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드모아젤 Jan 31. 2019

파리에서 집을 구한다는 것은

파리지엔이 되는 첫 관문이었다.


도쿄에서 살던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적지 않은 이사를 했다.

일본 땅을 밟고 3개월 만에 부동산을 통해서 자그마한 원룸을 구했고 그 후로 두 번의 이사를 더 했다.

그리고 추가로 일본에서 한국을, 그리고 다시 프랑스로 넘어오는 국제 이사도 무리 없이 다 했으니 귀찮고 비용이 들뿐이지 내게 집을 찾는다는 것은  '찾으면 찾아지는' , 그러니까 큰 부담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적어도 파리에서 세 번의 이사를 하기까지 말이다.




파리는 도쿄에 이은 나의 두 번째 도시다.

해외 생활에서 나를 위로해줄 수 있는 가장 첫 번째가 '집'이라는 건 적지 않은 도쿄 생활로 충분히 느껴왔던지라 집값도 비싸고 구할 수 있는 집의 공급이 적어 룸 쉐어를 많이 한다는 파리였지만 나는 가능하면 원룸을 구하기를 원했다.


작아도 괜찮았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곳이라도 혹은 역에서 조금 걷더라도 상관없었다.

볕이 잘 들고 내가 집에 들어갔을 때 '아 오늘 하루도 고생했다'라고 다독여 줄 수 있을 아늑함 정도만 바랬다.



Laplace, 파리의 첫 보금자리


첫 번째 보금자리. 국제 이사로 넘어올 때는 운이 좋게 도쿄에서 미리 찾아서 왔다.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가 도시 곳곳에 있다는 조언을 받아 구글링으로 당시에는 한국인이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국제 학생 기숙사를 찾았다.

역시 검색 사이트로 찾았던 어학교와 그리 멀지 않았고 가격이나 시설면에서 꽤 맘에 들었으나 빈방이 없었다.

메일을 보내고 대기자 순번에 올라 기다리기를 한 달, 그러니까 아슬아슬하게 출국 한 달 전에 들어와도 좋다는 연락을 받았다. (지금은 정원 뒤로 새 건물이 하나 더 생기고 유학원 등과 연결되어 아시아 학생들이 상당히 많아졌다)


그곳에서 많은 추억을 만들었다. 파리 중심가에서 조금 떨어진 Laplace라는 동네는 주말이면 풀냄새를 맡을 수 있는 곳이었고 그런 동네를 산책하며 전원주택들 마당에 심어 놓은 꽃들을 보는 게 또 다른 낙이였다.

집의 편안한 기운 덕에 파리 생활에 빨리 적응하게 되었고 지방에서의 새로운 도전도 호기롭게 시작할 수 있었다.


파리에서 차로 세 시간쯤 떨어진 앙제(Angers)라는 곳에서 공부를 시작하게 되면서 나의 약 10개월간의 파리 생활은 일단락 막을 내렸다.


파리의 나의 첫 집. (일본 친구들 주최의 일본 음식 파티 / 우리집에서 종종 했던 홈 파티)


앙제에서의 집을 구하면서 프랑스에서 집을 구하려면 '보증인'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때도 구글링으로 찾은 곳이었는데 우리 집은 기숙사 같은 개념의 아파트로 그 건물을 관리하는 회사가 그 도시의 몇몇 아파트를 소유하고 관리하는 시스템이었다.


물론 파리보다는 수요와 공급이 나름 맞는 지방이어서 '프랑스인, 혹은 프랑스에 계좌를 갖고 있는 보증인'이 없던 나도 대체할 수 있는 서류들로 심사를 거쳐 무사 입주가 가능했다.

(보통 보증인이 없는 경우는 월세의 반년 치를 미리 낸다거나, 은행 보증을 받거나 혹은 전 집주인으로부터의 추천서 -집세를 꼬박꼬박 내며 별문제 없이 깨끗하게 쓰고 나간 세입자- 를 낸다거나 하는 식으로 교섭해 볼 수 있다)


지방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파리로 돌아오게 되었다.

졸업 시험과 국가 자격증 준비로 앙제와 파리를 왕복하며 집을 찾아야 할 시간이 부족했기에 다시 그 기숙사로 들어가 일 년을 더 살았다.

나중에 파리로 나와서 살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당시 기숙사에 살면서 집 내부에 관한 문제, 그리고 행정 처리와 세금 관련된 사항을 직접 발로 뛰며 처리하지 않아도 되는 수고를 던다는 게 얼마나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는지 새삼 느끼게 되었다.



