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덕구 / 『한 움큼의 외로운 영혼들』(2024)
친구는 악의로 가득 찬 눈빛으로 말했다. 거리에서 멋지고 근사한 젊은이들을 보면, 차들이 쌩쌩 달리는 차도에 확 밀어 버리고 싶다고. 나는 친구가 뱉은 사나운 말을 듣고 적지 않게 놀랐다. 친구가 정말 그런 행동을 할 리는 만무하다… 만무한가?
『한 움큼의 외로운 영혼들』은 에세이 누아르다. 크리틱 누아르거나, 어쩌면 픽션 누아르일 수도 있다. 강덕구는 지난 세기를 밝히고 또 그림자를 드리웠던 도시의 밤거리를 친구와 함께 쏘다닌다. 그러다가 우연히 ‘멋지고 근사한 젊은이들’을 마주치기도 한다. 친구는 아름다움을 뽐내는 젊은이들을 “차들이 쌩쌩 달리는 차도에 확 밀어 버리고 싶다고” 고백한다.
이 ‘친구’는 잊을 만하면 등장하는 이 책의 라이트모티프인데, 그는 아마 작가 자신이거나,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이거나, 이 글을 읽고 있는 우리 모두일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따로, 또 같이 밤거리를 쏘다니고 있다. 우리가 달리는 이 밤, 이 어둠은 광학적이고 물리적인 차원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의식적인 차원”에 속한다. 우리의 꿈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 현실 아래의 컴컴한 배경이다. 악몽이거나 단꿈이다(자주 전자일 것이다).
자아를 숨기고 잊게 만드는 동시에, 낮보다 더 강렬하게 의식하게 만드는 어둠의 양가성. 영웅은 그곳에서 출몰한다. “그는 어둠이 가져오는 황량함과 공포를 견디면서도 어둠의 최면에 빠져들 준비가 된 사람이다. 그는 온전히 혼자 있다.”
어둡다. 외롭다. 이것은 영웅만의 조건이 아니다. 20세기를 살아가는 개인들의 조건이기도 하다. “익명의 타인들이 전염병처럼 창궐하는 가운데 개인은 고독 속으로 침잠한다.” 누구도 우리의 인생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우리도 누구의 인생으로도 들어가지 못한다. 그 고독은 종종 편안하지만 불안하다. “물론 미래에 기쁜 일이 생겨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상상하는 일의 대부분은 어둡고 무서운 일이다.”
우리는 그런 영웅적 개인들의 뒤를 따라, 아니 사라진 영웅이 남긴 그림자의 뒤를 따라, 걷는다. “그들은 언제나 사건과 사물의 뒤를 따라간다.” 악의를 품고. 마주 선 악의를 부릅뜬 눈으로 노려보면서. 사지를 마취시키는 20세기 팝 음악의 나른한 음성 안내를 따라.
필름 누아르가 “현대인은 본질적으로 어리석다”는 보편적 조건을 드러내 보인다면, 강덕구는 우리가 그 어리석음 속에서 어떻게 다시 길을 찾아야 할지 묻는다. 별이 총총하던 하늘이 암흑 너머로 사라져 버린 박복한 시대에, 이전 세기의 성좌를 그리어 보며 이 땅의 좌표와 연결 지으려 한다. 검정치마를 들추어 보고, 동시대 한국문학의 뒷구멍을 들여다보고, 언니네이발관에 들러 반삭을 하고, 유아인의 불안한 제스처와 하정우의 악마적 태연함을 가로지르며. 정지돈에서 박대겸으로. 필립 로커웨이로.
걸음은 번번이 같은 자리로 되돌아온다. 우리는 아직 집을 찾지 못했고, 밤은 아직 까마득하다.
그러나 이 책의 급진성은—〈엄마와 창녀〉에 대한 김성욱의 코멘트를 빌려 오자면—제자리로 끊임없이 돌아오는 바로 그 반복에 있다. 반복은 똑같은 것의 재귀가 아니다. “이렇게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희미해지고 윤색되는 기억 특유의 성질은 과거를 모호함으로 가득한 다면체로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혼란스러운 이 밤의 돌림노래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반反-영웅이 된 영웅들의 초상이다. 축축하게 스며들어 버린 “우리 내면의 증거들”이다. 악에 받친 현대의 (반)영웅들에게는 이제 “공동체를 보호하려는 고귀한 동기”가 없다. 우리 시대에는 아무런 규범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60년대에 범람한 자유의 흥분은 억압과 증오와 자기혐오로 대체되었다. 약속들은 모두 헛되었다.
우리 시대의 영웅들은 우리 시대를 증언함으로써 영웅이 된다. 악마가 된다. 그들은 파산할 운명이므로 비극적이고, 영웅적이다.
뒤를 돌아보는 까닭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함이다. 위치를 파악하고 경로를 조정하기 위함이다. 또는 도약하거나. “결국 글쓰기는 공포를 없애기 위해 공포가 발생한 장소로 되돌아가는 일이다. 이건 인생이 문학에게 건네는 조언이다.”
현실과 허구를 뒤섞고, 끊임없이 증폭하고, 시작도 끝도 없이 표류하는 이 망연함을 이제는 끝내야 한다. 도중에 이탈하고 오랫동안 헤맬지라도, 어쨌거나 어디선가 시작하고 끝내야 한다. 정지돈과 제발트를 그만 보내 줄 때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할까?” 작가의 입이 열리고, 그가 마저 말을 잇기 전에, 이 책은 다급히 끝이 난다. 소리 없이 잘린 화면 속 벌어진 입의 잔상은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려면 일단 우리가 길을 잃어버린 골목으로 되돌아가 보아야 한다. 강덕구의 요청은 단순하다. “빨리 허구에서 빠져나와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 “그럴 때 예술은 비로소 치러야 할 싸움이 되는 것이다.”
그럴 때 예술은 비로소, 치러야 할 싸움이 되는 것이다.
막다른 길.
벽은 벽에 다다르고 나서야 부술 수 있다.
이 책은 ‘멋’있다. 찬란하게 젊음을 누리는 청춘들의 멋과는 조금 다른 종류의, 약간 비참하고 다소 비장한 ‘멋’이.
따옴표를 치는 일은, 확실히 조금 서글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