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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nui Jul 16. 2020

늙은 예술가의 초상

〈페인 앤 글로리〉(페드로 알모도바르, 2019)




    ‘고통과 영광’을 병렬로 이어 붙인 영화의 제목은 동서와 고금을 뛰어넘어 하나의 진리로 취급되는 금언을 상기시킨다. 고진감래, 또는 노 페인 노 게인. 〈페인 앤 글로리〉 — 말이 병렬이지 사실은 인과관계다. 어순을 봐라. (이것도 따지고 보면 안 될 이유는 없다마는) ‘글로리 앤 페인’은 왠지 조금 어색하다. ‘페인 앤 글로리’ 여야 한다. “고통 [뒤]에 영광이 있다”라든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든지 하는 식의, 뭐 그런 순서 있지 않은가.


    도래할 영광의 값으로 치러야만 하는 현재의 고통. 니체라면 여기에서 기독교 복음의 이율배반을 주목할 것이고, 마르크스주의자라면 자본주의의 기만성을 폭로하고자 할 테지만,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고통과 영광’을 말하는 까닭은 다른 데에 있다. 유명한 명언을 한 번 인용해 보자. 괴테가 그랬다지.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자와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훌륭한 예술작품은 우리네 삶을 진실하게 반영하는 것이라는 오랜 믿음을 따라, 괴테의 언명에서 인생을 예술로 바꾸어 볼 것. 그러니까, 괴테가 한 말은 이렇게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자와는 예술을 논하지 말라” —말인즉슨 ‘진짜 예술’을 하려면 삶이 고달파야 한다는, 거의 모든 종류의 예술가 지망생들을 자기 연민과 자의식 과잉과 마조히즘으로 몰아넣은 예술가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 이는 비단 괴테만의 생각은 아니다.


    괴테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한 러시아 정치인은 이런 감동적인 연설을 하기도 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왜 대문호가 되었느냐. 강제노동을 10년 동안 해서 그런 거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가 뭐냐고? 사람들을 감옥에 처넣어야 한다는 거다. 예술사는 동성애자와 수감자의 역사다. 고급 아파트에 사는 등 따습고 배부른 헤테로는 예술가가 될 수 없다!”


    당연하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극단주의자의 극단적인 연설을 웃어넘겼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총살 직전에 사면되었던 경험이 자신의 삶에서 중대한 전기가 되었다고 말한 도스토예프스키를 떠올리며 “암, 진정한 예술가는 고통을 좀 알아야지”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므로 한 예술가의 삶과 예술적 성취, 그리고 그가 겪어야만 했던 고통들을 다루는 이 영화에서 먼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상술한 명제의 적실성이다. 자, 고통을 알아야만 예술을 할 수 있는가? 예술과 고통은 빛과 그림자처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어째서 그러한 것인가?






살바도르의 흉터 자국, 영화는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영화의 첫 장면부터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살바도르의 몸에 남은 선명한 흉터 자국이다. 감독은 고통에 대해 이야기할 것임을 명백하게 선언한다. 〈페인 앤 글로리〉라는 텍스트를 읽기 위해서 우리는 이 고통의 정체를 소명해야만 한다.


    왕년의 잘 나가는 영화감독이었던 살바도르는 만성적인 편두통과 척추 통증을 비롯한 숱한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는 중이다. 힘들고 아픈 것은 그의 육체뿐만은 아니다. 그는 새로운 작품을 쓰지 못하고 있다. 의욕마저 사라진 것만 같다. 심지어 2년이나 지난 어머니의 죽음에서도 아직 벗어나지 못한 채로 그는 하루하루 연명하고 있다. 그러던 와중, 그가 32년 전 찍었던 영화를 리마스터링 하여 재상영할 예정이니 시사회에 참석해달라는 제안을 받는다. 제안을 받은 뒤 자신이 예전에 찍었던 영화 ‘향취’(Sabor)를 다시 보게 된 살바도르는 자신의 관점이 예전과 달라졌음을 자각한다. 과거엔 마음에 차지 않았던 주연배우 알베르토의 연기가 다시 보니 썩 괜찮았던 것이다. 당연하게만 여겨왔던 기억의 어떤 장면이 새삼 낯설게 느껴질 때, 문득 피어오르는 의문은 우리에게 과거를 다시 한번 되돌아볼 것을 요구한다. 마침 알베르토와 같이 시사회에 참석하라는 제안을 받은 살바도르는 32년 만에 알베르토를 찾아 나선다. 이렇듯 〈페인 앤 글로리〉는 지속되는 삶의 매 순간 불현듯 모습을 드러내는 과거의 어떤 지점으로 빨려 들어가, 지금 이 순간 그것들이 새로이 뿜어내는 색채를 다시금 조명하는 영화다.