나의 두 번째 집, 파리 부촌이자 오래된 오스만식 건물들이 줄지어 자리 잡은 에펠탑의 동네 16구.

지인이 귀국하게 되면서 운 좋게 넘겨받은 집이었다.

몇몇 프랑스인 집주인은 '깨끗하게 쓰고 월세를 미루지 않는' 아시아인들을 더 선호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집이 그 경우였다.

그리고 이런 경우는 유학생의 사정을 잘 알기에 까다로운 서류는 생략하고 계약에 필요한 서류만 받는다.


에펠탑과 가까운 한인들이 많이 사는 15구, 동시에 부촌인 16구의 집값을 생각했을 때 월세에 비해 크기나 위치면에서 너무나 좋은 조건이었다.

당시 전기, 인터넷, 집 보험비를 제외하고 600유로에 약 20m2 되는 집이었으니 유학생들에게 이 집주인은 구세주나 다름없었다.(프랑스에서는 학생들에게 집 조건에 따라 매달 약 100유로에서 200유로에 달하는 주택 보조금을 지원해주는 시스템이 있는데 이걸 생각하면 사실 기숙사보다도 더 좋은 조건이었다.)

 

보통 이 정도 예산에 파리의 학생들을 위한 집은 크기가 더 작을뿐더러 화장실은 공용이거나, 작더라도 간이 주방이 있으면 다행, 냉장고 위에 가스레인지 하나 딸랑에 싱크대는 화장실 세면대로 대체하는 집도 있으며 그나마 집안에 있는 화장실은 문 대신 커튼으로 되어 있는 집들도 꽤 많다.


그나마 리모델링이 잘 되어 있는 집이면 작아도, 화장실이 공용이라도 (세입자가 별로 없는 경우는 단독 화장실이 될 수도 있다) 상관없지만 파리의 여러 집들을 보러 다녀본 결과 유학생 수준에 잘 맞는 조건 좋은 집은 공급에 비해 수요가 너무 많아 찾기가 힘들다.


볕이 잘 드는 곳 창문에는 늘 화분을 키웠다. 1년동안 정들었던 우리집.


이런 조건 좋은 집에서 살 수 있는 기간은 딱 1년 정도였다.

학생만 받는다는 조건이었고, 나도 졸업 후에 취업 비자를 받아서 더 남을 건지 한국 혹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갈 건지 여러 가지 옵션은 있었지만 1년 뒤 결정은 그 상황의 흐름에 맡기기로 했다.





결국 1년 뒤 나는 파리의 다른 집으로 이사를 해야 했다.

걱정했던 그리고 험난했던 취업 비자를 무사히 받았고, 프랑스 법 대로라면 난 그 집에서 더 살아도 되었지만 입주 전에 주인과 했던 약속이라 굳이 법까지 따져가며 감정싸움을 하긴 싫었다.


다행히 친구 남편이 이사에 필요한 보증을 서주기로 했고, 부동산을 통해 집을 구할 필요한 서류는 모두 갖춤과 동시에 집을 구하기 시작했다.

계약 만료 두 달 전이었다.

부동산 사이트와 어플, 중고 나라 같은 사이트로 집주인이 올려놓은 물건을 보기도 하고 한국, 일본 유학생 커뮤니티는 하루에도 몇 번을 들여다봤다.


두 달 동안 계약할 뻔했던 집들을 여러 사정 때문에 놓치고 한 달간의 여름 바캉스가 시작되었다.

이사할 짐은 살던 집에 잠시 맡겨두고, 한국으로 바캉스를 떠난 친구 집으로 들어갔다.


9월이면 학기가 시작되는 터라, 내 예산으로 찾을 수 있는 집은 거의 나가고 없었다. 즉, 바캉스 기간은 이사철이 아니였다.

그렇다고 예산을 크게 올리자니 학생이 아닌 터라 주택 보조금을 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고 가능하면 집 렌트에 투자하는 비용을 최대한 절약하고 싶었다.

이사 시기를 조금 늦춰 잡으면 집이 더 나올게 분명했기에 바캉스 기간 동안 매일 새로운 집이 없나 확인하고 부동산에 전화를 돌리며 하루를 시작하는 게 나의 일과였다.


담당자가 부재중이니 나중에 다시 연락하세요.


그나마 맘에 드는 물건이 나와서 연락을 돌리면 10군데 중 2군데 정도 메일로 답장이 온다.

프랑스는 부동산이 서류부터 심사를 한다. 일단 구두로 필수 조건을 물어본 뒤 해당이 되는 사람들에게 방문할 장소와 시간을 알려주는 식이었다.

