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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nui Aug 03. 2021

SF영화는 나비의 꿈을 꾸는가?

〈소스 코드〉(던컨 존스, 2011)가 제기하는 존재론적 물음


SF영화는 나비의 꿈을 꾸는가?

〈소스 코드〉(던컨 존스, 2011)가 제기하는 존재론적 물음


어느 날 아침 따사로운 꿈에서 깨어난 그레고르 장자는 마루 바닥에서 한 마리 흉측한 인간인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물론 이 첫 문장은 카프카에 대한 오마주다. 물론 장자에 대한 샤라웃이기도 하며, 나비에게 바치는 헌정시이기도 하다. 깨어났더니 갑충으로 변해 있던 잠자와 잠에 들었더니 나비가 되어 있던 장자. 잠자-갑충과 나비-장자는 포개지는 듯하지만 금세 미끄러진다. 카프카와 장자의 미묘한 불협화음.

  「변신」을 읽는 독자에게 잠자-갑충은 일종의 메타포다. 갑충이 되었더라도 그건 여전히 그레고르 잠자다. 잠자는 ‘현실’이며 그가 해충으로 변했다는 설정은 그를 벌레 취급하는 지독한 현실에 대응하는 잠자의 심리적 현실이다. 그레고르 카프카-프란츠 잠자에게 현실은 악몽이며, 현실이 악몽이라면 소설은 악몽을 알레고리화하려는 시도다. 비록 카프카가 존재의 근원적 부조리와 완고한 현실의 무상함을 앞질러 포착한 선구자적인 작가라고는 해도 그에게 현실은 여전히 더없이 무겁고 무서운 것이었다. 카프카는 현실이란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다.

  장자는 카프카처럼 불안에 시달리지 않는다. 호접몽의 고사에서 장자는 개체로서 자의식을 지닌 우리 존재가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간파한다. 하지만 카프카와 달리 장자에게 덧없음은 불안의 근거가 되지 않는다. 만물은 변화한다. 영원한 건 없다. 존재의 확실한 토대는 없다. ‘나’는 하룻밤 꿈에 불과하며 현실은 꿈의 그림자일 뿐이다. 카프카에게 이는 잔혹한 사실이었다. 가라앉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백조처럼, 그는 24/7 악몽에 쫓겨 다녀야 했다. 그러니까 그의 모호하고 괴이한 소설은 도망의 일지이다.


괴로워하는 카프카를 보고 나비-장자는 말한다: 현실이 꿈인데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어느 날 오전 몽롱한 꿈에서 깨어난 콜터 스티븐스 대위는 달리는 기차의 좌석에서 션 펜트리스가 되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분명 아프가니스탄에서 비행 중이었는데 별안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기차에 앉아 있다. 앞좌석의 모르는 여자는 그를 션이라고 부른다. 화장실 거울에 비친 그의 얼굴은 자신이 알던 자신의 얼굴이 아니다. 어찌 된 영문인지 그는 션 펜트리스가 되어 있다. 잠시 뒤 기차는 폭발하고 그는 어두컴컴한 캡슐 안에서 눈을 뜬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세계의 전모가 차츰 밝혀진다. 대위가 눈을 떴던 기차 안의 세계는 일명 ‘소스 코드’라는 기술로 구현된 8분짜리 가상현실이다. 그날 아침 기차 폭발 테러가 있었고 션은 그 기차에서 사망했다. 소스 코드 속의 세계는 죽은 션의 뇌에 남은 기억의 잔상일 뿐이다. 콜터 대위에게 주어진 임무는 그 가짜 기차에서 테러리스트를 찾아내는 것이다.

  물론 테러리스트를 찾아 범행을 미리 막는다 한들 사망자들은 되살아나지 않는다. 콜터가 지각하는 소스 코드 속의 세계는 너무나도 생생하지만 이는 모두 신기루에 불과하다.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현실과 환상의 위상이다. 소스 코드는 진짜 현실을 위해 존재한다. 가상현실은 진짜 현실에 종속된 가짜 세계다. 진짜 콜터가 가짜 션의 외피를 뒤집어쓰는 것은 진짜 현실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진짜 콜터는 다시 진짜 현실로 돌아가야만 한다.

