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관람평]살인자의 기억법

나는 누구인가: 심연에서 건진 그리움

by 쓴쓴

철학자들이 '오토노에틱 의식'이라 부르는 정체성은, 시간이나 장소와 관계없이 자신의 경험을 자신의 것으로 알게 만드는 뇌의 능력이다. 신경과학자들은 기억에 관한 서사적 서술과 몸에 남겨진 습관 이상의 경험들이 이룬, 복합적인 무언가가 자아를 이룬다고 말한다.


알츠하이머는 자아의 서술을 멈추게 하고 이전의 서사를 조각내어 버린다. 그래서 역으로 이 병은 우리의 뇌가 통합성과 일관성에 집착하는, 곧 '나'라는 의미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기억을 방해받고 잃어가는 이들은 과거의 어린 자신으로 후퇴하곤 하는데 그곳에서 아직 해체되지 않은 '명확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어서다.


때문에 자아라는 환상에 대하여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순간의 느낌만큼이나 안개 같은 것이라고. 그런데 환상을 경험하는 자아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자아를 없다고 가정하면 과연 누가 이 환상에 속고 있는 중일까.


자신이 살인자로 태어났다고 고백하는 주인공이 스러져가는 기억과 벌이는 사투는 어쩐지 괴기하다. 자신이 살인자라는 사실과 그것을 감춰야 한다는 내부 규약마저 사라진다. 그런데 살인을 하던 기억은 몸에 남는다. 이 모습에서 관람객은 자신을 이루는 것들에 관해 고민하게 된다.


나는 무엇으로 '나'를 결정하는가. 자신의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이 더 이상 어떤 의미로도 읽히지 않고 '나'라는 의미조차 흩어진다. 이때 모든 해석된 세계와 멀어져 가는 자는 무엇을 붙잡아야만 하는가.


나답게, 라는 말처럼 자아는 얼마나 약하거나 또는 얼마나 분명할까. (이것을 말하기 위해, 이쯤에서 소설과 영화가 주인공을 제외하고 다르게 구성되었음을 밝혀야 할 것 같다. 영화가 스핀오프를 택했지만 분명한 아이러니를 소설과 공유하고 있다는 점을 알리기 위해서다.)


이러한 자아의 역설은 딸에 대한 주인공의 반응 혹은 집착이다. 희미해져 가는 의식이 딸을 지키려는 의지로 깜빡인다. 이것이 역설적인 지점이다. 무엇이 그를 딸을 지키려는 살인자로 만들었을까. 살인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채운 이에게 딸은 어떤 존재인가.


(소설을 먼저 접하고 영화를 본 필자는 영화가 밋밋하게 느껴졌다. 무엇이 영화와 다른가, 하고 책 내용을 다시 떠올리다 다시 소름이 끼쳤을 정도였다. 소설이 주는 상상력이 영상을 압도하는 흔한 경우일 수도 있겠지만 필자 영화와 다른, 딸에 관한 소설의 표현에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