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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nui Oct 29. 2021

농담과 죽음의 정반합

〈아네트〉(레오 까락스, 2021)



농담과 죽음의 정반합





레오 까락스의 전작 〈홀리 모터스〉(2012)에서 극장은 숨이 멎은 장소다. 발터 벤야민이 기다렸던 능동적 비평가-관객은 여기에 없다. 매체의 보급과 수용 환경의 다변화가 산만한 관객을 낳았다는 점에서 벤야민은 옳았지만, 과잉 정신분산의 결과가 의식적인 거리두기에 기반한 비평가-관객의 도래가 아닌 까락스의 영화에 비치듯 능동적 관객의 사멸이라는 점에서 벤야민은 틀렸다. 벤야민은 예술에서 신성함을 떼어내면 새로운 예술이 태어나리라고 보았지만 이는 현대인의 오만이다. 아우라에 대한 상상력과 몰입이 선사하는 도취가 전혀 없다면 예술은 존재할 수 없다. 집중력이 과도하게 흐트러진 오늘날 관객들은 망각의 의자에 붙들린 테세우스처럼 좌석에 고정된 채로 얌전히 앉아 러닝타임이 끝나기만을 쥐 죽은 듯 기다릴 따름이다. 되감기와 빨리 감기에 익숙해진 관객들은 극장의 신성함을 미심쩍어 한다. 영화의 가치는 오로지 오락성과 간편한 휴머니즘에 있다고 믿는 이들에게 〈홀리 모터스〉 같은 영화는 끔찍하게 지루한 고문 도구거나, 달콤한 자장가일 뿐이다.

    뤼미에르 형제에 의해 세상에 강림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말뜻대로 '기계장치 신'으로서의 영화-열차가 운행을 멈춘 곳에는 폐차를 걱정하는 영화-리무진들이 줄지어 있다. 육체성을 잃어버린 영화의 죽음을 경계하는 레오 까락스는 서사 장르의 무덤에서 그리 낯설지 않은 옛된 가능성을 길어올린다. 드니 라방의 몸을 빌려 영화-리무진을 탄 까락스는 기원으로 돌아가려 한다. 이미지의 운동성을 되찾을 것. 어떤 이미지에서부터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다는 까락스에게 이미지의 운동은 변신에 맞먹는 신비로움이며 서사의 인과적 사슬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 마법적인 순간을 담보하는 보물이다. 까락스의 관심사는 운동을 통한 영화-모터의 재가동에 있었다. 말하자면 〈홀리 모터스〉는 제세동기로서의 영화다. 물론 심폐 소생술이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네트〉의 오프닝 시퀀스는 영화적 디제시스의 바깥에 자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네트〉는 과작을 하다 못해 자신을 영화감독으로 여기지도 않는다는 까락스의 여섯 번째 장편영화다. 9년 만에 돌아온 그의 시선은 극장도 주차장도 아닌 다른 곳에 닿아 있다. 이번에도 그는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만 전작과는 사뭇 결이 다르다. 〈홀리 모터스〉가 이미지의 운동을 통해 영화를 탐구하는 영화였다면 〈아네트〉는 이미지와 음악, 서사 등 영화 안팎의 장치를 모두 활용하여 예술과 삶을 돌아보는 영화다. 까락스와 그의 딸 나스탸는 전작에서도 함께 출연하는 만큼 둘의 등장이 색다른 시도는 아니지만, 〈아네트〉에서는 자전적 모티프가 훨씬 뚜렷해졌다. 〈홀리 모터스〉에서 서사를 사실상 포기했던 까락스는 〈아네트〉에서 아주 간명한 형태로 서사를 되살린다(그는 “좋은 아빠가 되고 싶은 나쁜 아빠의 이야기”로 〈아네트〉를 요약한다). 이미지와 음악, 영화적 디제시스 바깥을 환기하는 까락스의 연출은 〈아네트〉의 단순한 이야기를 감각적으로 제시한다. 〈아네트〉의 음악들은 매우 단순한 가사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단순한 가사의 반복은 마치 마술적 주문(呪文)과 같은 효과를 내며 이야기를 지루하게 만들기보단 이야기의 본질과 영화의 감각적인 수용에 관객이 집중하게끔 돕는다.

