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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nui Aug 12. 2021

훌륭한 기사는
신호를 위반하지 않는다

〈그린 나이트〉(데이비드 로워리, 2021)

훌륭한 기사는 신호를 위반하지 않는다

〈그린 나이트〉(데이비드 로워리, 2021)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태어날 때를 만났기 때문이며,
이 세상을 떠난 것은 떠나야 할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장자』, 장자 )

“모든 것은 불타고 있느니라. 무엇이 불타고 있는가? …
형태와 색채들이 불타고 있다. 눈으로 지각하는 것도, 눈과 마주치는 것도 … 
좋거나 나쁘거나 그 어느 쪽도 아닌 무엇도 불타고 있다.
무엇에 의해서 불타고 있는가? 탐욕의 불로 타고 있다.”
(「불의 설교」, 석가모니 )




〈그린 나이트〉를 읽는 가장 편리한 방법은 고대 바빌로니아의 법리를 참조하는 것이다. 눈에는 눈, 귀에는 귀. 남의 목을 잘랐다면? 너의 목을 내놓아라! 함무라비 법전에 의거하면 〈그린 나이트〉라는 난해한 텍스트는 손쉽게 요약된다: 명예에는 대가가 따른다. 즉, 공짜는 없다.

  더구나 이 영화의 원전은 기사도 문학의 정수로 꼽히는 아서왕 전설이다.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면 명예는 기사를 만든다. 명예를 구성하는 제 요소들 중 가장 중요한 덕목은 단연 용기와 신의다. 지레 겁을 집어먹고 약속을 어기는 이에게 수여할 작위는 없다. 이쯤 되니 〈그린 나이트〉를 겁쟁이에 방탕하고 좀스러운 보통의 사람이면서도 기어이 용기를 내어 약속을 지키고 만, 그리하여 명예로운 죽음을 맞이한 기사의 영전에 바치는 130분짜리의 장엄한 장송곡으로 읽고자 하는 유혹은 더욱 강렬해진다.

  그러나 원작의 가웨인 경이 유부녀의 유혹을 뿌리치고 기사의 본분을 지켜 내듯이, 우리는 간단명료한 메시지의 유혹에서 벗어나 관객의 본분을 지켜 내야 한다. 함무라비식의 완고함이나 시대 역행적인 기사도 찬양으로는 풀리지 않는 여러 의문들이 〈그린 나이트〉의 축축한 공기 속에 스며 있는 까닭이다.

  먼저 서로의 목을 건 녹색 기사와 가웨인의 내기가 정말로 공정한 내기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가웨인에게 목이 베인다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일회적 죽음을 뜻한다. 인간에게는 여분의 목숨이 없다. 삶은 동전을 넣으면 이을 수 있는 비디오 게임이 아니다. 반면 나무껍질로 뒤덮인 괴상한 몰골의 녹색 기사에게 목을 거는 것은 아무것도 걸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는 걷다가 떨어뜨린 지갑을 줍듯 느긋하게 떨어진 머리—심지어 눈도 깜빡거리는—를 들고 유유히 사라진다. 정당한 교환은 거래 당사자 양측이 서로가 제시한 것의 가치를 엇비슷하게 여길 때에나 성립하는 것이다. 녹색 기사가 뻔뻔하게 자기 머리를 주워갈 줄 알았다면 어느 간 큰 기사가 함부로 그의 목을 베었겠는가? 

  신의를 숭상하고 약속을 목숨처럼 여기는 기사도 정신에 입각하여 텍스트를 읽어도 찝찝함이 남기는 매한가지다. 우리는 녹색 기사가 가웨인의 어머니에 의해 소환되었음을 알고 있다. 가웨인의 어머니는 아들을 시험에 들게는 하지만, 죽일 생각은 없어 보인다. 가웨인에게 넌지시 길을 일러주는 여우나 눈을 가린 노파가 그의 어머니와 관련이 있음은 중첩되는 이미지와 사운드를 통해 대놓고 암시된다. 아무리 자식이 반듯하게 자라기를 바라기로서니 모가지를 내놓으라며 생떼를 쓰는 어머니는 없는 법이다.

  그런데 만일 녹색 기사(가웨인의 어머니)가 가웨인을 그냥 살려준다면, 이는 일단 서약한 것은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지켜야 한다는 기사도 정신에 위배된다. 가웨인은 녹색 기사를 베었으나 그의 도끼질은 받지 않았다. 녹색 기사가 허리띠를 푸른 가웨인의 용기를 가상히 여겨 도끼를 거뒀다는 식의 해석도 가능은 할 테지만 그러면 영화가 하고자 하는 말의 무게는 심히 가벼워진다. 말 안 듣는 아들에게 부러 엄한 표정을 짓다가 금세 귀여워하는 팔불출 어머니의 자식 교육 일지가 되고 마는 셈이다.






