적이며 유일한 경험”으로 정의한다. 마리안느의 실존을 경험하는 엘로이즈는 기어이 보아지면서 바라본다. 이제 시선은 한 방향만 가리키지 않는다. 마치 〈타이타닉〉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케이트 윈슬렛의 시선이 뜨겁게 교차하는 것처럼, 그들의 시선은 자유로이 오고 간다. 눈을 맞춤으로써 그들은 하나가 된다.


처음 그렸던 그림과 별 다를 바 없어 보이는 그림이 이번에는 나름대로 만족스럽다. 한번 더 가라타니 고진으로. 고진은 상술한 '고정된 객관적인 시점'이 가능하다는 믿음이 회화에서 이야기를 지워낸다고 보았다. 끝없는 변화의 장인 시공간에서, 한 특정한 순간과 좌표의 우연한 결합을 억지로 박제한 근대회화에 이야기가 설 자리는 없다는 것이다. 요컨대, 엘로이즈가 말한 생명력과 존재의 요체는 이런 이야기 자체를 말하는 것은 아닐까. 이를 받아들인다면 시공간의 지평에서 탈각된 예술이나 사랑은 처음부터 가능하지 않았던 셈이다. 서로가 나눈 대화와 눈빛들만이 그들의 사랑을 가능케 한다. 그들 스스로가 담긴 초상화. 이제 그들은 그림에 만족할 수 있다.


허나 그림의 완성은 곧 이들에게 닥칠 이별을 예고한다. 예정된 사랑의 끝에 슬퍼하는 엘로이즈를 위하여 마리안느는 자화상을 그려준다. 주체와 객체의 역전, 서로가 객체가 됨으로써 주체가 되는 역설이 여기에서 벌어진다. 가상의 시선에 의해 형성된 근대회화 규칙의 옹호자였던 마리안느는 엘로이즈를 위해 기꺼이 누드모델이 되기를 자청한다. 얼굴만 마리안느의 것이고 몸이나 구도는 여전히 엘로이즈의 것이지만, 이미 이것은 중요치 않다. 28페이지에 남을 누드화의 주인공은 영원히 마리안느다. 회화가 [순수한 실재]를 캔버스에 [객관적으로 재현한다]는 환상은, 에로스적인 사랑 앞에서 여지없이 박살 나고 만다. 이제 이곳에 주객은 없다. “애무는 피부를 살로 바꾼다”던 사르트르 말처럼, 두 여인의 결단과 결합을 통하여 객관적 대상으로서의 피부는 비로소 온기를 띤 살갗이 된다.











이들의 사랑과는 무관하게 현실은 사뭇 냉혹하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엘로이즈와 마리안느는 닷새 간의 짧은 일탈을 마치고 각자의 삶으로 되돌아간다. 영화는 다시 현재로 돌아와 마리안느를 보여준다. 회화교사로 보이는 마리안느는 여기서도 학생들을 위해 모델을 하고 있다. 마리안느는 자신이 “슬퍼 보이기에 슬프게 그렸다”는 학생에게 가벼운 미소를 짓는다. 이어 그녀는 아마 아버지의 이름으로 열린 듯한 전시전에서, 실은 자신이 그린 그림 앞으로 가 한 관람객과 문답을 주고받는다. 그녀는 자신이 그림을 그렸다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관람객은 그녀에게 또 말을 건넨다. 주로 비극적 순간을 묘사한 다른 오르페우스 그림들과 달리 이 그림은 서로에게 작별인사를 고하는 것 같다고. 그녀의 그림 속에 현상된 에우리디케는 엘로이즈를 퍽 닮은 것 같다.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로만 여겨지는 오르페우스 설화는 앞서 엘로이즈, 마리안느, 소피가 나눈 토론에서 조금 다르게 해석된다. 금기를 어긴 오르페우스를 이해하지 못하는 소피에게 엘로이즈는 사랑 때문에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며 오르페우스를 변호하고, 마리안느는 여기에 의문을 제기한다. 어쩌면 오르페우스가 뒤돌아보기 직전 에우리디케와의 사랑을 다시 회상하고, 시인으로서 이별을 고한 것일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를 받아 엘로이즈는 에우리디케가 오르페우스에게 뒤돌아보라고 했을 수도 있다는 추리를 한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이들이 각색한 오르페우스 설화는 그대로 재현된다. 오르페우스가 ‘바라봄’으로써 에우리디케를 놓친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 셀린 시아마는 시선을 또다시 주체의 태도와 연관시키며 오르페우스 설화를 변주했다. 마침내 엘로이즈의 어머니는 돌아오고, 그녀의 결혼은 코앞으로 닥친다. 이러한 현실 앞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되새기고 싶지 않은 마리안느는 쫓기듯이 도망치고, 마리안느의 등 뒤에 선 엘로이즈는 담담하게 그녀를 바라보며 뒤돌아볼 것을 요청한다. (뒤돌아봐!)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의 명령 아닌 명령을 거부할 수 없다. 이 마지막 시선의 교환으로 인하여 그들은 끝난 것이 아니라 끝낼 수 있었다. 지고한 세월 동안 비극의 주인공으로 머물던 오르페우스는 드디어 안녕을 허락받았다. 억지로 잡아 끈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님을 이제 마리안느는 안다. 언뜻 현실에의 순응으로 보이는 이들의 무력함은 그러나 무책임하지는 않다. 사람에게는 평생보다 중요한 닷새, 계속해서 살아가게 하는 닷새도 있는 법이므로. 그 닷새의 기억을 매듭짓고 영영 추억하는 것 또한 기억의 주인이 져야 할 책임의 일부일 테니까.


이윽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 엘로이즈에게 연주해주었던 비발디의 '사계'가 연결고리가 되어 마리안느는 엘로이즈를 공연장에서 다시 보게 된다. 서로의 시선은 마주치지 못한다. 마리안느는 끝내 엘로이즈의 슬픈 옆모습만을 바라볼 뿐이다. 그러나 마리안느는 과거와는 다르다. 어떻게든 엘로이즈를 그리기 위해 귓바퀴와 얼굴을 훔쳐보던 마리안느는 이제 없다. 화면을 가득 채운 여름의 강렬한 곡조와 숨죽여 우는 여인, 그리고 그 여인과 함께 불타오르며 살아 숨 쉬는 마리안느의 시선만이 공명할 뿐이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이렇게 완성되었다.







P.S. 엘로이즈와 마리안느에만 집중해서 쓰느라 소피의 존재를 많이 놓친 듯하다. 소피 또한 이 영화에서 중요한 부분을 담당한다. 특히 낙태 씬은 더 생각해볼 여지가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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