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램 수필선』(문예출판사)
어떤 책을 읽다 보면 이 작자는 나와 동류의 인간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건 책이 훌륭하다거나 별로라거나 하는 식의 가치 판단과 꼭 연동되진 않는다. 호불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나와 비슷해서 좋아할 수밖에 없는 글이 있는가 하면, 같은 이유로 싫어하게 되는 글도 있다. 물론 인간이란 모두 어느 정도 나르시시스트이기 마련이니, 좋아할 때가 잦다고 하여 흉볼 일은 아니겠다.
그런 느낌은 은근하게 스며들 때도 있고 대놓고 가슴팍을 두드려 올 때도 있다. 가끔은 문학사에 발자취를 남긴 입지전적인 작가들에게도 그러한 동류 의식을 느끼곤 하는데, 그런 경우에는 남들에게 터놓고 말하는 것이 조금 쑥쓰럽기도 하다. 나는 아직까지 별다른 업적을 이룬 적 없고, 앞으로도 어떨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흔히 위대하다거나 대단하다거나 하는 말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그저 남들이 그렇다고 말하면 그런가 보다 하며 박수를 치는 것이 고작이면서도, 박수를 받는 사람들은 인종적으로 보통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그야 물론 어느 정도는 그럴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성경 속 천사나 그리스 신화 속 티탄처럼 눈이 백 개 달린 괴상망측한 존재로 여길 필요는 없는데도 말이다. 어쨌거나 사람이라는 점에서는 위대한 예술가, 군인, 정치인, 학자라도 평범한 농부, 어부, 고리대금업자, 사무원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말이 너무 길어졌다. 사실 이렇게까지 변명을 늘어놓을 필요도 없는데 말이다. 왜냐하면 지금 소개하려는 작가는 대부분의 대중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영문학 전공자들이나 흘러가듯 들어보았을 법한 이름이다(내가 과문한 탓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므로 위대하다느니 어떻다느니 하는 방금 전의 이야기는 모두 그저 나의 소심함에서 비롯한 사족일 따름이다.
물론 대중들은 잘 알지 못하지만 자신의 분야에서, 나아가 인류의 역사에서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으며, 게다가 문학이나 예술에 대한 오늘날 사람들의 시시한 반응이나 관심을 고려할 때 이쪽 분야에는 그런 사람들이 특히 많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어느 모로 봐도 찰스 램을 위대한 작가 반열에 올려 놓기는 조금 어려울 성싶다. 당대에 눈에 띄는 수필가였다, 하는 정도가 가장 적당한 평가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 작자는 결코 몽테뉴의 옥좌에 이르지는 못했단 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무튼 나는 찰스 램의 에세이들을 읽는 동안 이 작자가 나와 동류의 인간이라는 인상을 받았는데, 은근하게 스며든다거나 가슴팍을 두드린다기보단 팔뚝을 찰싹 때리며 웃겨 주는 식이었다고 해 두자(친구가 되려면 모름지기 유머 코드가 가장 잘 맞아야 하는 법이다). 가만 보면 지금 쓰는 글도 얼마간 램의 문체에 영향을 받은 것일 수도 있는데, 18세기 영국 신사의 문투를 현대 한국어로 약간 번역한 다음 나 자신의 개성을 조금 섞었다고 보면 그럭저럭 정확할 것 같다.
내가 읽은 그의 선집에는 총 17편의 에세이가 수록되어 있는데, 사실 그렇게까지 인상적이거나 너무나도 훌륭하다거나 아주아주 재미있다고 말할 만한 글은 딱히 없었다. 시대상의 차이 또는 내용에 대한 몰이해로 말미암아 잘 읽히지 않는 부분도 많았고, 반어적이거나 역설적인 유머를 살짝 섞은 길게 늘어뜨리는 난삽한 문체 또한 완전히 알아듣진 못했다. 난삽하다는 건 나 자신의 주관적인 인상만은 아닌 것이, 역자도 그렇게 말하더라. (게다가 이 시기의 글을 읽다 보면 특히 자아도취적인 느낌표를 자주 마주치게 되는데, 글에 때때로 느낌표를 섞는 것 자체는 나도 싫어하지 않지만, 어쨌든 이러한 문체도 별로 내 취향에 맞진 않았다! 아, 나는 참 까다로운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나는 그가 나와 동류라고 생각하고, 그것도 꽤나 친밀한 감정을 동반한 동지 의식을 느끼는데, 그건 아마 그 또한 까다로우면서도 따뜻한 맘씨와 짓궂은 유머감각을 갖춘 사람이어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얘기다. 독자들께서는 재수 없더라도 조금만 참아 주시기를!)
