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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nui Jan 18. 2022

달아나는 기억의 빈자리를 그대는  바라볼 수 있나요

〈드라이브 마이 카〉(하마구치 류스케, 2021)

https://www.youtube.com/watch?v=0wlXaHmmOVc

나얼 - 기억의 빈자리 / 〈아사코〉의 카라타 에리카도 나온다

※노래가 너무 뜨거워서 글을 읽을 땐 되도록 감상하지 않아주시면 감사하겠다.






달아나는 기억의 빈자리를 그대는 바라볼 수 있나요 (나얼 노래 中)



극장에서 L과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를 보았다. 크리스마스 다음 날이었다. L은 영화 시간이 다 되어서야 가까스로 극장에 도착했다. 안색이 창백한 L에게 미리 사놓은 생수를 건넸다.

    택시를 타고 온 L은 멀미일 뿐이니 영화를 보다 보면 괜찮아질 거라고 했다. L이 걱정됐지만 일단 자리를 찾아 앉았다. 광고가 끝나고 영화가 시작되려는데 뜻밖의 문제가 생겼다. 앞자리에 앉은 남자의 불룩 솟은 뒤통수가 L의 시야를 가렸다. 나는 L과 자리를 바꿔주었다. 그런데 조금 뒤 남자가 L의 앞자리로 자리를 옮겼다. 원래 앉았던 자리가 불편한 모양이었다. 이미 영화가 한창이라 다시 자리를 바꾸기도 뭐해서 그대로 내리 세 시간 동안 영화를 봤다. L의 머리는 세 시간 내내 갸우뚱했다. L 자신은 불편했겠지만 L의 갸우뚱함은 너무나 귀여웠다.

    영화가 끝나고 L과 푸드코트에서 면 요리를 먹었다. 서점에도 들렀다. L은 그간 내가 알고 지내던 사람 중 영화를 가장 좋아하는 여자였지만 책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다. 우리는 류스케 영화의 원작인 하루키의 소설집을 잠깐 뒤적거리다가 서점을 나와 카페에 갔다. L은 디카페인 음료를 시켰다. 카페인이나 알코올 같은 성분에 매우 취약하다고 했다. 왠지 모르게 L다웠다. 나는 처음 보는 이름의 차를 마셨다. 맛이 나쁘지 않았다.

    L은 이유를 캐묻는 버릇이 있었다. 악의 없는 호기심이었지만 때때로 대답하기 곤란했다. L은 또 즉석에서 삼행시 짓는 걸 좋아했다. 순발력이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내게도 삼행시를 지어 보라고 해서 진땀을 뺐다. 나는 순발력이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다.

    음료를 마시며 계속 영화 얘기를 나눴다. 그 밖의 다른 이야기들도. L과 얘기하는 건 즐거웠다. 아마 내가 긴장하지만 않았다면 훨씬 즐거웠을 것이다. L은  본인을 숨길 줄 몰랐다. 스스로는 그런 점을 고치고 싶다고 했지만 나는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L의 표정은 그러나 본인을 숨기는 데에 누구보다 능숙한 연기자 못지않게 다채로워서 가만 지켜보기만 해도 재미가 있었다. 가식 없는 풍부한 표정과 특유의 살짝 과장된, 그렇지만 결코 과하지 않은 제스처가 L의 매력이었다. 이런 비언어적인 요소들이 언어가 전해줄 수 없는 것들을 전해주기도 한다는 걸 새삼스레 깨달았다. 그러자 영화 속 유나와 L이 겹쳐 보였다. L이 틀림없이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을 거라고 확신했다. 사실 L을 아는 사람은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L은 그런 여자였다.


그게 L과의 두 번째 만남이었다. L과는 그뒤로 두어 번 더 만났다. 지금은 만나지 않는다.