데이비드 로워리는 〈그린 나이트〉를 단순하게 만들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의 간명한 해석은 미뤄 두고 처음부터 다시 이 복잡한 영화에 접근해야 한다. 필름을 되감아 프롤로그로 돌아가 보자. 뻔히 아서왕 전설을 변주한 이야기를 가져다 놓고서, 로워리는 그 왕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말한다. 아서왕이 아니라 가웨인이 주인공이라는 뜻일까? 아서왕을 포함한 가웨인 이외의 전설 속 인물들이 모두 익명으로 처리된 것은 이러한 해석을 부추기는 듯도 하지만 다른 인물들의 이름을 모두 지워 버려야만 가웨인의 존재감이 부각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가웨인은 이미 원탁의 기사들 중 랜슬롯과 함께 가장 인기 있는 기사이기도 하다.

  오프닝 화면을 스쳐 지나가는 다양한 종류의 타이포그래피에 주목하자. 이는 ‘가웨인 경과 녹색 기사’ 설화에 무수한 판본이 있음을 시사하며, 이 영화는 그중 하나일 뿐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아서왕 이야기라고 다 같은 아서왕 이야기가 아니다. 다른 인물을 모두 말소하고, 가웨인의 성격마저 잘라낸 뒤에 그의 이름만 이 영화에 남겨둔 것은 다른 판본들과 구분되는 이 영화의 독립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기보다는 절대적인 원본이 있을 수 없음을 역설하려는 감독의 의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원본과 진위에 대한 로워리의 의심은 베냐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넘어 세계의 원본성까지도 의문에 붙인다.



360도 패닝 쇼트는 시간의 선후를 환기할 뿐 아니라 시간관 자체의 축을 흔든다.

  가웨인은 설화의 끝없는 변주라는 무수한 평행 우주 안에 동시에 존재한다. 로워리의 가웨인은 그중 한 명의 가웨인을 은막 위에 형상화한 것일 뿐이다. 로워리의 동시 존재론은 영화 곳곳에서 드러난다. 인형극의 원판은 순환한다. 그리고 카메라는 원판을 흉내 낸다. 숲속에 묶인 채로 버려진 가웨인을 바라보던 카메라는 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패닝한다. 움직임의 끝엔 해골이 된 가웨인이 있다. 다시 반시계 방향으로 거꾸로 돈 카메라의 앞에는 숨을 헐떡이며 발악하는 가웨인이 있다. 해골이 된 가웨인과 헐떡이는 가웨인은 같은 쇼트에 함께 존재한다. 살아 있다가도 해골이 되고 해골이었다가도 살아 숨 쉰다. 플래시포워드와 플래시백은 직선적 시간의 흐름에서는 선후의 관계를 띠지만, 순환적 시간에서 앞뒤는 확실히 구분되지 않는다. 

  성 위니프레드 시퀀스에서도 해골과 살아 있는 존재, 이 세계와 저 세계는 딱 잘라 구분되지 않는다. 성 위니프레드가 가웨인에게 전에 온 적이 없었느냐고 물어보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또 다른 시공간의 가웨인은 언젠가 위니프레드를 찾아갔을지도 모르고, 그녀를 겁탈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이 시퀀스는 ‘가웨인 경과 녹색 기사’ 설화에 없는 부분이다. 영화 전체를 두고 볼 때 독립적인 시퀀스라는 뜻이다. 이야기의 전반적인 흐름에서 불필요한 이질적인 시퀀스나 장면은 연출상의 실수가 아니라면 명확한 목적을 지닌 감독의 의도라고 봐야 할 것이다. 아마 로워리는 삶과 죽음이 똑떨어지지 않는 다층적 세계관을 통해 하나의 세계에 대한 집착, 그 세계에서도 미물에 불과한 자아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으라고 말하려는 듯하다. 다시 한번 인형극의 원판을 돌려보자. 계절은 왔다가 가고, 갔다가 온다. 녹음이 우거진 자연의 변화는 순리의 시간을 따른다. 반면 적색은 녹색의 사이사이에 잠깐씩 끼어드는 빨간불에 불과하다. 인간은 비존재의 세계에서 아주 잠깐 세계를 살다 가는 적색일 뿐이다. 장자는 아내가 죽었으면 슬퍼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친구 혜시에게 이렇게 되물었다. “사계절의 흐름과 무엇이 다른가?” 




