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크리스천이다. 오사카 한 달 살기를 하면서 매주 교회에 가는 것은 나에게는 중요한 일이었다. 다행히 나와 함께 했던 내 친구도 크리스천이었고 친구가 출석하는 한인교회가 있었다. 그래서 친구가 다니고 있는 교회에 나도 매주 함께 가서 예배를 드리고 사람들과 교제했다.
내가 간 교회는 전체 인원이 약 3~40명 정도 되었는데 그중 일본인이 한 3분의 1 정도 있었다. 대부분 여기 있는 한국인들과 가족 관계이거나 지인을 따라 나온 경우이지만, 간혹 혼자서 이 교회에 출석하는 일본인도 있었다. 그런 경우를 보면 그 사연이 궁금해지기도 했다. 어쩌다 자신의 본향에서 타국 사람들이 세운 교회에 나오게 된 것일까. 우리로 치면 서울에서 일본인들이 세운 교회에 한국인 혼자 나가는 것인데 말이다. 기회가 없어 그 사연을 물어보지는 못했다.
교회 사람들은 단지 5주만 교회에 출석하는 나를 너무나도 반겨주었다. 다들 이런저런 계기로 짧게는 10년에서 길게는 30~40년 전에 한국에서 일본으로 이민을 오거나 귀화를 한 분들이었다. 한국에 가족들과 친구들이 있어 가끔 오가고는 하지만 이제는 일본 생활이 훨씬 편한 듯 보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나를 반겨줬던 두 부부가 있었다. 한 부부는 한국인 남편 J과 원래는 한국인이었으나 일본으로 귀화한 아내 N이었고, 또 한 부부는 일본인 남편 K과 재일교포 아내 A였다. 나이대가 모두 비슷해서 우리는 주일마다 예배를 마치고 함께 식사를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히 일본인 남편이었던 K가 나를 엄청 좋아하며 반겨 주었다. 나 역시 호감스러운 그의 모습에 그와 친해지고 싶었다. 그러나 K는 한국어를 거의 하지 못했고, 나는 일본어를 거의 하지 못했다. 우리는 그렇게 언어의 장벽에 막혀 서로의 호감(?)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채 눈빛만 주고받으며 열심히 파파고와 구글 번역기를 돌리고는 했다. 하루는 예배를 마치고 식사를 다 하고 나서는 K가 다 같이 편의점에 가서 커피 한 잔을 하자고 했다. K가 나에게 커피를 한 잔을 사주고 싶다고 한 것이다, 한국인에게는 커피 한 잔 사는 것이 크게 대수롭지 않은 일이지만 일본인은 친구들끼리 밥 한 끼, 커피 한 잔을 해도 대부분 각자 계산한다. 그런 일본의 문화 속에서 K가 나에게 커피 한 잔을 사주는 것은 그의 진심이 드러나는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나중에 N이 말해주길, "K가 돈을 잘 안 쓰는데 커피 사줬다는 것은 진짜 좋아한다는 거예요."라고 했다. 그랬구나. 이렇게나 나를 좋아해 주고 환영해 주니 기쁜 일이었다.
일본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일도 좋았다. 내가 출석했던 교회는 오전에는 한국어 예배로, 오후에는 일본어 예배로 진행되었고 이를 N이 동시통역을 했다. N은 교회에서 중추적인 인물이었다. 우선 한국어를 일본어로, 일본어를 한국어로 동시 통역하는 일을 매주 하고 있었다. 또한 노래도 잘하고 피아노도 잘 쳐서 찬양팀으로 섬기고 있기도 했다. 그의 남편 J 역시 감미로운 목소리와 기타 실력으로 오후예배의 찬양팀을 리드했다. 한국어 예배 시간에도 중간중간 찬양은 일본어로 진행되기도 했는데, 그럴 때 나도 모니터 화면에 나온 일본어 발음을 따라 일본어로 찬양을 따라 불러보고는 했다. 그 시간이 정말 은혜로웠다. 일본에 와서 일본어로 일본인들과 함께 찬양을 부르는 일. 너무나 귀한 경험이었다. 더욱이 매일 조금씩 공부했던 히라가나, 가타카나는 거기서도 빛을 발했다.
