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라트, 『그리고 신은 얘기나 좀 하자고 말했다』
※ 여름에 써 두었던 서평이다. 추신을 아주 조금 수정했다. 어울릴 법한 계절에 글을 올린다. 미리 메리 크리스마스!
https://www.youtube.com/watch?v=eBa2Mm-nP50
이 년 전 크리스마스 이브에 나는 프랭크 카프라의 〈멋진 인생〉을 보았다. 영화는 신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선량한 주인공 조지가 크리스마스 이브 밤 열시 사십오분에 자살하려 한다는 이야기. 천사는 그를 구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공교롭게도 내가 영화를 튼 시간도 열시 사십오분이었다. 물론 밤이었고. 지어낸 이야기는 아니다. 천사는 내게 오지 않았다.
나는 외롭고 우울했지만 자살하려고 하지는 않았고, 영화는 따뜻했지만 그렇게까지 감동적이지는 않았다. 시간의 우연한 일치가 어딘가 종교적인 감상을 자아낸 것은 사실이고, 그럴수록 영화의 선의를 의식적으로 긍정해 보려 했지만 온전히 성공하진 못했다. 영화가 따스할수록 인생과의 괴리감이 도드라졌달까. 그렇다고 나쁜 선택이었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모두가 영화 속 제임스 스튜어트처럼 인생을 잘 살아온 것은 아닐 거라는 얘기다. 나도 마찬가지고.
한스 라트의 『그리고 신은 얘기나 좀 하자고 말했다』는 크리스마스에 틀어줄 법한 할리우드영화 같은 소설이다. 그러니까 카프라의 영화를 좋아한다면 아마 이 소설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나 홀로 집에〉 정도의 순진무구함을 기대하지는 말기를. 크리스마스 영화의 주인공으로 치자면, 차라리〈다이 하드〉의 매클레인 형사에 더 가까운 소설이니까. 물론 액션 장르는 아니고, 주인공 야콥은 “이피-카이-예이, 머더퍼커!”를 외치는 마초도 아니지만, ‘다이 하드’—쉽게 죽지 않는—라는 제목이 암시하는 정서는 이 소설과 은근히 맞닿아 있기도 하다.
야콥은 전처 소유의 집에 세 들어 사는 실패한 심리치료사다. 고객은 한 명도 없고, 소설 내내 재수 없이 얻어맞아서 코피를 흘린다. 소설의 후반부에서 신은 야콥에게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평행 우주’를 보여주는데, 카프라의 조지가 본 세계와는 달리 야콥이 없는 세계는 오히려 더 평온하다. 부모와 동생, 전처 모두 그를 만나지 않은 세계에서 더 잘 살고 있다. “그래, 모든 사람이 카프라 감독의 영화에 나오는 그 주인공처럼 될 수는 없지.”
그나저나 이 소설의 신은 누구인가? 이번에도 경건한 카프라의 신은 아니다. 직업을 때려치우려고 하던 야콥은 우연히 광대 아벨과 만난다. 아벨은 스스로를 신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역경에 처한 야콥을 구원하기 위해 찾아온 것은 아니고, 야콥이 심리치료사라는 걸 알게 된 아벨은 거꾸로 그에게 심리 상담을 요청한다. 그는 그럭저럭 선량하지만, 전지전능하지는 않다. 그러니까 〈브루스 올마이티〉의 모건 프리먼 같은 신도 아니다. 굳이 따지면 짐 캐리에 가까울 것이다. “실수도 많고 나약하고 무기력한 신”.
게다가 그의 힘은 점점 쇠퇴하고 있다. 신은 잠시 빌린 아벨의 육체가 기능을 다하면 마침내 자신의 영혼도 함께 사라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린다. “이제는 신도 세상의 모든 걸 유머러스하게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다른 할 일이 없”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물론 인간들이 믿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례 없이 냉소적인 세기를 살아가고 있다. 물론, 느닷없이 나타나 자기를 신이라고 이야기하는 작자를 믿어 줄 만큼 순진한 사람도 없다. 야콥이 보기에 아벨이 겪고 있는 심리적 문제란, 그가 스스로를 신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심지어 수도원 생활을 하며 성직의 길을 밟는 아벨의 사생아―신은 아벨의 몸을 빌린 상태에서 어쩌다 보니 마리아와 동침하였다—크리스티안조차 아버지를 믿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이 부과하는 책임을 내팽개치고, 모든 것을 비웃으려 하는 냉소주의자라고 아버지를 비난한다.