며칠 전부터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에 대한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몇 번이나 도입부를 다시 썼다가 지웠다. 스티븐 소더버그의 영화와 연결지어서 써 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초고의 제목은 '섹스, 자동차, 그리고 카세트테이프'였다). 자동차에 좀 더 초점을 맞춘 글을 쓰려고도 했지만 그건 아예 따로 쓰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어릴 적의 개인적인 기억과 마주하는 글을 쓰고도 싶었지만 단편적인 인상 외엔 영화와 이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래도 〈드라이브 마이 카〉에 관한 글은 어떻게든 쓰고 싶었다. 아무것도 쓰지 않기엔 너무 인상적인 영화였다. L과는 무관한 작업이지만 완전히 무관하다고도 할 수 없다. 어떤 영화에 대한 기억은 그 영화의 내용에 관한 것만이 아니다. 영화를 본 장소, 같이 본 사람, 극장의 공기, 영화를 보고 집에 가는 길의 습도와 온도, 뜻밖의 사건이나 왜곡된 이미지들, 곁눈질들, 고요 속의 부스럭거림, 잊은 줄 알았던 기억들, 상념들--이런 것들이 모여 영화-기억을 구성한다. 그러므로 영화에 관한 글이나 비평이 굳이 그 영화에 관한 것이어야만 할 까닭은 없다. 영화가 촉매라면 글은 촉수다. 그러나 흐물흐물하고 가녀린 촉수다. 나는 흐물흐물한 촉수를 뻗어 기억의 스크린을 더듬는다. 은막은 미끄러워서 잘도 촉수를 미끄러뜨린다. 나는 감각이 마비된 촉각이다. L은 불면증의 촉진제다.


*


그래서 당신이 L—가상의 인물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과 영화를 보았다는 것이 어쨌다는 것이냐, 하는 반문에 대답할 차례다. 내 목적은 어쨌거나 〈드라이브 마이 카〉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이지 일기나 픽션을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물론 모든 글은 일기이거나 픽션이거나 둘 다지만). 앞서도 말했듯이 상대가 이유를 캐물어 오면 악의가 있건 없건 간에 대답하는 사람은 곤란함에 얼버무리기 십상이다.


    가능한 답변을 머릿속에서 열심히 궁굴려 본다. 먼저 하나를 꼽자면 이 영화가 상징적 이야기들을 통해 굴러가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가 쓴 도입부는 〈드라이브 마이 카〉에 겹쳐지는 또 다른 상징적 이야기일 수도 있다. 원작이 된 동명의 소설뿐만 아니라 소설집에 같이 수록된 다른 단편들, 체호프와 베케트의 희곡까지 아우르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상술한 이야기가 이 리스트에 더해질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음으로 짚어볼 것은 두 사람의 관계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과 관계를 맺고, 그렇게 맺어진 관계에 구속당하고, 관계에 구속당한 사람이 또 다른 구속당한 사람과 뜻밖의 관계를 맺고, 그와의 동행을 통해 서로의 구속구을 벗고 새로운 세계로 이행하는 영화다. 그리고 이행의 전제는 은폐된/한 기억과의 진솔한 대면이다. '나'가 L의 기억을 최대한 자세히 떠올리는 것은 어쩌면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끝으로 몇 가지 뜻밖의 일들과 영화의 테마를 묶어볼 수도 있다. 예컨대 자막을 가리는 남자의 뒤통수는 배우들이 서로 다른 나라의 말로, 말의 내용이 아니라 제스처와 분위기로 대사를 주고받는 극중극을 떠올리게끔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또... 말을 갖다붙이는 건 이 정도면 됐다. 이 글은 〈드라이브 마이 카〉에 대한 글이 아닐 수도 있지만 여전히 어떤 의미에서는 〈드라이브 마이 카〉에 관한 글이다.