(방문 시간은 다수를 위한 시간이므로 내가 그 스케줄에 맞추어야 한다)


필수가 되어야 하는 조건은 프랑스인 보증인(집 렌트 값의 세배 이상의 월급 명세서와 전년도 소득신고서 복사본 포함)이 있을 것. 세입자의 서류(학생인지, 혹은 정직원인지 계약직인지에 따라 재직증명서와 월급 명세서, 전년도 소득신고 복사본 역시 포함) 등이 가장 기본이 되고, 그 외 집주인과 부동산에 따라서 추가로 요구하는 서류가 있을 수 있다.


장소와 시간을 받아 집을 보러 가면 인기가 있는 집은 이미 10팀 정도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오디션 현장인 줄 알았다. 그야말로 집 대란에서 세입자 면접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뒤 본격적인 서류 심사가 들어가고, 집주인과 부동산이 원하는 서류에 합당한 사람만이 연락을 받으니 세월아 내월아 마음에 드는 물건을 맘에 두고 기다릴 순 없으니 또 매일 같이 위와 같은 집 찾기 일과를 반복했다.


집을 볼 수 있는 날이면 합격 여부를 떠나 그래도 좋았다. 어찌되었든 세입자 '후보'에는 들어갈 수 있는 거니까.

근데 간혹 전화로 서류 여부도 묻기 전에 외국인인걸 알아채고는 집주인이 채택하지 않을게 뻔해 보였는지 담당자가 부재중이라거나, 그 집은 방금 나갔다거나 하는 식으로 둘러대거나 할 때면 여기가 차라리 한국이었으면 했다.


파리에서 집 구하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다니


이 많고 많은 집 들 중에 내 몸 하나 뉘일 곳이 없다는 게 참으로 서러웠던 기간이었다.

걱정하는 친구들이 짐을 서로 맡아주겠다고도 했고, 당분간 자기네들 집에 들어와 살다가 천천히 찾고 나가라고도 하면서 위로해줬지만 내 공간에서 내 짐을 풀고 살고 싶었으니 조금 더 욕심을 내기로 한지 열흘 째, 드디어 집주인이 직접 올려놓은 물건을 낚아 계약을 하게 되었다.


드. 디. 어! 집을 본지 하루 만에 계약하고 그 다음날 바로 이사를 했다.

그러나 맞는 집을 찾는 것도 어려웠지만 좋은 주인을 만나는 것도 역시 어려운 일이었다.


프랑스인 집주인은 '모 아니면 도'라고 했던 친구들 말이 생각났다.

아주 좋거나, 아주 악질이거나.


우리 집주인은 후자였다.

프랑스 법을 잘 모르는 외국인인 점을 이용하여 아주 교묘하게 본인이 유리한 쪽으로 다 가져가려 했고 그걸 빌미로 조금씩 정신적 스트레스를 가하는데 그게 본인의 취미인 양 보일 정도였다.

처음엔 다시 집을 구해서 나가느니 집 조건이 나쁘지 않고 위치가 너무 좋아서 버티고 싶었지만 집주인이 꿈에도 나올 지경이어서 결국 한 달 만에 또 이사를 감행해야 했다.

퇴실하던 날 정산할 때까지 각종 세금 명목으로 탈탈 털어 갔다.


프랑스인 친구들이 같이 동행해줄까 했지만 그건 불어의 문제가 아니었다.

악질 주인은 몇십 년간 렌트업을 하던, 법에 빠삭한 노인이었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내 멘탈을 뒤흔들었을게 뻔했다. 나는 그냥 '코 묻은 돈 몇 푼 더 뺏어가서 얼마나 더 잘 사실지 모르겠지만 잘 먹고 잘 사세요' 정신으로 해탈하며 끝냈다.


집 사기도 많고, 더 악질인 집주인에게 당했다는 유학생들의 후일담을 들었을 때도 설마 나는 안 당하겠지 했다.

조심의 조심을 기하는 나였지만 항상 나쁜 운은 같이 온다고 했던가, 해외 살이 10여 년 동안 집 때문에 이렇게 마음 고생을 한건 처음 었다.



친구네 고양이 도비가 놀러 왔던 날. 고양이는 바깥을 보는 일로 사냥을 대신한다고 한다.
그렇게 한 달 만에 또 이사를 했다


새로 이사한 집은 정식 부동산을 통했다.