    〈아네트〉는 딸에게 충실하지 못했던 과거를 반성하는 동시에 저급한 예술과 고상한 예술, 나아가 예술과 삶의 관계를 따져 묻는 영화이기도 하다. 〈아네트〉의 오프닝 시퀀스는 영화 속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까락스와 나스탸, 스파크스의 마엘 형제, 영화의 주연 배우인 아담 드라이버, 마리옹 꼬띠아르, 사이먼 헬버그가 차례로 나타나 노래를 부르며 LA의 밤거리를 활보한다. 노래가 끝나자 아담 드라이버는 오토바이를 타고 거리를 떠난다. 마리옹 꼬띠아르는 차를 타고 아담 드라이버와 다른 방향으로 떠난다. 그들은 다른 교통수단을 타고 반대로 향하지만 같은 세계에서 만나게 된다. 아담 드라이버가 연기한 헨리 맥헨리는 저급한 농담과 과장된 액션을 구사하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이다. 그가 죽는 척을 해도 사람들은 깜짝 놀랄 뿐 카타르시스를 느끼진 않는다. 반면 마리옹 꼬띠아르가 연기한 안(Ann)은 매일 무대 위에서 관객을 대신하여 극적인 죽음을 재현하는 고상한 소프라노다.

    헨리와 안은 예술가로서 까락스가 갖고 있는 두 가지 자아일 테다. 까락스는 “죽지 않고 진실을 이야기하는” 저급한 헨리이기도 하며, “매일 죽음을 재현하는” 고상한 안이기도 하다. 그들은 서로에게 매혹되지만 관계가 진전될수록 저급 예술은 고급 예술에 대한 사랑을 잃고 냉소에 빠진다. 헨리는 결국 관계 회복을 위해 떠난 요트 여행에서 안을 죽이고 만다. 해당 장면은 바다에서 촬영하지 않았는데 까락스는 이를 굳이 숨기려 하지 않는다. 고급 예술은 관객을 대신해 죽기를 마다하지 않으며, 죽음을 통해 관객을 구원하고자 하고, 그러기 위해선 관객을 몰입시켜야 한다. 이야기와 배경은 사실적이거나, 사실적이지 않다면 적어도 관객의 눈에는 티 나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까락스에게 예술의 대리 죽음은 숭고한 희생이 아닌 같잖은 기만에 불과하다. 따라서 헨리는 살아남을 수밖에 없고 안은 죽어야만 한다. 죽지 않고서도 진실을 말하려는 헨리에게서 반(反) 서사적이고 시니컬한 영화였던 〈홀리 모터스〉를 촬영할 당시의 레오 까락스를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안(Ann)은 순순히 죽지 않는다. 까락스가 〈홀리 모터스〉에서 포기했던 전통적 이야기를 〈아네트〉에 이르러서 복원하였듯, 안은 딸 아네트(Annette)의 목소리에 실려 귀환한다. 까락스는 서사를 버리고 예술을 비웃으려 했지만 실패하고 〈아네트〉로 돌아왔다. 아이러니하게도 관습적인 예술을 전복하는 영화인 〈홀리 모터스〉는 대중과는 철저히 유리된 영화다. 일반 관객들은 까락스의 비웃음을 자신들에 대한 조롱으로 받아들인다. 관객들은 어려운 영화를 만드는 까락스를 사랑하지 않는다. 예술과 인정욕구에 사로잡힌 예술가는 아내와 딸을 사랑할 수조차 없다는 사실이 서글픔을 곱절로 더한다. 아버지에게 딸은 고급 예술의 계승자로서 자신의 결핍을 보충하는 꼭두각시일 뿐이다.




까락스와 까락스의 딸



지휘자는 고급 예술을 연모한다. 그는 헨리가 아네트를 함부로 다뤄선 안 된다고 경고한다. 그러나 헨리는 삶과 예술을 중재하려는 지휘자마저 살해하고, 아네트의 공개적인 폭로 이후에야 삶에서 너무 멀리 떠나온 지난날을 후회한다. 헨리는 삶에서 떨어진 곳에는 예술도 사랑도 있을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제서야 아네트는 목각 인형에서 살갗을 지닌 사람이 된다. 헨리는 자신이 범한 과오를 용서받을 수 없다. 그러나 까락스에게는 나스탸가 있고, 〈아네트〉가 있다.

  〈아네트〉는 깜깜한 화면으로 시작한다. 진행자는 관객에게 “숨도 쉬지 말고 박수도 치지 말고 생각은 머릿속으로만 하라”고 요구한다. 헨리의 스탠드업 코미디보다는 안의 오페라 공연에 적합한 관람 태도다. 까락스는 예술의 꼿꼿함이 싫었고 그래서 안을 죽였다. 하지만 반(反) 예술도 꼿꼿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결국 〈아네트〉는 까락스와 나스탸, 코러스와 배우들이 한데 어우러져 걸어오며 노래하는 쿠키 영상으로 마무리된다. 고상한 죽음이냐 저급한 농담이냐는 더 이상 까락스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는 단지 관객들이 영화를 보며 숨을 쉬고 슬퍼하고 박수도 치기를 바라는 것 같다. 비록 성공 여부를 장담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까락스에게 영화란 그런 것이다. 아마 앞으로도 까락스는 코미디도 오페라도 아닌, 록 오페라 같은 영화를 찍지 않을까. 아니면 아예 찍지 않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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