칠성장어


하마구치 류스케가 이 작품에서 택하는 화법은 매우 직설적이다. 하고 싶은 말이 분명하다 못해 노골적이기까지 하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크게 두 축으로 구성된다. 영화의 디제시스를 구성하는 큰 줄기는 하루키의 소설들에 기대고 있다. 동명의 원작 소설에서 전반적인 설정과 인물들을 빌려 왔고, ‘천일야화’에서 모티프를 따온 「셰에라자드」—개인적으로 해당 소설집에서 「독립기관」과 더불어 가장 오래 기억되는 단편 중 하나였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독립기관」은 류스케 영화에는 반영되지 않은 것 같다—를 통해 이야기를 중층적으로 구조화한다. 여기에 극중극으로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가 끼어든다. 「바냐 아저씨」는 극중 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무대에서 상징적으로 재현하며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돌아보도록 하는 한편, 영화관의 객석을 향해 되비치기도 하는 일종의 거울-렌즈로 기능한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관객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쏟아지는 눈부신 햇빛을 등지고 헐떡이는 아내 오토다. 역광이 심해 오토의 나신이나 표정은 선명히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비가시성은 가후쿠와 오토의 정사에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 그렇기는커녕 눈을 가리는 행위가 오히려 흥분제가 되는지도 모른다. 전생에 칠성장어였던 소녀가 짝사랑하는 소년이 없는 집에 몰래 침입하여 자위를 하듯 가후쿠와 오토의 성적 흥분은 가시성이 아닌 비가시성에 의존한다. 가후쿠는 오토를 보지 않더라도 발기할 수 있고, 오토는 가후쿠를 보지 않더라도 오르가즘을 느낄 수 있다. 현전하는 감각의 깨어남이 아니라 잔존하는 기억 속으로 침전하는 그들의 정사는 다른 물고기의 몸에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피를 빨아먹는 칠성장어를 닮았다. (참고로 칠성장어는 바다나 바다 근처의 담수에서 살다가 산란기인 3~6월 사이에 하천 상류로 거슬러 올라간다. 암컷은 하천 바닥의 바위나 자갈에 떨어지지 않는 점착성의 알을 붙여놓고 죽는다. 오토는 가후쿠의 기억에 눌어붙은 채로 급작스럽게 죽는다.)

    가후쿠와 오토의 신체에—그리고 관객의 뇌리에—드리운 수수께끼와 같은 희미한 그림자는 그들이 마주 보기를 외면해온 진실과 관련되어 있다. 그들은 자식을 잃은 아픔을 공유한다. 그 아픔은 타인과 공유 불가능한, 오로지 단 둘이서만 나눌 수 있는 아픔이다. 아픔은 그러나 단순히 지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관계가 지속되게끔 하는 연결 고리이기도 하다. 그림자의 정체는 그들의 관계에 깊이 패어 있는 지워지지 않는 흉터다.

    이때 섹스는 양가적인 의미를 지닌다. 고통의 망각도, 고통에의 흡착도 섹스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가후쿠와 오토의 차이라면 가후쿠는 고통에 더 열렬히 동화됨으로써 고통을 이해하지 않기를 바랐고, 오토는 고통의 망각을 통해 거기서 벗어나려 했다. 가후쿠가 여자들과 가벼운 섹스를 하지 않는 것과 오토가 다른 남자들과 아무렇지도 않게 섹스를 하는 것은 모두 흉터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기 위함이며, 가후쿠를 사랑한다면서도 바람을 피우는 오토의 이중성에는 미사키의 말처럼 아무런 모순도 없다.

    물론 오르가즘은 순간이고 망각은 지속될 수 없다. 흉터는 흉터인 채로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남아 있다. 가후쿠는 이를 끝까지 외면하려 한다. 아내의 불륜을 못 본 체하는 것이 가후쿠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자기 보호다. 부부의 오래된 자동차—사브900—는 그들을 보호하는 껍질이다. 이를테면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섹스는 기억을 잊기 위한 의식이고 그러나 실패한 의식이며 자동차는 외부와 단절된 자폐적 우주인 셈이다.