램 자신의 말에 따르자면, 그는 “내 몫으로 굴러들어온 이 세상의 좋은 것들을(이 종류의 내 것은 별로 없지만) 마음 내키는 대로 미련 없이 친구에게 나눠주는 그런 인간 중에 하나다. 단언하겠지만, 나는 내 친구의 즐거움, 흥밋거리, 도가 지나치지 않은 만족감 같은 것에 관해, 나 자신과 똑같이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하는 대목은 물론 괄호 안이다. (이 세상의 좋은 것들은 보통 내 몫이 아니라는.)
반은 농담이고 반은 진담인, 그러나 결코 의뭉스럽거나 밉지는 않은 램의 성정은 책을 펼치자마자 독자들을 반기는 서문에서부터 표가 난다.
여기서 램은 “우연히 떠들어댄 헛소리를, 후일에 가서 나무랄 목적으로 꼽아놓고 계시지 않을, 그런 우애가 깊고 현명하신 독자에게 이 글을 바”친다면서 아첨인지 겸손인지 모를 수작을 부리더니, 곧바로 “이와는 유類가 다른 인사들”—그러니까 아마도 램이 보기에 멍청한 작자들이겠지—에게는 “개새끼들아, 뚜껑을 열고 핥아먹어라”라는 인용구로 맞이하겠다는 식으로 능청을 떨기도 하는 것이다.
서문에 이어지는 첫 번째 에세이 또한 “우연히 떠들어댄 헛소리”이자 능청스럽기 그지 없는 글이다. 제목은 「두 가지 인종」인데, 세상에는 돈을 빌리는 사람과 빌려주는 사람이 있고, 자기가 볼 때는 빌려주면서 쩔쩔매는 쫌생이보단 천연덕스럽게 빌리는 사람이 훨씬 훌륭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사람에게는 따지지 말고 유쾌하게 돈을 빌려주라나 뭐라나.
그도 그럴 것이, “어차피 거절당할 거라고 생각하는 비굴한 부랑자”에게 거절하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나, 밝은 낯으로 당당하게 요구하는, “마음을 탁 터놓고, 남을 믿으며, 너그러운 면”이 보이는 이의 낯에 침을 뱉기는 “독자 여러분의 친절한 마음에 비추어보아 한층 불유쾌한 일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다만 책은 웬만하면 빌려주지 말라고 한다...^^;)
이쯤에서 책을 덮어버릴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이 작자는 객쩍은 소리나 하는군!’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작자를 나와 동류의 인간이라고 확신하는 ‘절친’의 입장에서 한번 옹호해 보건대, 아마도 램은 돈을 빌리기보다는 그나마 빌려주는 쪽이었을 것이며, 빚을 지거나 추징하는 일을 불편히 여겨 웬만하면 피했을 것이고, 만에 하나 빌려주고서 못 받더라도 대범하게 넘어가거나 옆구리를 찌르며 독촉하기보단 쫌생이처럼 전전긍긍했을 것이다. (어떻게 아느냐고는 묻지 마시길.)
그런데도 이런 글을 쓴 것은 다만 작자 자신이 좀 더 넉넉하고 여유롭고 천연덕스럽게 살고 싶고, 또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사는 세상을 더 좋아하고 꿈꿨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아마도 램은 본성적으로 쫌생이이되 푸근한 세상을 꿈꾸는, 머릿속으로는 사람들에게 까다롭게 굴면서도 막상 그들과 어울릴 때는 넉넉해지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마도 둔한 사람들은 그를 관대하고 속이 넓은 사람으로 여겼을 테고, 좀 더 민감한 사람들은 예민하고 의뭉스러운 사람으로 여겼을 것이며, 가장 예리한 사람들은 깜찍하고 음침한 구석도 있지만 그래도 재미있고 마음이 넉넉한 남자로 여겼을 것이다. 내가 그렇다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아마도 램은 돈을 빌려주는 것은 거북스러워 하더라도 눈앞의 거지에게 적선을 하는 것에는 거리낌 없는 사람이었을 테다. 거지에 관한 에세이에서 그는 이렇게 쓰는데, “거지들이 동냥으로 막대한 재물을 긁어모았다는 이야기 중의 반수는 구두쇠들이 모함하느라 지어낸 이야기들이다(내 믿음은 그렇다).”라거나, “꾸며낸 불행이라고 해서 그대의 주머니 끈을 항상 졸라매 놓아서는 안 된다. (…) 그를 믿는 것이 좋으리라. 설령 그가 하는 소리가 새빨간 거짓말이라 하더라도, 일단 주라. (…) 배우라고 생각하라.”라는 식이다.
「위조지폐」와 같은 산문시에서 적선과 도덕의 (자기)기만성, 사람들의 위선을 의문시하는 보들레르의 현대성에 비하면, 램의 푸근한 마음씨는 얼마나 실용적이고도 단순하며 고귀한가! (물론 21세기의 우리에게는 보들레르도 필요하지만.)
