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정연처럼 쓰고 싶다. 처음 그의 글을 읽었을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다. 주말 저녁이었고, 나는 도서관 서가 한 편에 놓인 등받이 없는 소파에 불편하게 수그리고 앉은 채 오한기의 소설집을 마저 읽고 있었다.
마저 읽고 있었다는 건 이런 얘기다. 여느 때처럼 다 읽지도 못할 책을 잔뜩 빌려 온 탓에 책의 뒷부분을 모두 읽지 못했고, 그냥 반납하기에는 오한기의 소설이 너무 재미있었으며, 그러다가 금정연의 해설 같지 않은 해설까지 모조리 읽어 버리고 말았다는…
오한기는 한국 문학의 김기덕이다, 오한기는 범죄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다, 어쩌고 저쩌고...
그로부터 몇 년이 흘렀다. 아직도 나는 금정연처럼 쓰지 못한다. (사실 별달리 의식적으로 노력하지도 않았다…) 그가 글을 어떻게 쓰기에?
금정연의 글을 읽어 보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요약하자면, 금정연은 글을 이런 식으로 쓴다. 다음은 소설가 김중혁이 요약한 금정연의 스타일이다.
금정연의 글을 읽다 보면 언제나 힘이 빠지는 순간이 있다. 재미있게 달리고 있었는데, 옆으로 다가와서 슬쩍 다리를 거는 것 같다고나 할까. 팔꿈치를 툭 쳐서 책을 떨어뜨리게 만드는 것 같다고나 할까. 나는 달리던 속도를 이기지 못한 채 나자빠지고, 고개를 들어보면 금정연은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장난스럽게 웃고 있다. 넘어진 나도 결국 웃고 만다. 이토록 짧은 글인데도 금정연은 매번 놀라운 기술을 쓴다. 독자들은, 기대하고 있는 서평을 읽는데 계속 실패하게 될 것이다. 금정연이 계속 글의 목적지를 바꾸기 때문이다. 짐작과는 다른 곳에 도착해서야 애당초 이 사람이 서평이나 가이드 같은 걸 쓰려고 했던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길 찾기에 실패한 후에 도착한 곳이 훨씬 마음에 들 때가 많은데, 금정연의 글이 대부분 그렇다.
_『실패를 모르는 멋진 문장들』의 추천사에서
한마디로 금정연은 힘 빼기의 달인이라는 거다. 아니면 애초에 힘을 주지 않거나. 힘을 주는 법을 모르는 것 같기도 하다. 금정연의 글쓰기는 좋게 말하면 자유분방하고 나쁘게 말하면 흐리멍덩하다. 관점의 차이? 그렇다기보다는, 트레이드-오프 관계가 아닌가 싶다. 자유로운 글쓰기는 명료함을 대가로 치러야 한다…
내 글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 다른 글을 쓸 때는 몰라도 소설을 쓸 때에는 도무지 힘을 빼지 못한다. 심지어 그다지 명료하지도 않다. 게다가 나는 명료함을 싫어하기까지 한다. 자유분방함을 싫어하는 것보단 조금 더 많이...
그래서인지 도무지 한 편의 글을 완성하지 못한다. 파편적이고 과격한 단상들만 마구잡이로 노션에 끼적여 놓을 따름이다. 회사에서 몰래 해야 할 일을 미뤄 두거나, 잠자리에 누워 이제 정말 자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면서…
그래도 그의 글을 읽으며 배운 게 없지는 않은지, 슬쩍 다리를 거는 기술은 그나마 어느 정도 터득한 것 같다. (아마도.) 문제가 있다면, 나는 팔꿈치를 툭 치는 수준이 아니라 퍽 하고 친다는 점이다. 힘을 잔뜩 주고서.
아무래도 글을 잘못 배운 것일까?
이쯤에서 금정연의 기술에 대해 좀 더 탐구해 보기로 하자. 기술이란 무엇인가?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기술技術에는 두 가지 정의가 있다.
①과학 이론을 실제로 적용하여 사물을 인간 생활에 유용하도록 가공하는 수단.
②사물을 잘 다룰 수 있는 방법이나 능력.
①은 치워 두자. 나는 과학에는 젬병이고, 아마 금정연도 그럴 것 같으니까. 그러면 ②는? 금정연이나 나나 글을 쓰는 사람이니, 여기서 사물이라면 ‘글’로 치환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정의에서 추출할 수 있는 사실은, 모든 기술은 수단이나 방법이라는 점이다. 대체 무엇을 위한?
모른다. 나도 모르고 금정연도 모르고 당신도 모를 것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바는, 우리는 늘 애초 목적했던 곳에 도착하지 못한다는 다소 침울한 사실뿐이다. 인생에서든 글쓰기에서든.