    영화 전반부 내내 카메라는 가후쿠의 빨간 자동차를 익스트림롱쇼트와 부감으로 잡는다. 주로 겨울의 풍경으로 구성된 광막하고 쓸쓸한 프레임 안에 점처럼 박힌 자동차는 좀처럼 화면 바깥으로 벗어나거나 이행하지 못한다. 가후쿠의 자동차는 운동성을 빼앗긴 말 그대로의 ‘자동’차다. 오로지 오토Oto—오토auto는 자동차이며 자동기술법으로 작성한 텍스트다. 자동성은 수동성의 유의어다—에게만 허용되는 운전석에서 가후쿠는 오토의 목소리와 일체가 되어 존재를 망각하고 시트에 안주한다. 안주는 이동의 포기다. 가후쿠는 오로지 현재에, 보다 적확히 말하자면 시간이 아예 무화된 자폐적 우주에 머무르고 싶다. 지나온 경로는 아픔이 뿌려진 가시밭길이기에 가후쿠는 되돌아보고 싶지 않다. 되돌아봄 없는 나아감은 가능하지 않다. 가후쿠는 빨갛게 칠해진 거짓말에 갇혀 무중력을 유영하는 어항 속 물고기다.





    뜻밖의 사건이 가후쿠로 하여금 운전대를 내어주게 한다. 그가 연출하기로 한 연극 탓이다. 운전수로 배정된 미사키는 가후쿠와 마찬가지로 과거에 구속되어 있는 사람이다. 미사키는 엄마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홋카이도를 떠난 것이 아니라 그저 발길 닿는 대로 오다 보니 히로시마였다. 미사키는 가후쿠가 존재를 잊어버리게 할 정도로 운전 실력이 출중하다. 가후쿠는 미사키에게 운전석을 내어주고서도 이전과 달라진 게 없다고 믿으려 하지만, 기실 그의 자동차를 인도하는 수동성은 이미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 카세트테이프에 갇혀 무한히 반복되는 오토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은 이제 가후쿠뿐만이 아니다. 미사키나 다카츠키, 그리고 유나 부부 등과의 우연한 얽힘은 한 번 시작된 이상 되돌릴 수 없다. 불가피한 경로로 진입하는 자동차의 수동성은 삶의 근본 조건을 새삼 환기한다.  

    삶이 그저 주어진 것이라면, 그리고 그렇게 주어진 삶이 고통으로 가득한 것이라면,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드라이브 마이 카〉는 이제는 별로 새롭지도 않은 낡은 실존주의의 테제에 관한 하마구치 류스케의 세 시간짜리 대답이다. 그리고 류스케의 답변도 이제는 별로 새롭지 않은 낡은 상투어일 뿐이다. 그럼에도 살아가야 한다. 인생이 아무리 당신을 괴롭힐지라도, 그래도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류스케가 취하는 직설적인 화법은 언뜻 촌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드라이브 마이 카〉가 과하게 힘을 준 영화라는 일각의 비판은 사실 꽤 수긍할 만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의 꽉 짜인 부자연스러움이 관객에게 믿음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일차적으로 미사키 역의 미우라 토코를 비롯한 배우들의 공헌일 것이며, 유나-소냐와 재니스-엘레나의 리허설 장면에서처럼 무언가 일어나는 순간이 이 영화에도 정말 존재한다면 배우들의 연기를 디렉팅한 류스케의 지분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극중 가후쿠가 배우들에게 요구하는 대본 리딩 방식—감정을 배제하는—이 류스케의 그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이 영화가 자아내는 감동의 성격에 관한 그럴듯한 부연 설명이 된다. 유나-소냐가 가후쿠-바냐 아저씨를 끌어안고 그래도 살아야 한다고 되뇌는 장면에서 상당수 관객들이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러한 작위성을 감추지 않고 몇 번이고 강조하는 류스케의 화법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어 보고 싶은 어떠한 결연함이 느껴지는 까닭이 아닐까.