그래서 아벨은 신인가, 환자인가, 둘 다 아니라면 지독한 냉소주의자일까? 여기서 굳이 밝힐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궁금하다면 직접 읽으며 확인해 보기를 바란다. “아벨 바우만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많은 광대든 신이든 원칙적으로 아무 차이가 없다 … 중요한 건 아벨의 체험이 나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는 사실이다. 신이 있다고 해도 더 이상은 신에게 요구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신이 없더라도 인간은 신을 만들어 냈을 것”이라는 볼테르의 말처럼,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을 구하려고 목숨을” 걸기 위해서는 나 자신보다 더 소중한 무언가가 있다는 직관이 필요한 것이다. 그걸 신이라고 부르든 않든, 그건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다. 신형철의 말로 마무리하자: “내가 생각하는 무신론자는 신이 없다는 증거를 손에 쥐고 환호하는 사람이 아니라, 신이 없기 때문에 그 대신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의 곁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이 세상의 한 인간은 다른 한 인간을 향한 사랑을 발명해낼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신이 아니라 이 생각을 믿는다.”
가끔은 이런 감상적인 교훈도 필요하다(정도껏이기만 하다면). 다만 나처럼 조금 비뚤어진 독자에게는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신이 되기는 어렵다』나 에마뉘엘 카레르의 『왕국』을 더욱 권하는 바다. 그리고 그 책들을 읽은 뒤, 라트의 이 소설도 가볍게 읽어보면 어떨까. 가능하다면 크리스마스 즈음에. (순수한 독자라면 반대 순서로 읽어도 나쁠 것 없겠다. 어쩌면 그 순서가 맞을지도 모른다.)
P. S. 1. 최근에 조너선 하이트의 『불안 세대』를 우연찮게 읽었는데, 거기서 하이트는 데이비드 데스테노의 연구 결과를 인용하며 이렇게 쓰고 있다: “신이 존재하건 존재하지 않건,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나 장소, 행동, 물체를 신성하고 순수하고 숭고한 존재로 지각한다. 반면에 어떤 사람이나 장소, 행동, 물체는 혐오스럽고 불순하고 품위를 떨어뜨리는 것으로 지각한다.”
요점은 신을 믿든 않든 종교적 실천과 태도가 더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하이트의 책에서는 대커 켈트너의 『경외심』도 함께 인용되는데, 그에 따르면 경외감은 “신경생리학을 변화시키고, 자신에 대한 관심을 감소시키고, 친사회적 관계성을 증대시키고, 사회적 통합을 높이고, 의미의 감각을 높인다”고 한다. (켈트너의 책도 조만간 읽어봐야겠다. 데스테노의 저작(『How God Works』)은 국내에 번역되어 있지 않다.)
결국 우리는 무언가가 다른 것보다 더 가치 있다고 믿어야 하며, 이때의 가치는 양적으로 측정 가능한 쓸모에 관한 것일 수 없다. 가치는 순종과 의심의 변증법적 순환, 그리고 결단과 도약에 의해 발명되며, 이는 영원한 진리는 아니더라도 반半영구적이다. 인간이 인간인 이상.
P. S. 2. 야곱이 신(천사)과 씨름을 해서 이겼다는 창세기의 일화를 이제야 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야곱은 날 때부터 형의 발목을 붙잡고 태어났고, 형을 속여 장자의 축복을 가로챈 뒤 두려움과 죄책감에 사로잡혀 도망쳤던 인물이다. 두 아내 중 한 아내를 심각하게 편애했고, 그로 인해 집안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그런 야곱이 천사와 밤새도록 씨름을 하여 인정받았다는 이야기는, 아마도 신이 인간에게 바라는 것이 순종이 아니라 인생과 진지하게 대면하는 것임을 암시하는 게 아닐까.
믿음은 복종이 아니라 씨름이다. 신에게 질문하고, 응답을 요구하고, 끈질기게 붙잡고 싸우다 지쳐 나자빠지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권리이자 의무일 것이다. 야콥과의 첫 만남에서 아벨이 뱉은 대사도 다시 떠오른다. “당신은 오늘 얼굴에 케이오 펀치를 한 방 맞았소. 그런 사람이라면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뼈아픈 실수 한 번쯤은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이해하지 않겠소?” (야콥이 얼굴에 맞은 펀치가 그의 실수나 결함과는 무관하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다.)
인생은 진지한 문제다. 그렇다고 무겁게만 다룰 수는 없는. 욥보다는 야곱이 훨씬 더 진지하다. 아브라함보다는 가뿐하고.
https://youtu.be/EU0zqPGqeYA?si=9cjnLIiJK3xOuW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