  몇 번이나 죽음을 감수하며 진짜 현실로 돌아오기 위해 애쓰던 콜터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잔혹한 현실을 대면한다. 콜터는 이미 두 달 전에 죽었다. 꿈틀거리는 신체조차 사실 기술적으로 조작된 감각일 뿐이다. 관객들은 해묵은 윤리적 딜레마를 다시 마주친다. 다수의 생명, 시스템의 유지, 나아가 집단으로서 ‘인류’의 존속을 위해서 개인은 아무렇게나 다뤄져도 되는가? 비록 거짓 죽음일망정, 그를 몇 번이고 죽도록 놔둘 권리가 우리에게 있는가? 표면적으로는 제이크 질렌할이라는 스타의 얼굴로 나타난 콜터 대위를 통해 제기되는 물음이지만 우리는 그 이면에 존재 자체가 소거된 인물, 여느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서 그러하듯 오로지 껍데기만 남아 영화의 배경으로 기능하는 익명의 인물인 션 펜트리스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이대로 끝났어도 좋았겠지만 이대로 끝내기는 아쉬운 영화다


언뜻 보기에 〈소스 코드〉는 이러한 딜레마를 회피하는 듯하다. 개인을 옭아매면서 인류를 구원하리라 장담하는 테크노크라시의 섬뜩함은 국가를 위해 순국하였으며 이제 사랑하는 여인과 영원히 함께하려 하는 애국자/군인/로맨티시스트 콜터 대위의 낭만적 영웅주의로 포장된다. 이미 국가를 위해 제 한 몸을 바친 콜터 대위는 대의를 위하여 몇 번이고 다시 희생한다. 영면의 약속을 어기려 드는 시스템은 자체에 도사리고 있는 불안 요소, 굿윈 대위의 휴머니즘에 의하여 저지된다. 〈소스 코드〉는 영웅을 내세워 인류의 희망을 이야기하는 전형적인 할리우드 장르영화의 문법을 따르려는 것일까? 9.11 이후 할리우드 영화는 다시금 입에 발린 달콤한 거짓을 약속할 수밖에 없는가?

  〈소스 코드〉를 보고 난 관객들은 콜터/션과 크리스티나의 정지된 키스로 영화가 막을 내렸어야 한다는 입장과 지금의 엔딩이 적절하다는 입장으로 나뉜다. 나는 두 의견에 모두 반대한다. 이 영화는 그 사이 지점 — 콜터/션과 크리스티나가 커다란 구체의 거울 조형물 앞에 나란히 서 있고, 그들에게 차츰 다가서던 프레임이 아예 구체 거울 속의 세계로 가득 차는 장면 — 에서 끝났어야 한다. 앞서 이 영화가 윤리적 딜레마를 야기한다고 말했지만, 기실 이 영화는 그러한 딜레마조차 집어삼키는 훨씬 심오한 화두를 던지는 까닭이다. 현실과 가상, 의미와 무의미 말이다.


션의 모습은 이 영화에서 딱 두 번 등장한다.

  우리는 두 차례 거울에 비친 션을 본다. 한 번은 또렷하게, 다음번은 흐릿하게. 또렷한 션을 마주 보고 혼란스러워하던 콜터는 비로소 흐릿한 션을 마주 보고 선다. 그에게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명가명비상명. 이름 지어진 이름은 언제나 그 이름이 아니다. 션의 존재는 할리우드 영화의 공식에 따라 지워진 것이 아니라 이미 콜터와 뒤섞여 있다. 그러므로 끝끝내 우리가 답해야 하는 질문은 공고한 현실의 층위에서 작동하는 윤리에 대한 물음이 아니라, 현실 자체를 의문시하는 존재론적 물음이다.

  ‘리얼’이란 무엇인가? 그토록 오랫동안 예술가와 철학자들이 천착해온 진리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진실을 추구하는 성향은 인류의 본성인가? 인류의 지식은 모든 것을 회의하고 물음을 던지며 축적되어 왔지만, 우리는 진실 그 자체를 의문에 붙이지는 못했다. 데이비드 흄은 우리가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바깥세상이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다. 모든 것은 불확실하다. 오늘날 과학은 흄의 생각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자유의지 자체를 부정하려 든다. 그러나 흄과 현대 과학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에 우리는 너무 나약하고, 우리의 자의식은 너무 비대하다.