특히 마침 내가 오사카에 있는 기간 동안 D선교사님이 내가 출석하던 교회에서 사흘간 특별 집회를 했다. D선교사님은 내가 유튜브에서 설교를 자주 들었던, 나의 신앙적 멘토 같은 분이다. 그의 인천 집회에도 직접 가서 참여한 적이 있을 만큼 그의 설교를 좋아했고 열정을 본받고 싶은 그런 분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마침 내가 오사카에 있는 동안 이 교회에서 집회를 한다니 반가운 일이었다. 그렇게 사흘 중 이틀을 꼬박 집회에 참석했다. 집회가 다 끝나고는 선교사님과 잠시 이야기도 나누기도 했다.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내 마음에도 뭔가 불씨가 심긴 것 같았다. 일본이라는 나라를 더욱 마음에 품게 되었던 계기였다.
한 달 살기를 마치고 돌아온 지금도 종종 한인교회에서의 장면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비단 예배를 드리는 장소로서의 교회의 모습뿐만 아니라 그곳에 모여있는 공동체로서의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일본 땅에 와서 살고 있지만 그들은 여전히 한국을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한국인이었다. 여행을 다니면 주로 혼자 다니거나 친구와 다니는 일이 대부분이었기에 그런 공동체와 교제하는 일이 더욱 특별했다. 가끔 수십 년의 오랜 시간 동안 타국 생활을 한 사람들의 글이나 인터뷰를 보다 보면, 아무리 타국에서 오래 살아도 결국 그곳에서는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다는 설움을 알게 되기도 한다.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는 해외에서 한 달이라도 살아보기를 낭만으로 여기며 꿈꾸기도 하지만, 그곳에서 살고 있는 우리 교민들에게는 그곳에서 산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내가 태어난 나라에서 내가 어릴 때부터 함께 한 사람들과 미운 정 고운 정 쌓아가며 평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해서 잊고 있던 소중함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국의 과도한 경쟁과 팍팍한 삶에서 벗어나 비교적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기도 했다. 일본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들이 대다수 입을 모아 말하는 것은 이랬다. "아무래도 여기(일본)는 한국보다는 사람들 눈치 덜 보고 하고 싶은 일 하며 사는 것 같아요. 여기서는 돈이 그렇게까지 중요하지는 않아요." 그 점이 부러웠다. 실제로 해외에서 살기로 결심한 사람들의 상당수는 한국에서의 치열한 경쟁 분위기에 지쳐 상대적으로 여기에서 자유로운 타국에서의 삶을 선택하기도 한다. 무엇이 옳다고는 할 수 없으며 철저히 개인의 가치관에 따른 선택일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깨달은 것은 나 역시 이 경쟁 속에서 계속 아등바등하며 힘겹게 살아가는 것만이 나의 유일한 선택지는 아니라는 점이었다. 비단 반드시 해외로 나가지 않아도 말이다. 모두가 같은 삶을 좇는 이 사회 분위기 속에서 한 발만 물러서 보면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음을 깨닫는 것. 이것의 여행의 진짜 의미가 아닐까. 더 넓은 세상을 보며 내가 움켜쥐고 있던 나만의 살아가는 방식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이것이 한 달 살기가 내게 남긴 가장 큰 의미다.
교회에서의 두 부부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재일교포 아내 A가 지나가듯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A는 30대 중반의 여성이자 7살 된 여자아이의 엄마인데, 주중에는 로손(Lawson)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한 번은 편의점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하다가 숙소 근처에 어떤 편의점이 있냐고 물었다. 그래서 친구네 집 근처에는 세븐일레븐이 가장 가깝다고 말하자 그녀는 장난스레 발끈하며 "로손은 없어요? 편의점은 로손 가야죠!"라고 웃으며 말했다. 그 모습이 새삼 새로웠다. 비록 아르바이트임에도 자신이 일하는 동안에는 자신의 직장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그 일을 기쁜 마음으로 하는 듯한 그 마음이 느껴졌다. 그녀만의 특성일까, 아니면 일본인들의 보편적인 가치관일까. 정확히는 알 수 없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나가듯 했던 그녀의 한 마디가 나에게는 큰 울림이 되었다. 그래, 세상이 정해놓은 대로만 꼭 살지 않아도 된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