그런데 이게 꼭 침울할 일일까? 한 가지 덧붙이자면, 금정연은 “길 찾기에 실패한 후에 도착한 곳이 훨씬 마음에 들”게끔 만드는 기술자라는 점이다. 그건 내가 잘하지 못하는 일이고, 내가 잘하고 싶은 일이다.
대체 어떻게 하는 것일까? 비법이 뭐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기. 아마도 그게 나와 금정연의 차이 아닌가 싶다. 금정연은 자유분방하고, 나는 어딘가에 얽매여 있다. 금정연은 의미에 집착하지 않는데, 나는 늘 의미를 찾아 헤맨다. 금정연은 생활을 경멸하지 않는데, 나는 일상을 멸시하고 업신여긴다. (여기에는 나도 할 말이 있는데, 내 일상은 금정연의 일상보다도 별볼일없는 것 같다. 그렇다고 금정연의 일상이 딱히 볼만한 것 같지도 않지만...)
그러니까 금정연은 현대적이고, 나는 시대착오적이다. 금정연에게 리디아 데이비스의 피가 흐른다면, 내 핏줄에는 DFW의 피가 흐른다…
섣부른 단언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내게 떠오르는 인상은 그러하다.
내가 뭘 잘못하고 있는 걸까? 아직도 잘 모르겠다. 모르긴 몰라도, 단순한 취향이나 미감의 문제는 아닌 듯싶다. 차라리 미학의 문제라고, 그러니까 시대와 스타일의 관계에 관한 것이라고 말해야 될 것 같다. 나도 무슨 말인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요즘에는 그저 그와 내가 다른 종의 인간이 아닌가 짐작할 따름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꼭 서글픈 일은 아니다. 각자가 각자의 글을 쓰는 것뿐… 힘을 뺄 수 있는 사람은 힘을 뺀 채로, 힘을 못 빼는 사람은 힘을 꽉 쥔 채로. (살짝만 느슨하게 풀고서.)
내게 필요한 건 약간의 기술과 용기, 그리고 부지런함이다. 희망이나 성공 같은 것은 필요 없다(고 믿고 싶다). 금정연이 자주 인용하는 바르트의 말처럼. “시도하기 위해 희망할 필요도 없고, 지속하기 위해 성공할 필요도 없다.” (희망을 필요로 하고 성공을 염원하는 이들이 이런 구절을 되새긴다는 것은 비밀이다…)
바르트나 금정연이나, 둘 다 글을 무지막지하게 잘 쓰지만, 둘 다 소설은 한 편도 쓰지 못했다. 왜? 상상력의 부재?
바르트는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고 이듬해에 죽었다. 금정연은, 아마 오래오래 살 것이고 앞으로 소설을 몇 권 쓸 수도 있겠지만—어쩌면 내가 기다려 온 걸작을!—, 아무튼 아직은 쓰지 못했다. 마흔이 넘었는데도.
나는 아직 서른이고, 상상력이 빈곤한 데다가, 게다가 힘까지 잔뜩 들어가 있지만, 어쩌면 소설을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소설을. 왜냐하면, 나는 힘을 빼지 못하기 때문에…
내게 필요한 것은 약간의 기술과 용기, 그리고 부지런함이다.
용기와 부지런함은 누가 어떻게 해 줄 수 없는 일이다. 그건 내 몫이다. 더이상 서글프진 않지만 부담스럽게도...
기술도 사실 배운다고 배워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무튼 나는 글을 배우고 있고, 금정연은 내 스승 중 한 명이다. 그가 나를 제자로 받아들이기로 했든 아니든. 아무튼 나는 그에게 배운다. 다리를 거는 기술을. 아무튼 간에 내 방식대로.
P. S. 리디아 데이비스는 나의 외국인 선생님인데, 그녀는 『형식과 영향력』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글을 쓸 때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이치에 맞는지, 효율적인지, 도덕적인지, 기타 등등을 묻지 않고 그저 본능을 따라간다. 내가 그 일을 하는 것은 그것을 좋아하거나 하고 싶어서인데, 아무튼 글쓰기에 있어 모든 것이 시작되어야 하는 지점이 있다면 바로 여기다. (152쪽)
나는 비도덕적인 글을 쓰고 싶어하므로 도덕적인 인간이다. 금정연은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는 것 같다. 어쩌면, 그게 나와 그의 결정적인 차이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글쓰기에 있어 모든 것이 시작되어야 하는 지점이 있다면 바로 여기, 그러니까 하고 싶은 것을 좋아하는 대로 쓰는 빈 노트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은 믿지 않는다...) 이따위 문제에는 그만 신경을 끄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