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날 수 있지만 남으려는 자, 떠나고 싶지만 남아야 하는 자.
들어온 꽃 정리로 한창 정신이 없는 토요일 오전.
그날따라 주문건 처리는 왜 이렇게 많은지, 샵을 정리하는 것부터 주문건 확인까지 다 내 몫인지 오래다.
파리 꽃 학교에 재학 중인 스무 살의 프랑스인 동생이 제법 일처리가 빨라졌다고는 해도 여전히 하나부터 열까지 책임지고 마무리를 해야 하는 건 내 몫이기에 그날은 유독 정신없는 오전의 시작이었다.
날은 또 왜 그렇게 봄인지.
내리쬐는 아침 햇살 아래로 분무한 물을 머금은 화분들이 반짝이는 탓에 행인들이 발길을 멈춘다.
샵 입구에 놓인 작은 색색깔의 꽃잎을 담은 화분들을 하나 씩 집어 샵 안으로 들어오는 터에 오전부터 아담한 샵이 꽃과 사람으로 북적인다.
그날따라 사장님은 샵 2층 살롱에서 여유롭게 손님들과 티타임을 가지신다.
잠시 살롱을 들른 (한껏 정신없는 탓에 살짝 예민해진) 나를 두고 사장은 대뜸 인사를 시키신다.
'티베트에서 온 J인데, 어쩌면 가을부터 너의 어시스턴트가 될지도 모르니 인사해 둬.'
응? 물어보니 꽃을 공부한 적도, 파리 꽃 학교를 지망하는 것도 아니고 (인턴제도를 이용할 수 있다) 불어도 아직 초급단계인데 스무 살 프랑스 동생의 계약이 끝나면 이 아이를 고용한다고?
사람을 뽑는 거야 사장님 마음이지만, 가뜩이나 예민할 정도로 바쁜 오늘 같은 날이 가을이 와도 이어질 거라 어림짐작하니 평소 오지랖 넓은 나지만 왠지 오늘은 반가운 인사를 선뜻 건넬 수 없는 처지다.
고개를 돌려 본 그녀는 선하게 생겼다. 작지만 다부진 에너지가 담겨 있는 것만 같은 체구. 그리고 똘망한 눈으로 웃음을 지으며 환하게 비쥬(프랑스식 볼 인사)를 해 주는 그녀에게 무장해제당했다.
그게 그녀와의 첫 만남이었다.
한가한 평일 오전 시간을 이용해 그녀는 시용기간을 가졌다.
물론 교육은 내 담당이다. 다시 본 그녀는 여전히 씩씩하고 밝은 에너지의 작은 체구였지만 살짝 그을린 피부와 옅게 내려 앉은 주름탓에 나이 때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내 또래의 삼십 대 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녀의 이민도 나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어림짐작만 할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녀가 왜 프랑스에서 플로리스트가 되고 싶어 하는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사장님께 전해 들은 이야기로는 친하게 지내는 지인의 소개로 그녀를 알게 되었고, 의욕이 넘치고 일을 잘한다는 추천도 있었거니와 그녀의 눈이 진실되어 보여 일단 일을 시켜볼 심산으로 며칠 테스트 기간을 가져보겠노라 했다. 사장의 입장이야 나와 같겠냐만은 그래도 우리가 원하는 ‘같이 일을 해도 괜찮을 사람’을 보는 기준은 비슷하다. 손이 많이 가는 타입인지, 하나를 가르치면 둘을 해낼 사람인지 열을 해낼 요령이 있는지. 언어가 부족하더라도 눈치가 있고 의욕이 있으면 일과 언어는 배우기 나름이니까.
그리고 사장의 리스트에는 '믿고 가게를 맡길 수 있는 사람 됨됨이' 인지를 하나 더 볼 것이다.
생각보다 파리에선 좀도둑 같은 직원들도 많거니와 꽃이라는 게 재고 확인이 정확히 되지 않은 제품군이라 장부와 대조하여 정산을 하기가 어렵거니와 장사라는 게 그런 리스크를 안고 하는 일이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조건일 수밖에 없을 거다.