로워리의 시간과 가웨인의 시간은 몽타주 시퀀스를 거쳐 마지막 시퀀스에서 종합된다. 그러나 곧바로 결말부로 건너뛰기 전에 우리는 다시 처음부터 영화를 돌려 봐야 한다. 로워리의 자연적 세계관이 설득력을 지니기 위해서는 가웨인의 세계관이 보다 일목요연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웨인은 어떻게 바뀌어 가며 관객은 이를 어떻게 납득할 수 있는가? 로워리는 가웨인과 녹색 기사의 대치라는 뚜렷한 도식을 바탕으로 다양한 연출 기법과 메타포를 활용하여 가웨인이 갇혀 있는, 그리고 우리가 익숙한 세계관에 서서히 균열을 일으킨다.



가웨인의 머리에는 곧 불이 붙는다


  영화의 첫 장면. 가웨인은 왕좌인 듯한 의자에 앉아 있다. 그의 머리에선 불길이 솟아오른다. 불은 상승할 뿐 하강할 줄 모른다. 카메라는 하늘을 향하는 불길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쳐든다. 

  불은 자연을 극복하려는 최초의 욕망이자 자연에 대한 두려움이 낳은 최초의 금기이다. 프로이트는 불을 지배하는 조건은 오줌을 누어 불을 끄려는 충동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불은 지옥의 형벌이자 만물에 형상을 부여하는 창조주이며, 예술가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뮤즈이자 끔찍한 파괴자이다. 가웨인을 추동하는 불길이 어느 쪽에 치우쳐 있는지는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가웨인은 하강할 줄 모르는 불꽃처럼 상승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힌, 불을 손아귀에 쥐고 지배하려 하는 인물이다. 그는 지하의 매음굴에서 우뚝 선 성—성(城)은 역시 상승의 메타포다—으로 걸어 올라가며, 녹색 기사를 찾아 떠나는 여정에서도 꾸준히 오르막길을 올라간다. 중간에 도적 일당을 만났을 때에도, 도적(배리 키오건 扮)은 가웨인에게 강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라고 말한다. (반면 나중의 성주는 똑같은 강을 끼고 ‘남쪽’으로 내려가라고 말한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슬며시 보이는 불길에 휩싸인 우측 상단의 집은 공명심에 빠져 험준한 여정에 나설 가웨인의 행보에 대한 감독의 언질인 셈이다.

  로워리의 균형 감각과 치밀함이 드러나는 부분은, 오프닝 시퀀스에서 카메라가 물러서며 집으로 들어오는 동시에 리드미컬하게 떨어지는 물방울을 배치해 놓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잠에 든 가웨인에게 에셀은 물세례를 퍼붓는다. 불과 달리 물은 낮은 곳으로 떨어진다. 상선약수. 물은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 즐거움이다. “이끼가 끼면 끼는 대로 놔두는 것”이다. 이처럼 〈그린 나이트〉는 대사, 카메라 앵글, 피사체의 움직임 등을 전부 활용하며 적색과 녹색, 상승과 하강, 욕심과 내려놓음, 인간과 자연, 거스름과 순리를 꾸준히 대비시키며 하나의 통합된 기호 체계를 만들어낸다. 불과 물의 이미지는 계속해서 변주된다. 녹색 기사가 등장할 때 불은 꺼지고, 녹색 기사가 퇴장할 때 불은 다시 붙는다. 가웨인은 올라가지만 하늘에선 눈이 계속 떨어진다. 카메라는 고개를 쳐들고 위를 보지만, 자연의 아득한 높이는 카메라의 시선에 무력감을 안긴다. 