뭐, 램은 전혀 이런 인간이 아닐 수도 있다. 내가 그에게 직접 돈을 빌려 본 것은 아니므로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당신이 지금 읽고 있는 이 글의 작자도 자선을 하는 데 그렇게 넉넉하기만 한 사람도 아니다. 어린 시절에는 지하철이나 한강공원에서 뭐 좀 팔아 달라는 노인이나 장애인들을 잘 지나치지 못하거나, 지나치더라도 마음속에 무언가 걸리는 게 있었는데, 요즘에는 갈수록 낯짝이 두꺼워지고 있는 것 같다. 이것 참 편리하면서도 곤란한 일이다. 내 지갑 사정만큼이나.)
아무튼 간에 글이란 것은 어디까지나 글로써 읽으시라. 그러면 글 읽는 재미를 좀 더 깨우칠 수 있을 테니까.
이밖에도 여러 편의 수필에서 램은 자신의 호불호를 분명하고 내숭 없이 드러내는데, 이를테면 지난날에 대한 후회 없이 새해 첫날을 “유쾌하게 맞이하는 (…) 그런 사람들하고는 맞지가 않는다”(「제야」)거나 “성격에 우스꽝스러운 점이 한 군데도 없는 사람하고는 누구와도 꾸준하게 교제를 해본 일이 없고, 친하게 지낸 일이 없다”(「만우절」)는 식이다.
그런가 하면 평생 독신으로 살아간 사람답게, 기혼자들을 꾸짖는 걸출한 에세이도 있다. (어째서 위대하고 가치 있는 업적은 대부분 솔로의 몫인 것인지. 다른 존재를 사랑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만 빼고.) 부루퉁한 작자의 표정이 떠올라 애처로우면서도 어느새 소리 내어 웃게 만드는 글이다.
“그러나 내가 불만인 것은 그들이 서로 좋은 거야 좋은 거지만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드러내놓고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창피하지도 않은지 우리 독신자 면전에서 으쓱거리는 꼴 하며, (…) 세상일 중에는 넌지시 비춘다든가 그저 당연한 것으로 밀어붙이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입 밖에 쏟아 놓으면 화를 치밀게 하는 것이 적잖다.”
“아는 게 뛰어나다든지 돈이 많음을 과시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굴욕감을 주기에 충분하나 이런 것들은 정상을 참작할 여지가 있다. (…) 그러나 결혼한 사람의 행복을 과시하는 행동에서는 이런 정상을 참작할 여지가 없다.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순전한, 그리고 보상받을 길 없는, 무조건적인 모욕이다.”
램은 같은 글에서 “이들이 아이를 낳고 나서 거들먹거리는 태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아이들이 그다지 귀한 것도 아니고, 거리마다 뒷골목마다 구더기 끓듯 하는 게 아이들”이라고 쓰기도 하는데, 이 또한 너무 고깝게 듣지는 마시라. 램은 분명히 아이들을 사랑하는 사람일 테니까.
어떻게 아느냐고? 「굴뚝 청소부 예찬」이나 「꿈속의 아이들—백일몽」 같은 글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게다가 램은 커플들을 진심으로 저주하지도 않는다. 다만 눈꼴시려우니 코앞에서 뽐내는 일은 좀 참아 달라는 거다. 반면 「발렌타인 축일」과 같은 글에서는 이렇게 쓰기도 하는 것이다. “참다운 사랑의 신조를 믿고 그의 겸손한 신도로서 만족하고 있는 온 천하 모든 충실한 연인들에게 더욱 경사스러운 행운이 있기를 빈다.”
이 얼마나 뛰어난 균형 감각인가! 생활의 기쁨과 슬픔, 문학적 재치와 진심 어린 애수, 고독과 공존을 자유분방하게 넘나드는.
이와 같은 맥락에서 끝으로 언급하고 싶은 에세이는 책의 마지막에 실린 「돼지구이를 논함」이라는 글인데, 여기서 램은 글을 쓰는 내내 침을 질질 흘리며 돼지고기를 “신들이 먹는 한 가지 요리, 아니면 사람도 먹는 공동의 음식”이라고 찬양한다. 본인이 자부했던 넉넉한 자선 습관도 돼지고기 앞에서는 멈춘다면서, “사람은 누구나 리어 왕처럼 "몽땅 주어버리려고"는 하지 않는다. 나는 돼지를 놓고는 주춤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쓰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돼지를 때려 잡는 것이 정말로 돼지고기를 더 맛있게 만드는 방법이라면, 돼지를 그렇게 도축해도 되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대목에서는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랍스터를 생각해 봐Considering the Lobster」 같은 윤리적으로 세심하고도 지적으로 철저한 에세이가 잠깐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또한 DFW보다는 좀 덜 세심하고, 좀 덜 철저하고, 좀 더 천연덕스러운 작가답게, 램은 곧바로 이렇게 쓴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의 잔인성을 힐난한다 하더라도, 조심해야 할 것은 그것을 실천하는 지혜를 탓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실제로 맛을 돋우어줄지도 모른다.”