    실존에 관한 까다로운 물음에는 원리상 완벽한 대답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질문들을 맞닥뜨릴 때 곤란해지는 것이다. 이런 질문에 관한 답변이 얼마나 믿음직하느냐는 말의 내용이 아닌, 언어로 전부 환원할 수 없는 화자의 태도에 근거한다.

    지워지지 않는 흉터, 묻어버렸다고 생각한 과거의 기억, 두 사람의 관계와 그 균열을 류스케는 어물쩍 다루고 넘어가려 하지 않는다. 류스케는 상실의 상실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어떤 흉터는 지워지지 않는다. 지울 수 없다면 인정하는 것밖에 도리가 없다. 프로이트에게 애도는 상실의 대상을 잊는 회복의 여정이다. 그러나 데리다는 프로이트를 비틀어 “애도의 성공은 실패이고, 애도의 실패는 성공”이라고 말한다. 데리다에게 애도는 회복될 수 없음에 대한 시인, 상실을 상실로 받아들이는 능동적 수용이다. 류스케가 상실을 다루는 태도는 프로이트보단 데리다에 가깝다.

    류스케를 진정으로 미더운 예술가로 만드는 것은, 그가 단지 불가능을 시인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과 무력함을 구분할 줄 안다는 점이다. 가후쿠가 연출하는 다언극은 소통의 불가능을 인정하되 포기하지 않는 작업이다. 언어는 의미를 타고 끝없이 미끄러진다. 한국어와 일본어, 광둥어와 수어가 사방에서 빗발침에도 하마구치 류스케는 자막을 달아주지 않는다. 가후쿠의 리허설에서 중요한 것은 정보의 교환에 근거하는 피상적 소통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려는 진지함이며 연극은 그러한 가후쿠/류스케의 태도를 현시하는 장으로서 기능한다.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소통을 하려 하며, 그 부단한 시도 가운데 비록 완벽한 소통은 아닐지라도 서로 무언가를 공유하는 순간이 나타나는 것이다.








잊지 못할 시퀀스. 빨간 사브900이 새하얀 설국으로 이동하는 장면. 차를 뒤따라가는 카메라와 좌우로 끝없이 뒤쳐지는 도로의 기둥들. 과거로 빨려들어가는 미사키와 가후쿠는 운전석과 조수석에 나란히 앉아 있다. 그리고 잠깐의 뮤트. 이어지는 씬에서 그들은 드디어 하나의 쇼트 안에서 포옹한다. 돌아오는 길에는 폐쇄된 우주의 뚜껑을 열고 머리 위로 향을 피운다.

    하마구치 류스케에게 영화는—물질적 의미에서건 상징적 의미에서건—카세트테이프와 다름없는 것이고 그러나 그것은 자기 안에 갇힌 폐쇄적 우주가 아니라 이해의 불능을 시인하는 끄덕거림이며, 닿지 못하지만 중얼거리는 중얼거림이고 모순조차 끌어안으려는 몸부림의 제스처이다(가 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영화는, 백미러를 마주볼 수 있는 용기다.






(언젠가의 기억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라디오를 틀지 않았다. 시트에 몸을 파묻은 채 오랫동안 가만히 앉아 드나드는 차들을 바라봤다. 지하주차장에서 시간은 느리게 흐르거나 아예 흐르지 않는다. 난 자리와 든 자리를 따져 보며 하늘의 채도와 명도를 대충 가늠할 뿐이었다. 주차장은 점점 비어갔다. 나는 까닭 모를 조급함을 느꼈다. 시동을 걸기 위해 차 키를 꽂았다. 단번에 걸리지 않는 것이 아무래도 엔진이 얼어붙은 모양이다. 잠시 뒤 시동이 걸렸다. 오래된 차 특유의 덜컹거림에 온몸이 진동했다. 라디오를 틀려다가 그만두고 카세트테이프를 틀었다. 테이프 리코더는 비어 있었다. 휑뎅그렁한 조수석처럼.


그것으로도 괜찮았다. 내일은 다른 영화를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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