    예고 없이 삽입되는 과거의 조각들은 살바도르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 동시에 관객들을 살바도르의 삶 속으로 데려간다. 이때 우리의 시선을 잡아당기는 것은 바로 ‘물’이다. 영화는 유독 물이나 혹은 그와 유사한 액체적 이미지를 많이 활용한다. 고정된 형태를 가진 고체와 달리 매 순간 흩어지고 찰랑이는 액체는 기억의 심연과도 맞닿아 있다. 첫 장면에서 재활을 하는 살바도르를 다시 떠올려 보자. 그는 물속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히치콕의 〈현기증〉 타이틀 시퀀스를 연상시키기도 하는 초반부의 현란한 그래픽 효과도 이와 비슷하다. 액체처럼 유동적으로 퍼져 나가고 또 되돌아오는 파동은 고정된 형태 아래 모습을 감추고 있는 기억의 심층으로 관객들을 빨아들인다.



일련의 액체적 파동들은 관객들을 영화 속으로, 그리고 살바도르의 기억 속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수행한다


    알베르토와의 만남을 통해 과거를 되돌아볼 계기를 가진 살바도르는, 알베르토가 우연히 그가 쓴 글을 읽게 되면서 타의에 의해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된다. 살바도르가 쓴 글은 소설이 아니라 회고록이었다. 첫사랑과의 추억, 그리고 아직도 털어내지 못한 한 줌의 아쉬움이 담긴 그 글은 원래 일반에 공개하기 위해 쓴 대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글을 너무 마음에 들어 한 알베르토에 의해 살바도르의 옛 기억은 연극으로 되살아난다. 살바도르는 극을 보러 오라는 알베르토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연기를 못하면 나는 비참해질 거요. 당신이 연기를 잘하면 더욱더 비참해질 거고.” 


    살바도르에게는 가장 사적이고 수치스러운 기억의 재현일 이 연극 —비록 알베르토에 의한 것일지라도 이는 굉장한 용기를 필요로 할 테다— 을 우연히 그곳을 찾은 그의 첫사랑 페데리코가 보게 된다. 이어 살바도르와 페데리코는 재회하게 되고, 살바도르는 이를 계기로 다시 새로운 과거를 마주한다. 살바도르는 노환으로 돌아가시기 전 어머니의 소원을 들어드리지 못한 데에서 비롯한 자신의 죄책감, 그리고 처음으로 강렬한 성적 충동과 혼란을 느낀 유년기의 기억까지 더듬어 본다.


    어떤 기억들은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이다. 고통은 오롯이 주관적인 것인 까닭에 몇몇 기억들은 타인에게 이해받을 수 없다.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조차 그 기억들은 뚜렷한 형태를 나타내지 않는다. 그때까지 살바도르를 옥죄고 있는 것은 그러한 기억들이었다. 미련들과 아쉬움들이 살바도르를 삶으로부터 떼어냈다. 고독과 고통은 발음만큼이나 서로 가까이에 있다. 살바도르가 감내해왔던 고통의 정체는 고독이었다. 


    앞서 제기한 문제로 돌아가서, 그렇다면 고독은 예술에 있어서 필수적인 자양분인가? 그렇다. 고독 없는 예술은 없다. 예술은 우리의 현실을 붙잡고 있는 쓸모의 논리에서 벗어나서, 심연 속으로 들어가 무언가를 건져 올리는 것이다. 거기에는 무수한 의문과 좌절감과 막막함이 뒤따른다. 아무도 간 적 없는 길을 걷는 예술가의 곁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쓸쓸함이 함께 한다. 예술가들의 겪는 마조히즘과 신경증은 예술 자체에 이미 배태되어 있는 셈이다.


