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본 미치광이 삐에로

장뤽 고다르 - Pierrot le fou, 1965

by Ennui


대낮에 살인하는 꿈을 꾼 것 같았다. 경찰들은 쫓아오지 않았다. 너무 멀리서 너무 느렸다. 여자는 총을 쏘았다. 사람들은 케첩 같은 피를 흘렸다. 삐에로는 흔적 없이 사라졌다. 깊은 잠은 아니고 백일몽이었다. 낮은 아니고 밤이었다.

몇 년 만에 삐에로를 다시 봤다. 당시에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미치광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아주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스펠링 순서대로 화면에 떠오르는 타이포그래피부터 다이너마이트에 불을 붙이자마자 당황하는 페르디낭의 폭발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의 장면들은 대부분 잊어버렸지만.)

눈을 뜨면서 생각했다. 영화를 이렇게도 찍을 수 있구나. 이런 것도 영화구나. 어찌 보면 아무것도 몰라서 더 잘 볼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


지금 보니 감동이 예전 같진 않다. 저번에는 노트북으로, 이번에는 극장에서 봤는데도. 그렇다고 이 영화가 덜 좋아졌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냥 예전에 정말로 좋아하던 여자와 오랜만에 마주친 기분이라고 할까. 나는 그런 걸 덜 좋아졌다고 말하진 않는다.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탓인지 덕인지, 이제는 이 영화의 구성 요소들을 나름대로 이해의 틀 안에서 구조화할 수 있게 됐다. 이를테면 할리우드 범죄영화와 멜로드라마의 상투성에 대한 총체적인 패러디라는 식으로.

대사와 장면의 느닷없는 전환, 폭력과 감정의 건조한 연출, 뚝 끊어지거나 화면과 미묘한 불협화음을 이루는 음악과 음향, 산문이라기보단 시적인 단상, 예술가적 자의식과 갱스터적 생명력… 저마다의 논리와 에너지를 뿜어내는 모든 요소들이 우리가 지금까지도 굳건히 믿고 있는 ‘영화’의 감동에 대한 시니컬한 코멘트로 기능한다.

“영화란… 사랑, 증오, 행동, 폭력, 죽음… 한마디로 감정”이라는 새뮤얼 풀러의 대사는 사실 모든 영화에 들어맞는 정식이지만, 그것이 할리우드영화에서 구현되는 모습과 고다르의 영화에서 자의식적으로 언급되고 재구성되는 양상은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고다르는 보통의 영화가 자아내는 감정을 장식적인 거짓으로 보이게끔 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가 패러디하는 대상은 우리들의 상투성 그 자체이며, 패러디의 목적은 단순히 기발한 재치를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상투성을 조롱하는 데 있다. 쓸데없이 심각하고 지나치게 꼬여 있는 자기 자신도 한꺼번에 비웃으면서.



*


이러나저러나 별로 감동적인 일은 아니다. 이해하게 되면 별것 아니게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술의 해석학이 아니라 예술의 성애학…인가?

이제 보니 조금 유치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여전히 모종의 여분이 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이나 의식. 광적으로 들끓는 생각. 증발하는 기분. 기화하는 태도. 이 이상 자세히 부연할 필요는 없다. 그냥 이 영화의 방식대로 부러 조금 시적인 척해 보자.

아무튼 나는 이런 스타일이 좋다. 유치하거나 세련되거나.




P. S. 전위예술에 대한 짧은 코멘트: 어떤 전위는 한때 미래를 꿈꾸었던 과거로 낡아버리지만, 어떤 전위는 과거에 남아 있는 미래의 보고가 된다. 이 영화는 후자일 것이다. 예술이 새로움을 재발명해야 하는 순간마다 뒤돌아보게 되는 과거. 아,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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