어떻게 프랑스로 오게 되었어?
그녀는 프랑스로 온 지 일 년 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 했다.
하나를 부탁하면 둘, 셋을 해냈다.
단순한 청소부터 시작하는 게 샵 일인데 어떤 일이든 작든 크든 맡은 일을 완벽하게 해 내는 것으로부터 신임을 얻는 게 아닌가. 그녀의 청소하는 모습만 봐도 난 그녀가 얼마나 야무지게 다음 일을 해낼 것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조금 오버해서 그녀가 어떤 살고자 하는 의욕으로 프랑스에 넘어오게 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이, 손 끝과 눈빛이 야무졌다.
티타임을 하면서 그녀가 프랑스로 넘어오게 된 사연을 살짝 들을 수 있었다.
탈북을 하듯, 그녀는 군인들의 눈을 피해 중국으로 네팔로 며칠간을 이동하여 네팔에서 몇 달을 살다 한 단체의 도움으로 프랑스로 이주하였다고 했다.
낮에는 잠을 청하고 밤에는 걷거나 포복으로 이동을 하면서 얼마 되지 않은 비상 식량들을 서로 나눠먹으면서 버텼다고 전했다. 함께 이동한 사람들 중 프랑스로 오게 된 건 혼자였고, 대다수는 네팔에 머물거나 다른 유럽으로 이주했다고 했다.
담담하게 알고 있는 모든 불어 단어를 조합하여 더듬더듬 말했지만, 권리를 누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이주해야만 했던 그 시절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 듯했다.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의 시간들을 버텨온 그녀였기에 삶에 대한 의지가 더 강해 보였다.
본인이 태어난 나라에서는 실종자로 처리되어 있어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서도, 귀국을 해서도 아니 된다 하였다. 그러면 본인은 물론 가족까지 위험해지니 그냥 이 곳이 제2의 나라라고 생각하고 평생을 살아야한다고.
요즘처럼 무료 통화로 어디든 보고 싶은 사람과 화상통화도 하는 시대에, 평생을 가족 목소리도 듣지 못하며 혼자 이국땅에서 새로 시작해야 한다니, 자의로 이민형 유학을 온 나와는 정 반대의 사정이었다.
그러니까, 목표가 있어서 온 유학과 이민도 버티지 못하는 이방인이라 겪어야 하는 순간들이 수없이 찾아오는데 어쩔 수 없이 이주해야만 살 수 있었던 그녀의 이민은 더 쓰라린 순간들이 많았을 거다.
다행히 단체에서 연결시켜준 프랑스 가족의 도움으로 홈스테이를 하며 초기 정착에 필요한 물품과 애정을 듬뿍 받았고, 이렇게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찾기 위한 나날을 채워 가고자 한다 했다.
10년짜리 비자를 보여주며 해맑게 웃던 그녀였다.
그러니까, 정치적 문제 등으로 망명 혹은 이주된 사람들에게 주는 비자는 보통 10년짜리다.
비자 처리가 워낙 까다롭고 느리고 특히나 '을'이 되는 과정에서 무기력해지기 일쑤라 가능하면 안 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갱신의 과정을 거치며 살 수 있는 권리의 기본을 가지는데 그녀는 그런 과정을 10년 패스권으로 받은 셈이다.
유학생은 물론이거니와 직장인인 나도 매년 혹은, 4년 단위로 갱신을 해야 하는 터라, 10년짜리 비자가 부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에겐 돌아갈 곳이 있고 원하면 바캉스로 가족들의 얼굴을 만나고 올 수 있는 나의 자유가 더 값진 가치일지 모른다.
내겐 이곳이 마지막 정착지야.