  반대로 성 위니프레드 시퀀스에서 가웨인은 물속으로 뛰어들지만 화면에는 오히려 그가 상승하는 것처럼 보이며, 물은 곧 벌건 조명으로 물든다. 이는 가웨인이 헛되고 졸렬한 욕심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웨인은 겁탈을 피해 도망치다 목이 잘린 위니프레드에게조차 보답을 바란다. 아무런 보답을 받지 못하면서도 그가 위니프레드를 도우려는 것은 그것이 그의 무용담의 레퍼토리가 될 만한 이야깃거리였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호의를 베푸는 성주에게도 가웨인은 솔직하지 못하며, 원작과는 달리 성주의 아내의 유혹도 완전히 뿌리치지 못한다. 진정한 기사, 영웅이 되고자 하는 가웨인의 불타는 마음은 그 불길로 말미암은 공포와 회의에 잡아먹힌다. 그럼에도 그는 여우의 충고를 물리치고, 물길을 거슬러 녹색 기사의 거처로 걸어 올라간다. 영웅이 되려는 미망을 벗어던지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영웅이 될 자질이 없다. 아니, 애당초 그러한 불공정한 거래를 해놓고 맘 편히 목을 내놓을 사람은 없다. 그건 영웅적인 행위가 아니라 객기다. 진짜 영웅은 자기 스스로 되려고 되는 게 아니라 순리를 따르다 보니 어쩌다 그렇게 되는 것이다. 가웨인은 도망치는 상상을 한다. 빼앗긴 그의 말 그린셀롯이 거기 있다. 그는 말에 올라탄다. 그리고 영웅이 되어 성에 귀환하고, 왕이 되고, 애인을 버린다. 전쟁을 이끌고, 아들을 잃는다. 상상의 끝에서 그의 성은 무너지려 하고 마침내 가웨인은 복심에 감춘 녹색 허리띠를 푸른다.

  녹색 허리띠는 그의 어머니가 준 시험이다. 어머니—이때의 어머니는 자연, 즉 상징적 어머니다—는 아들에게 허리띠를 둘러주며 아들이 그 허리띠에 묶여 있는 대신 스스로 풀고 자유로워지길 바란다. 녹색 기사의 마지막 대사—Now little knight, off with your head—가 가웨인의 머리와 볼일은 끝났다는 것인지, 아니면 가웨인의 머리통을 내려치겠다는 것인지는 이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영웅이 되겠다는 욕망이 부질없음을 아는 가웨인은 더 이상 허리띠가 필요하지 않다. 내면의 불길이 이미 잔잔해졌기 때문이다. 목숨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은 생명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을 존중하는 것이다.

  타오르는 불꽃의 이미지가 생의 의지를 은유하는 것이라면, 물론 우리는 불씨를 완전히 꺼뜨려서는 안 된다. 사람은 자아에 대한 집착을 완전히 벗어던질 수 없다. 사람의 마음은 그린벨트가 될 수 없다. 그러나 불길이 지나치게 커져 자연과 자기 자신을 땔감 삼아 전부 집어삼키려 한다면, 그것은 제어할 필요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대로, ‘중용’이 중요한 것이다. 로워리가 녹색의 기사를 스크린에 소환한 것은 가웨인과 다르지 않은 인류의 오만함에 경종을 울리기 위함이었으리라.



그러나 순리와 자연스러움을 말하는 이 영화는 한편으로 지나치게 과시적이며 테크니컬하다. 로워리가 만들어낸 일련의 기호 체계는 빈틈없이 꽉 차 있어 관객은 목덜미를 내놓고 숨을 할딱거리는 가웨인처럼 범람하는 메타포와 압도적인 이미지 속에 파묻힌 채로 숨을 거칠게 몰아쉴 수밖에 없다. 뿌연 안개와 어둠침침한 밤마저도 이 영화에서는 스펙터클로 기능한다. 

  앞서 언급했던 가웨인과 그의 애인 이외에 다른 인물들의 이름을 모두 지워버린 선택도 감독의 의도와는 달리 해석되기 십상이다. 관객으로서는 〈그린 나이트〉가 하나의 가능한 세계라는 사실보다 아서왕 전설과 이 영화가 독립적인 영화라는 사실이 더 받아들이기 쉬운 까닭이다. 가웨인을 보편적 인간의 화신으로 여기려고 해도 인물의 드라마가 얕으니 스크린과 관객석의 거리감만 더 두드러진다. 

  녹색 기사를 앞세워 영웅주의와 휴머니즘을 전복하려는 〈그린 나이트〉의 기획은 되레 감독 자신의 작가적 자의식에 잡아먹히고 만 셈이다. 그마저도 적색과 녹색은 조화롭게 섞이지 못하고 이도 저도 아닌 누르스름한 빛깔을 띠는 듯하다. 결국 로워리는 가웨인에게 순리를 위반하지 말라고 하면서 정작 스스로는 액셀도 브레이크도 밟지 못하고, 정지선을 지킨 것도 아니고 재빨리 횡단보도를 지나치지도 못한 채로, 녹색의 늪지대에 멈춰 선 것이다. 이제 로워리는 자신이 소환한 녹색 기사와의 내기에 말려들 차례다. 그는 도끼를 받을 준비가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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