DFW는 내가 존경하고 좋아하지만 조금 어려워하는 친구다. 그와는 산낙지나 조개구이를 먹기 좀 께름칙할 것 같다. 램은 존경하지는 않지만 내가 좀 더 좋아하는 편안한 친구다. 그라면 꿈틀거리는 산낙지라도 흔쾌히 도전해 볼 테니까. '이거 원 참기름 맛이지 다른 건 아무 맛도 모르겠는걸. 식감도 끔찍하고 말이야. 자네 나라에서는 왜 이런 음식을 먹나?'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담 영국 음식보단 낫지 않느냐고 응수해 줄 테다.)
각각의 글에 관한 세세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관두자. 이미 충분히 길게 썼으니까. 게다가 당신도 이미 알아차렸으리라. 램이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당신이 그를 좋아하게 될지 말지를. 램의 글은 아마도 연애를 쉬어 본 적 없는 카사노바보다는, 좀처럼 맘에 맞는 연인을 만나기 어려웠던 꼬인 사람들의 가슴팍, 아니 팔뚝을 더욱 통렬하게 두드릴 것이다. (절대로 내 얘기는 아니다! 그리고 아마도 램의 글은 연애를 전혀 해보지 못한 완고한 사람의 취향도 아닐 공산이 크다.)
지난주에 나는 친구가 한 명 생겼다. 나와 동류이면서도, 어마어마한 업적과 위대한 명성으로 나를 짓누르지 않는 흔치 않은 친구다. 스티브 잡스는 소크라테스와의 점심 식사에 전 재산을 걸 수도 있다고 되도 않는 공수표를 날렸다지만, 나라면 잡스나 소크라테스보다는 차라리 램과 같은 친구와 술을 한잔 하고 싶다. 호불호가 분명하고 내숭 없이 쓰면서도, 또 삶과 사람을 사랑하고 웃기거나 웃을 줄 아는 작가니까.
그러나 램의 인생사는 불행했나 보다.
책날개에 달린 작가의 약력부터 먼저 읽던 여느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어째서인지 약력을 나중에야 읽게 되었는데, 타인의 인생사를 두고 불행이니 뭐니 떠드는 게 주제 넘는 참견인 줄은 알면서도, 읽으면서 안타까워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정신병을 지닌 여동생을 평생 돌보기 위해 독신으로 살았다고 하니. (아, 그 여동생이 발광하여 어머니를 죽였단다.) 그 자신에게도 정신병적인 기질이 있는 것은 아닌가 평생 두려워하면서.
어쩌면 램은 지긋지긋한 여동생을 집에서 내쫓으려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혼자 분을 삭이고 마는 조지 손더스의 단편소설 <윙키>에 등장하는 화자와 비슷한 신세였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 소설을 아주 비참하게 사랑하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닐 테지.)
“그는 울지 않으려고 웃고 있는 것”이라는 역자의 진부한 평에 기분 좋게 끄덕이고 싶진 않지만, 그가 글을 쓸 때의 기분이 지금의 나와 별로 다르지 않았으리라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겠다.
그러나 찰리 채플린이나 버스터 키튼처럼, 진정으로 유쾌한 사람들은 전부 한때 불행했던 법이다. (그 한때라는 것이 인생 내내 그림자를 드리우는 법이고.)
이제 우리—램과 나와 이 글을 여기까지 읽은 당신—끼리의 이 난삽한 수다도 그만 줄일 때가 되었다. 게다가 타인의 삶에 대하여, 그것도 망자에 대하여, 고작 책 한 권 읽고서 아는 것도 없이 떠드는 게 딱히 내 취향은 아니지만, 아마 램과 같은 작가라면 이 정도는 충분히 양해해 줄 터다. 우리는 이미 친구 먹기로 하였으니까.
끝으로 한 가지만 물어보자. 솔직히 당신도 그와 같은 친구를 사귀고 싶진 않은지? 이런 난삽한 글을 여기까지 읽었다면 뭣하러 더 숨기겠는가. 물론 친구의 친구는 나의 친구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분위기가 조금 어색할 수도 있겠지만, 아마 술 한잔 정도면 풀리지 않을까. 안주는 삼겹살이 좋겠다. 이유는 이미 썼다. (책에 튄 기름때 같은 건 신경 쓰지 말기로 하자.)
P. S. 우정을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친구에게 돈을 빌리거나 빌려주지 않는 것이다. 친구 사이의 금전적 관계는 돌아가면서 밥을 사거나 여유 있는 친구가 좀 더 자주 사는 정도가 제일 좋다. 빌려줄 거라면 돌려받을 생각 따윈 처음부터 하지 말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