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17>, 순진하고 의뭉스러운

〈미키17〉(2025) - 봉준호

by Ennui



봉준호는 순진하다. 엄청나게 간단명료하고 상당히 긍정적이다. 푸근한 외모에서부터 드러나지 않나. 예술계나 인문학 종사자들—이른바 거장 취급받는 이들일수록 더더욱—의 천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꼬임과 냉소가 봉준호에게는 없어 보인다. 그렇기에 비평적으로 성공한 예술가들 가운데 가장 대중적인 호소력을 지닌 것이다.


물론 이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진술이다. 봉준호의 순진함은—지금은 인터넷 밈이 되어 버린—네이버 영화 리뷰에 달렸던 한 유저의 (프)리뷰가 보여주는 순진함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도 사람이라구요, 사람! 기생충이 아니란 말입니다!”) 봉준호가 순진하다면, 심지어 이제는 대중에게조차도 비웃음을 사는 상업영화 특유의 천진난만함과는 다른 의미에서다.



봉준호는 ‘엉큼하게’ 순진하다. 초기 단편 <지리멸렬>이나 비평적으로 호평 받은 <마더>에 스며 있는 꿉꿉함을 상기하자. 그가 내내 천착해 온 사회에 대한 반감, 그리고 종종 그러한 적의까지도 겨냥하는 듯한 은근한 조소에는 분명 순진하다고 볼 수만은 없는 구석이 있다. 봉준호의 순진함은 단순한 비판의식에도 순전한 낙관주의에도 기대고 있지 않다. 봉준호에게는 아주 약간 의뭉스러운 구석이 있다. 단순한 비판의식이나 순전한 낙관주의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게 환원되지는 않는 여분이.


그는 톨스토이의 법칙—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에서 영리하게 비껴 서 있다. 한 비평가의 코멘트처럼, 그의 영화에서는 불행한 상황에 처한 가족들조차 나름의 방식대로 행복해 보인다. 이렇게 보면 <괴물>은 그러한 순진함을 한껏 밀어붙여 성공한 영화인 셈이다. 한편 <기생충>은 파국을 맞이한 뒤에도 순진함을 억지로 연장하고 가장함으로써 아이러니를 극대화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우는 기택을 구출할 수 없다. 합법적으로든 불법적으로든.





<미키17>은 그래서 조금 당황스럽다. 필모그래피 중에서도 가장 천진난만해 보이는 탓이다. 어쩌면 평자들이 지적하듯이 철저히 로컬적인 봉준호의 감수성이 할리우드 거대 자본으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빚어진 열화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나는 이 영화가 지극히 평범하다고 생각한다. 던져 놓은 문제에 비해 풀어 나가는 방식이 너무나도 유치하지 않나.


하지만 ‘순진’하게 혹평하려니 왠지 혀끝에 남는 미묘한 거스러미가 하나 있다. 나샤는 미키의 연인인가 착취자인가 하는 의문이다. 일단 선내 엘리트 요원이면서도 최하층 계급인 미키와 사귀게 되었다는 설정 자체가—로버트 패틴슨의 와꾸를 고려하면 납득 못 할 바는 아니나—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계급을 초월하는 사랑? 봉준호가 그런 멜로드라마를 전파할 만큼 순진한 사람이었던가? 기우와 다혜는 시계 방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영화 중반, 미키가 ‘멀티플’로 존재하게 되었을 때 나샤가 보여주는 반응은 매우 기괴하다. 계급의 장벽을 떠나, 매번 소모품처럼 죽어 나가고 새로 프린트되는 ‘인간’과 연인으로 지낸다는 것부터 꽤나 변태적인 취향 아닌가? 더 나아가, 미키17과 미키18 사이에 벌어진 변이는 돌발적인 것이었을까? 어쩌면 그 이전의 미키들도 모두 조금씩 다르지 않았을까? 정말로 벽돌 속에 미키의 원본 같은 게 존재하는 것일까?


우리는 오히려 나샤보다 카이를 선망하게 된다. 섹시하고 ‘순수’하고 ‘우수’한 백인 여성인 카이야말로 미키에게 잘 맞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대중영화의 여자 주인공이 아닌가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카이는 중반부터 얼굴조차 제대로 내비치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야 레즈비언 커플로서 결혼식 들러리처럼 스치듯 등장할 따름이다. 반면 나샤는 일련의 내레이션과 몽타주 쇼트, 사건들에 의해서 든든한 애인이자 정치적 리더로서 격상된다. 복수의 미키를 마음껏 착취하던 나샤가 인간의 고유성을 옹호하고, 마침내 미키가 인간-프린터를 폭발시키도록 허용할 때, 거기에는 마냥 순진하다고 볼 수 없는 뒷맛이 남는다(뜬금없이 끼어드는 미키의 악몽 시퀀스도 이를 암시하고 있다). 기술-유토피아의 첨병이자 진보 엘리트라는 나샤의 위치를 고려하면 더더욱.


결국 <미키17>은 한 가지 의문을 남긴다. 트럼프 시대를 정면으로 겨냥하는 듯한 이 영화는 흑인/여성/아시안/레즈비언의 시대를 낙관하는가? 이 시대는 백인을 소거하거나(카이) 서로 싸우게끔 부추기고 폭사시키거나(마샬과 일파, 미키18) 입맛에 맞게끔 순화하는(미키17) 방식으로 또 다른 유토피아의 건설—그리고 배제의 논리—을 향해 나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그들은 또 다른 피로 만든 소스의 풍미를 즐기며 날것의 피맛을 중화시키려고 들지 않을까?


우리에게 희망은 있는가? 미키17의 죄책감은 극복될 수 있을까? 우리는 행복할 수 있을까?


봉준호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최악으로 순진하지는 않은 것 같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