《나루토》의 '무한 츠쿠요미'

  세계적으로 히트한 소년만화 《나루토》와 세기말의 SF영화 〈매트릭스〉는 이 지점에서 아주 중요한 텍스트로 읽힐 수 있다. 나루토의 아치 에너미인 우치하 마다라에게 세계는 고통으로 가득 찬 끔찍한 곳이다. 마다라는 모든 인간을 고통에서 구원하고자 한다. 그는 사람들을 잠재우고 꿈속의 세계로 데려가려 한다. 나루토는 소년만화의 주인공답게 마다라의 비전을 거부한다. 제아무리 행복한 꿈이더라도 그것은 ‘진짜’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매트릭스〉에서도 주인공 네오는 선택의 갈림길에 마주친다. 빨간 약과 파란 약. 네오는 빨간 약을 집어삼키고 진실을 목도한다.

  우리는 개체로서의 우리가 존재한다는 환상을 결코 뿌리칠 수 없다. 쿤데라의 용어를 빌리자면, 우리는 ‘키치’ —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 — 를 인식할 수는 있되 거기서 빠져나올 수는 없다. 우리가 아무것도 알 수 없고, 우리의 의지조차 우리의 것이 아니며, 그저 키치에 사로잡힌 채 아등바등하다 무無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삶을 영위할 수 있는가?


SF적 상상력이 우리를 매혹시키는 까닭은 실제 세계에서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여 우리가 존재하는 토대를 드러낸다는 데에 있다. 〈소스 코드〉에서 우리는 영원한 죽음에 잠김으로써 외려 순간의 삶을 붙잡으려 하는 콜터의 결단을 바라보게 된다. “순간의 영원”이라는 테마는 오래된 문학 작품에서부터 최근의 〈지구 최후의 밤〉 같은 영화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예술 작품들에서 다뤄진 바 있다. 하지만 〈소스 코드〉가 순간의 영원을 다루는 방식은 이전까지의 작품들과는 전혀 다르다. 감독은 콜터-션에게 빨간 약이 아닌 파란 약을 건넨다. 그러나 이때의 파란 약은 빨간 약보다 더 진실하다. 콜터-션에게 중요한 것은 그의 개별적 정체성이 아니다. 설혹 그의 세계가 가상이더라도, 한갓 꿈에 불과한 것이더라도 그는 좌절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허구성을 인식함으로써 콜터-션은 새로운 세상에서 온전한 삶을 누릴 수 있다.

  이는 픽션을 보는 우리의 태도와도 상통한다. 우리는 영화가 은막에 비친 필름의 잔상임을 안다. 거짓을 기꺼이 믿는 체하는 동안에만 픽션은 지속한다.


카메라는 실제 세계를 콜터에게 비춰준다


  〈소스 코드〉는 콜터와 굿윈, 그리고 소스 코드의 총책임자 러틀리지가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카메라를 단독 쇼트로 삽입한다. 소스 코드 프로젝트의 기획자들은 ‘현실’을 구원하려 하지만, 그들 자신조차 실은 카메라에 비추는 잔상일 뿐이다. 우리는 잔상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티끌이다. 출세를 향한 열망으로 몸이 단 러틀리지의 몸부림은 관객들에겐 그저 무의미해 보일 따름이다. 그리고 그 환상성을 인식한 콜터-션에게만 세상은 온전하게 드러난다.

  환상을 인식한다는 것은 삶의 무의미에 신음하는 것과는 다르다. 니체의 위버맨쉬와 같은 형이상학적 대안을 고안하거나 우치하 마다라처럼 고통에서 도망치려 할 필요도 없다. 안티 휴머니즘을 자신의 철학적 준거틀로 삼는 영국의 철학자 존 그레이는 세상은 구원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저 한 번뿐인 삶을 사는 필멸자로서, 매 순간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성의 있게 행동하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모든 것이다. 운명을 믿느냐는 콜터-션의 물음에 대한 크리스티나의 대답을 기억하자: Not really. I’m more a dumb luck kind of gal. 운명을 믿지 않는 멍청함이야말로 사려 깊음이요, 행운이다.

  나비-장자는 자기가 무엇이든 신경 쓰지 않았다. 〈소스 코드〉는 SF적 상상력을 경유하여 장자의 가르침에 가닿는다. 거울에 비친 세계일지라도 세계는 여전히 세계고, 우리는 여전히 우리다. 그러므로 “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없으니퍽섭섭하다”는 이상의 시구절은 고쳐 써야 한다. 거울의 나와 분리되어 있다고 너무 섭섭해하지는 마시라. 우리는 이미 거울 속에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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