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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드모아젤 Jan 08. 2019

방심하는 순간, 털리는 이곳은 파리

낭만 뒤에 가려진 파리의 악명 높은 소매치기

"저기 혹시 한국 분이세요? "


새벽 한 시가 갓 넘은 시간.  집으로 가는 심야 버스를 타러 가는 길목에서 여행객 즈음으로 보이는 한국 청년이 도움을 요청해왔다.

방금 휴대폰을 도난당했다고 가까운 경찰서를 검색해 달라고 했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그저 위로의 말 밖에 없었다.


파리에선 휴대폰이든, 카메라든 지갑이든 한번 내 손을 떠나면 돌아올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까울뿐더러 이 시간에 문을 연 경찰서에선 이런 류의 사건들은 우선순위에서 밀려 입장 자체를 거부당하기도 하니까.


유럽 여행을 해 본 여행자라면, 혹은 그런 지인을 뒀다면 한 번씩은 들어봤을 법한 달갑지 않은 에피소드이지만 낭만 가득한 유럽을 꿈꾸고 와서 하루아침에 여행의 동기를 잃게 만드는 악명 높은 소매치기는 아직 파리에 만연하다.

일본에서 직장을 다니던 시절, 혼자서 일주일간 이태리로 여행을 떠났을 때다.

악명 높은 소매치기를 염두하여 갖가지 방법으로 소지품들을 몸과 최대한 가까운 곳에 여기저기 숨겨놓고 여행을 했더랬다.


유럽 초행길이라는 초보 딱지가 티 나지 않도록, 늘 주위를 경계한 덕분에 친구가 살고 있던 밀라노로 가는 날까지 아무 탈 없었고 그렇게 무난하게 여행이 이어지나 싶었다.


오랜만에 재회한 친구와 그의 친구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 지하철을 탄 순간, 친구는 당황한 표정으로 가방 속에서 손을 더듬더듬거렸다.

그리고 지하철 문이 닫히던 순간, 소리쳤다.

"내 지갑!!"


유럽의 소매치기들의 수법은 참 다양하기도 하거니와 (갓 쇼핑을 마친) 쇼핑백을 든 여행자들과 초행길에 설렘 표정을 한 아시아인들을 특히 노리기 때문에 사실 눈뜨고 코베이기 십상이다.


몇 년을 이태리에 살면서 항상 누구보다 조심을 해온 친구였지만 이날은 오랜만에 멀리서 온 나와, 친구들과의 나들이에 살짝 들뜬 기분이었을 거다. 매일을 낯선 곳에서 꿈을 향해 치열하게 살아가던 친구의 오랜만의 달콤한 시간이었을테니까.


교통 카드를 찍고 가방에 넣는 모습부터 포착해온 가족 단위로 포장한 소매치기들의 표적이 된 순간부터 우린 눈치를 채지 못했다.

모녀로 추정되게끔 연출을 한 뒤 신문지로 작업하는 손을 가리면서 탈까 말까하며 지도를 펼쳐서 주위를 분산시켰고 지하철 문이 닫히기 직전에 본인들의 목표를 달성한 뒤 뛰어내린 거였다.


다음 날 납부할 학비를 현금으로 미리 뽑아놓은 친구는 패닉 상태였고 나 또한 3초 안에 벌어진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꽤 충격적이었다.

근처 지하철 역들과 멀지 않은 곳들을 뒤진 결과 겨우 지갑과 카드는 찾았지만 결국 그날 친구는 끝내 울어버렸다.


밀라노의 이방인이라 서러웠던 친구의 참아온 눈물이었다.


이방인이 아니더라도, 파리지앵에게도 이런 일은 흔하게 발생한다.


지하철은 물론이거니와 거리에서 그리고 카페에서도 우리는 항상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함을 무의식 속에서 잡고 있는 거다.


카페에서 자리를 맡기 위해 가방을 먼저 둔다는 일은 상상할 수 없을뿐더러, 화장실을 다녀오기 위해 자리를 비우는 일도 귀중품을 챙겨서 간다거나, (믿을 만한 ) 옆 사람에게 잠시 물건 좀 봐달라고 부탁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여간 신경 써야 하는 일이 아니다.