    그러나 고통은 예술의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다. 아프다고 해서, 외롭다고 해서 모두가 예술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고통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날카로운 시선 없이는 예술가가 될 수 없다. 극중에서 음식은커녕 물도 삼키기 어려운 살바도르가 겪는 희귀병을 떠올려 보자. 살바도르는 때때로 심각할 정도의 목 막힘을 겪는다. 이는 석회화되어 자라나고 있는 그의 뼈 때문이다. 얼핏 들으면 죽을병인가 싶겠지만 의외로 의사는 덤덤하다. 간단한 수술로 석회화된 뼈들을 깎아내면 치료할 수 있다고 한다. (혼란스러운 유년기의 배경이었던 그의 집이 석회동굴이었던 것도 우리는 떠올릴 수 있다.) 머릿속에서 자라고 있을지 모른다던 종양 또한 아무것도 아니었음은 물론이다. 결국 단서는 그저 바라보는 것만이 아니라 '제대로 바라보는 것'에 있다.






    그런가 하면, 문학의 본질을 바로 ‘형식’에서 찾은 바르트의 말마따나, 창작에는 치열한 형식적 숙고 또한 요구된다. 과거를 똑바로 마주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예술이 예술이기 위해서는 그것을 ‘어떻게 나타낼 것인가’하는 질문과 그에 대한 작가 나름의 대답이 있어야 한다.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영화의 마지막 쇼트에서 자신의 대답을 들려준다. 천천히 물러서며 조연출을 프레임에 담는 카메라에 의해, 살바도르의 기억에 종속된 플래시백인 줄로만 알았던 과거의 장면들이 모두 살바도르가 새로이 찍고 있는 영화의 일부임이 밝혀진다. 고정된 실체인 체하던 기억들이 실은 감독의 자의식에 의해 재배합된 영화 속 영화의 장면일 뿐이라는 사실은, 처음 장면에서 우리가 보았던 살바도르가 고통을 마주하고 그것을 인정하는 방법으로서 다시 ‘예술’을 택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영화는 흔한 플래시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새로운 영화가 되기를 택한다.



    이는 또한 영화 밖 영화의 관객인 우리의 인식도 뒤흔들어 놓는다. 이제껏 우리는 무얼 본 것인가? 이것은 단지 영화일 뿐인가? 영화 밖의 우리가 이 영화에서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바로 감독의 존재다. 나이 든 영화감독, 어머니에 대한 애착, 동성애자라는 살바도르의 특징들은 곧 이 영화의 실제 감독인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특징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영화 속 살바도르의 집은 실제 알모도바르 감독이 거주하는 주택이라고 한다. 이런 정보들을 접하고 난 뒤, 우리는 영화와 현실의 엇갈림 혹은 마주침을 생각하게 된다. 이를테면 이러한 물음들. 〈영화는 얼마나 진실한가〉


    살바도르 마요, 또는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이 영화를 찍음으로 인해 곧바로 구원에 다다르게 되었다는, 그런 결론에 이르기에는 무리가 있다. 고작 영화를 찍는 것만으로 한 사람이 과거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다는 건 지극히 개인적인 주장이 아닌가. 윌리엄 포크너는 자신의 소설에서 이렇게 썼다. “과거는 절대 죽지 않는다. 과거란 사실 지나간 것조차 아니다.” —이미 일어난 과거의 사건 자체를 우리는 어찌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단지 영화일 뿐’이기에, 그 기억들은 끊임없이 다시 불려 오고 또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으며 현재를 뒤바꾼다. 예술은 아무것도 아님으로 인해 현실을 초월하고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역설이 발생하는 것이다. 



살바도르로 분하며 알모도바르 감독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연기를 보여준 안토니오 반데라스의 존재감은, 이 영화를 논하는 데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제임스 조이스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통해 자신의 삶과 예술세계를 되돌아보았다. 칠십 대가 된 노감독의 자전적 영화인 〈페인 앤 글로리〉에 우리는 이러한 부제를 붙여줄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를테면 ‘늙은 예술가의 초상’이라는 부제를. 그 늙은 예술가가 자신의 기억을 더듬으며 다다른 곳에는, 예술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증거가 영원토록 반짝이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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