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람평]신과 함께 - 죄와 벌

인과응보의 틈

by 쓴쓴

사람들의 간절함 혹은 신앙이라 불리는 믿음은 현실이 어떠하길 바라는, 곧 소원이 투영된 세계를 그려낸다. 실제로 오래전부터 인간 세계는 현재의 삶들을 지탱한다 믿는 법도를 연구했고 발명했다. 그리고 그것을 지지하는 사후세계에 관한 상세한 그림으로 이 믿음들을 재차 강조하고 증명하려 했다.


때때로 기복신앙으로 치부되는 어떠한 정성들과 저주는 이 세상에서 감히 이룰 수 없는 혹은 이루어지길 바라는 내용을 담았다. 그리고 이를 들을 대상을 향해 빌도록 사람들을 종용했다. 귀가 있는 자가 누구인지 간에 '귀를 가진 자'도 사람이 가진 측은지심을 가지고 있기를, 또는 특정 인물과 같이 불의하지 않기를, 무엇보다 공공의 선을 사랑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 결과, 우리는 지금도 바란다. 물론, 사후세계를 사모하는 이전 세대의 사람들과 달리 현대인들은 현실의 인과응보를 더 추구한다. 영화의 부제가 '죄와 벌'인 것에서 착안한다면, 현재의 우리는 현실의 죄의 대가를 지금의 벌로 갚아내길 바란다.


그럼에도 우린 바란다. 때로는 저승이 이승에 개입하길 원한다. 너무 안타까운 일 앞에, 현실 세계가 만들어내지 못하는 기적을 대신해 우리의 한숨을 단숨에 거둬낼 초자연적이고 초월적인 힘을 바란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저승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리는 영화가 이와는 반대로 주제를 펼쳐내 간다. 이승이 저승에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관람객의 눈을 사로잡는 장면은 주인공이 이승의 업보로 받는 저승의 심판만이 아니다. 저승의 차사가 망자를 위해 이승의 일에 개입할 때마다 망자의 저승이 요동치는 것에서 우리는 의아함을 느낀다.


그리고 그 정점에 염라대왕의 선택이 있다. 최후의 심판대에서 염라대왕이 말하는 저승 헌법의 1조 1항은 이승의 사람이 내린 용서에 관하여 저승이 심판하지 않는다, 이다. 다시 말해, 이승의 용서가 저승의 용서를 확정 짓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 즉 용서를 받아내기 위해(스포일러 될 수 있으므로 간략히 설명한다) 염라는 저승의 차사들이 이승의 일에 개입하는 것마저 시험하고 허용한다.


초월적인 힘이 세상을 휘어잡는 세계관에서 관객이 발견하는 세상은 유한한 이들의 결정을 받아들이는 초월의 세계다. 저승은 이승을 대신해 벌을 내리는 듯하지만 더 나아가 이승을 존중하며 이승을 이롭게 하려 돕는다.


여기서 인간들은 세계의 빈틈을 발견한다. 주인공이 맞닥뜨리는 연이은 은총은 무슨 예외인가, 하고 말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인과응보는 죄와 벌로만 이루어져있지 않다. 벌은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법에 따르는 죄 그리고 죄에 따르는 벌로는 어느 것도 새롭게 할 수가 없다.


수치심을 아는 '귀인(貴人, 주인공)'에게 내려진 인과응보에는 숨겨진 틈이 있다. 그것은 수치를 아는 힘이다. 신 앞에서 자신의 수치와 잘못을 그대로 드러내는 귀인의 황당한 선택이 역설적으로 기회의 문을 연다.


우리가 주목할 점은 이곳에 있다. 사람들이 옳으며 귀하다 믿는 가치에 수치심이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인과응보에는 죄와 벌만 있지 않다. 수치가 있고 은총이 있다. 그것이 곧 상이자 용서가 된다. 그래서 이곳에 새로운 것이 만들어진다. 벌만으로 만들 수 없는 가치, 용서라는 사랑이 탄생한다.


사람들은 간절한 믿음으로 현실을 자신의 '세계'로 이해한다. 누군가는 이를 지지하는 사후세계를 그리지만 어떤 이들은 그 간절함을 따라 줄곧 하나의 용서를 이승에 더하기도 한다. 당신이 사후세계를 믿든 믿지 않든, 하나의 인과응보의 틈을 만들어내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좋은 일일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것이 늦지 않은 일임을 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고.


(함께 읽기 좋은 필자의 글을 첨부한다.)

https://brunch.co.kr/@enormous-hat/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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