심지어 본인이 자리를 하고 있음에도 눈치 못 채는 사이에 나가면서 가방이나 물건을 슬쩍한다거나 테라스 석에 앉아서 친구와 수다에 빠져 있을 때 뛰어와서 집어간다거나.

즉, 가방과 휴대폰은 항상 내 손과 무릎, 시선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항상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다.


한 번은 스벅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여행객으로 추정되는 한 아시안 남성이 캐리어 가방 두 개를 들고 내 옆 테이블에 착석했다.

여자 친구를 기다리는 듯해 보였던 아시안 남성은, 그러고 한 몇십 분이 지났을까.

자기 가방 하나를 본 적이 있냐고 물어왔다.


매장 내 카메라를 확인한 결과 왼쪽 문에서 들어온 행인이 쥐도 새도 모르게 캐리어 가방 하나를 쓱 빼돌려 다른 문으로 나갔던 거였고, 휴대폰을 보느라 미처 그 장면을 놓친 남자는 허탈함에 쓴웃음만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새로 생긴 습관


파리에 온 뒤로 새로 생긴 습관이라 하면, 잃어버려도 아깝지 않을 휴대폰과 지갑과 가방을 들고 나가게 되었다는 점,  덕분에 멋부리기 좋은 파리에서 다른 백이 아닌, 에코백이 늘어났고 혹여라도 가방을 살 때는 항상 지퍼가 있는지, 안주머니의 깊이와 지퍼의 유무를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그것뿐인가, 지하철이든 계단이든 뒤에서 누가 붙는 것 같다 싶으면 가방부터 앞쪽으로 당기는 건 기본이요, 사람 많은 곳에서는 폰을 잘 보지 않게 되고 수시로 가방 속의 소지품을 확인하는 게 일상이 되어 버렸다.


살면서 한 번도 물건을 분실해 본 적이 없는 나는 내가 조심하면 되는 걸로 족했다.

그런데 이 도시는 뻗치는 손까지 뿌리쳐서 날 보호해야 한다니. 여간 기가 빠지는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작년 봄, 파리에서 처음으로 휴대폰을 분실당했다.

일하는 샵에 든 좀도둑은 돈이 될 만한걸 찾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 내 폰이라도 들고 태연하게 밖으로 걸어 나와 (심지어는) 차에서 꽃을 빼서 샵으로 들어가는 내게 고객인척 질문까지 해댔다.


몇시간 후, 휴대폰이 없어진 걸 깨달은 순간, 그 태연한 척하던 소름 돋는 녀석의 얼굴이 떠 올랐지만 이미 때는 늦었었다.

후에 카메라 증거를 첨부하여 두 번의 경찰서 진술도 마쳤지만, 결국 그게 다였다.



이런 테라스 석이라도 앉는 날이면, 가방은 내 등뒤나 무릎이 지정석이다.

우리는 가장 기본적인 것들이 보장이 될 때 안정감을 느낀다.

내 나라라면 신경을 써도 되지 않을 일들이 이방인의 삶 속에선 수없이 일어난다.


도전과 실패는, 내가 선택한 이방인의 삶에서 예상가능한 범위의 수치이지만 이런 예상 밖의 변수로 안정을 위협하는 사건들이 터질 때면 꼭 이렇게까지 기를 붙잡으며 살아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가끔 휴가차 들르는 한국과 일본에서도 파리에서의 긴장감을 바로 내려 놓지 못한 채 늘 가방과 폰을 손에서 자유롭게 풀어내지 못하고 긴장하는 나를 발견하기라도 하면 '아, 이게 파리라서 하게 되는, 굉장한 에너지 소모였구나'를 깨닫는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만, 가끔은 씁쓸한 기분이 든다.

이 낭만이 가득한 파리에서 사는 일이 그리 달달하지만은 않음을 마주치기라도 하는 날이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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