돌아갈 곳이 있어서 그 옵션은 늘 생각밖에 두고 지금 살아야 할 문제들을 처리하느라 늘 아등바등 현실형 이민 속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그리고 돌아갈 곳이 없어 이곳에서 새로운 터전을 뿌리내려야 하기에 아등바등 살아가는 이주형 이민자들. 프랑스라는 나라에서의 이민자들의 모습은 각기 다른 삶의 형식으로 자신만의 터전을 일꾸어 가고 있다.
조사에 따르면, 티베트인들은 1949년 중국 공산당이 중국 전 지역을 장악하면서 티베트를 불법 점거하자 자신들의 고향을 떠나 히말라야 산을 넘어 인도로 탈출을 시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현재도 여전히 위험을 동반하고 있는 탈출은 이어지고 있으며 전 세계 인도뿐 아니라 미국, 프랑스, 호주 캐나다 등 15만 명 이상의 티베트 인들이 흩어져 살고 있다고 한다.
이북에 대한 이야기만 어릴 때부터 들어왔지만 그들의 목숨을 건 탈출은 사실 피부로 와 닿지 않았던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다른 형태의 이민자로, 이방인으로 프랑스에서 살고 있는 지금, 다민족이 섞여 살아가는 이곳에서 마주하는 이민자들과 난민들의 실상이 잦다 보니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다음에 일하러 오는 날이 언제냐고 물었다.
그리고 계절이 바뀌면서 옷 정리를 했는데, 생각보다 아끼는 옷인데 안 입은 것들이 너무 많아 또 내년에 입을 거라고 박스에 넣어둔 게 있는데 혹시 괜찮다면 입어주겠냐고 제안을 했다.
혹여나 그녀에게 쓸데없는 동정심으로 받아들여지진 않을까 걱정이 앞서서, 받아보고 사이즈가 안 맞거나 본인 스타일이 아니면 헌 옷 수거함에 넣어도 괜찮다는 말도 덧 붙였다.
그러니 알 수 없는 눈물을 눈가에 글썽이며 '네가 굳이 주고 싶지 않으면 안 줘도 괜찮은데, 자기는 좋다며' 다음 샵으로 출근하는 날짜를 알려주었다.
그 흘리지 않은 머금은 눈물의 의미를 다 헤아리진 못했지만 수백 가지의 감정이 앞섰을 테다.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꾸려가는 동질감부터, 마음 붙일 곳 없는 이곳에서 그래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안도감, 스스로도 충분히 헤쳐나갈 힘이 있는 야무진 아이지만 역시나 무너질 수도 있는 사람이기에 겪을 수 있는 여러 가지 감정을 난 미처 다 알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그녀에게 힘들 땐 여기, 마음의 의지가 될 수 있는 곳이 있다고 전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 옷가지를 전해주던 날, 그녀는 주섬주섬 가방에서 귤과 티베트의 과자를 꺼내 손에 쥐어주었다.
연신 고맙다는 말과 함께.
삶의 자유를, 행복의 터전을 찾기 위해 먼 산을 바다를 땅을 넘고 온 이 곳 프랑스가 이미 그들에겐 숨통이 트일 수 있는 자유의 공간이겠지만 동시에 지금까지 해왔던 고난과 다른 고생의 길이 펼쳐질 곳이기도 하다.
프랑스라는 나라는 이민자들이 섞여 있는 곳이지만 절대 섞일 수 없을 것 같은 프랑스 부심이 있는 나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따사로운 볕이 쬐는 나른한 오후의 여유로움을, 예술과 문화가 가는 거리마다 새겨진 파리라는 문화의 집 성지에서 그들의 잠재력을, 각종 혜택도 세금을 내는 국민이라면 외국인도 관계없이 누릴 수 있는 인권이 보장된 안전과 권리를 마음껏 누릴수 있기를.
누구나 한 번쯤 오고 싶어 하는, 그리고 살고 싶어 하는 이 나라에서 당당하게 얻어낸 노동 비자로 값진 땀을 흘려 제2의 인생을 이곳에선 아름답게 가꾸어 가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