프랑스인 게이와 룸메이트가 될 뻔했던 16구의 집을 시작하여, 에펠탑 앞에 자리한 리모델링한 콩집(정말 작은데 에펠탑 뷰라서 가격이 시세보다 훨씬 비쌌던 집),  느낌 있는 카페와 Bar가 많아지고 있는 젊은이들의 동네 11구, 파리에서 커뮤니티가 제법 큰 중국인 부동산이 하는 곳 등등 여러 파리의 집을 보면서 파리지엔이 되는 길이 녹록지 않음을 몸소 느꼈다.


그러나 유학 초기에 겪었어야 할 집 찾는 고생을 이제야 하게 되어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했다.

다들 한 번씩 겪는다던, 심지어 그 문제로 인해서 지쳐서 귀국하기도 하던 다른 유학생들과 달리 운이 좋아 지난 시간 동안 집 고생 없이 학업에만 집중할 수 있었고, 어느 정도 파리 생활이 익숙해진 시점이어서 버틸 수 있는 멘탈였다.


집 찾기가 어렵기로 악명 높은 런던을 포함, 파리에서 집 구하기 신공이 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했던가.

서른이 넘어 시작한 유학은 '무인도에서도 살 사람' 이였던 나를 '지구 어디에서도 살 강한 잡초'로 업그레이드 시켜놨다.


설마 이러다 한국으로 귀국하는 거 아닌가 내심 걱정하던 몇몇 지인들은 감사하게도 자기네 집에 들어와 살라고 제안을 해 줬지만 이방인에게 집이 주는 위로가 얼마나 큰지 잘 알았기에 가능하면 '내 공간'을 가지고 싶어서 했던 고생이었다.


그리고 그 막이 이쯤에서 내리는 줄 알았다.



그렇게 돌고 돌아 찾은 나의 보금자리. 볕이 잘 들어 좋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



이사를 하고 일주일도 되지 않았다.

친구가 보름 정도 이사한 집에서 같이 머물기로 했고 나는 친구를 위한 요리를 한상 차리고 그렇게 '고생 끝'을 축하하며 기분 좋게 잠들고 일어났던 날 아침, 나는 냉장고 뒤에서 기어 나오는 뭔가를 발견했다.


맙소사.

파리에 쥐가 많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고 많이 보아왔지만 그걸 내 집에서 발견하게 되다니.

내 비명 소리에 놀라 다시 숨어버렸지만 그 녀석(이하 칭함) 이 분명했다.

(참고로 나는 어릴 때부터 그 녀석과는 보면 경기를 일으키거나 그 녀석의 이름 조차 입에 담지 못하는 관계였다)

그러니 이건 어쩌면 내 인생 최대의 참사였다.


패닉이었다. 출근은 해야 하고, 친구는 나만큼 놀랐고 우리는 살면서 한번도 그걸 처리해 본 적이 없다.

아니할 수 없다. 눈을 질끈 감고 얼어버리는 나인데.



약 한 달 간의 사투였다.

프랑스 답게, 일 처리는 굉장히 빠르지 않았지만 며칠 만에 수습을 했고, 그 트라우마가 한 달가량 갔으니까.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알고 싶지도 않았던 그 녀석의 습성에 대하여 알게 되었고, 생각보다 많은 유학생들, 프랑스 인들이 나와 같은 경험을 한 것을 알게 되었다.(그랬다, 여긴 파리였다)


사투를 벌이는 동안 또 이사를 가야 하나 파리 생활에 회의를 느낄 뻔했지만, 우리 집이 운이 나빴을 뿐이라고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살고 계신' 이웃들이 많이 도와주신 덕에 그 트라우마를 간신히 접고 애정을 주기로 했다.


이로써 애증의 도시였던 파리에서 난 제대로 파리지엔으로서의 '집' 신고식을 치렀다.

아무나 겪지 못할, 누구도 겪어서는 안 될 신고식이었지만 지나고 보니 인생의 큰 공부가 되었노라 말할 수 있었던 짧고 굵은 여정이었다.



한국이었으면 까다로운 서류에 맞는 조건이 되어야 하는 고생도, 전화에서 문전박대당하는 일도 렌트비로 매달 남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채워주는 일도, 초대받지 않은 손님을 맞이 하는 일 때문에 고생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남의 나라에서 '이방인'으로 산다는 것이 어디 그렇게 쉽던가.


앞으로 또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갈지 모르지만 파리지엔이 되는 관문을 여하튼 무사히 치른 덕에 이젠 그곳이 어디라도 강한 멘틀을 앞세워 살아갈 수 있을 듯하다.





파리의 '초대받지 않은 손님'에 대해 저처럼 경악하실 독자분이 계실까 염려하여 따로 다른 연재에서 다루겠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방심하는 순간, 털리는 이곳은 파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