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것들

마감 시간이 다가오기 전에

by 쓴쓴

'이반 일리치'의 말이 옳았다. 산업 구조는 우리를 무능력하게 만든다.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자급자족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과거의 사람들과 달리, 우리는 모든 것을 상품으로 사야만 한다. 때문에 이반은 너무 많은 생산을 장려하는 사회 풍속을 꺼려했다. 그는 절제가 접목된 산업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저작과 사회운동으로 평생 역설했던 철학자였다.


설명도 없이 낯선 철학자의 주장을 인용하는 필자의 글이 당혹스러우셨는가. 갑작스레 툭 튀어나온 이 무례한 글을 읽어나가야 할까 싶었을 거다(참고로 이반 일리치의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에서 요약 발췌했다). 극적인 등장을 위해서였음을 늦게나마 밝히며 용서를 구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어젯밤 내가 살던 동네에 정확히 반대되는 일이 일어났다. 삼층짜리 집이 하룻밤 사이 사라졌다.

사라진 건물, 남겨진 잔해

의, 식, 주. 이것은 삶의 질을 본격 논할 수 있는 '토대'이자 삶이 시작되는 기초다. 입는 것, 먹는 것, 사는 것 모두 중요하지만 그중에서 거주지, 곧 집을 구하려는 욕망이야말로 우리 생의 특징을 가장 잘 그려낸다.


자급자족에서 가장 멀어진 이것, 바로 이반이 말한 전문가에게 빼앗긴 것이다. 우리는 집을 스스로 지을 수 없다. 법이 보장하지 않는 방식으로 지은 집은 허가받지 못한 건축물로 취급되어 허물어다. 그러니 집이야 말로 현대인의 삶과 가장 비슷하다. 우리는 우리 몸과 마음을 스스로 진단할 수 없다. 전문가의 진단이 없다면 '적절하게' 돌보기도 벅차다.


뿐만인가. 인간의 몸은 그저 거주하기만 하지 않는다. 땅에서 한시도 떼어놓을 수 없는 몸이다. 땅에 기생하여 빌어먹고 사는 몸이자, 삶의 일부와 삶 이후의 영원도 묶어둘 땅이 필요한 육신이다. 어딘가에 태생적으로 묶여있는 삶, 현실적인 문제로서 우리의 생이 그려질 바탕이다.


이것은 세웠다 쓰러트리는 건축의 사명이자, 세워졌다 스러지는 건물의 운명과도 같아 보인다. 우리는 세상에 나타나 얼마를 그 자리에 있을지 모른 채 살다가 땅을 향해 천천히 무너져 눕는다. 마침내 잔해가 된 건물이 버려지듯이, 구매한 상품이 마모되어 결국 매립되듯이 나의 몸은 내가 살던 곳에서 떨어진 어느 장소에 묻힌다.


그렇게 역설적이게도 사람은 자신의 뿌리가 매우 우연적이라는 현실을 본다. 부모를 택한 적도, 자녀를 택한 적도 없다. 태어난 곳, 나의 성격과 외모, 어느 것 하나 나의 통제권 안에 붙들려있는 요소가 없다. 기생해야 하면서도 평생을 부유하는 존재로 사는 존재다. 이러한 역설을 인간의 조상들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나 보다. 우리가 아는 역사의 인물들은 자신을 땅과 닮은 넓고 평평한 것들 위에 자신을 빼곡하게 담으려 노력했다. 그것도 아주 오래도록.




중학생이었을 시절, 일 년 가까이 짝꿍으로 보낸 친구가 있었다. 내 입장에서 절친과도 다름없었다. 제발 더 가까운 사이가 있었을 거라 희망하곤 했지 없었던 것 같았다. 그 사건 전까진 그저 나에겐 마음껏 함께 웃고 어울리던 유일한 친구였다. 해를 지나 반이 떨어졌고,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데 서툴렀던 나는 새 짝꿍과 말을 섞기도 전에 비보를 들었다. 그 친구는 스스로 생을 마무리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유서를 남겼지만 알 수 없는 말들 뿐이라고 했다. 학교폭력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지만, 알 수 없었다. 정확히 누구를 지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했다. 선생님들은 급히 학생들의 입을 막으려 나섰다. 하지만 눈치 빠른 기자들은 학생들의 등하굣길을 지켰다가 눈이 마주치는 학생을 추궁하곤 했다.


그 와중에 나는 절친의 죽음 앞에서 울지 못했다. 무엇이라도 평소에 내색하지 않았던가? 없었다, 전혀. 충격이었다. 나에게 무언가라도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서운한 감정이 들어서가 아니라, 그 친구의 죽음에 아무런 징조가 없다는 것이 어린 마음에는 상처였다. 이 세계는 한 인간의 죽음 앞에 어떠한 신호도 드러내질 않았다. 그를 대신해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것이 너무 냉정해 보였다.




공사장이 우리 집에서 가까웠다. 굴삭기가 건물의 외벽을 칠 때마다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진동도 느껴졌다. 기둥이 무너지면서 부서진 돌이 굴러서였는지 굴삭기의 흉폭한 움직임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건물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이 근처 집들은 대부분 지은 지 삼십 년은 되었다고 들었다. 인간으로 치면 청년이라고 하기도 뭐하고 중년이라고 하기도 뭐한 존재다. 그럼에도 기능을 다했다 판명받았기에 거기 있어야 할 이유를 상실해버렸고 그래서 없어지기로 결정'되었다'.


아우성이었다. 예수가 죽을 때는 지축이 흔들리고 하늘이 소리를 내는, 말 그대로 천지가 울었다 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인간의 생명은, 그리고 그 생명을 보존하고 보전하는 건축물은 너무 쉽게 아무런 징조 없이 무너진다. 너무 지나친 감상인가. 너무도 당연히 그곳에 계속 존재할 거라고 여겼던 내가 어리석은 것일까. 오래된 집은 흔적만 남기고 없어졌다. 그곳엔 지금 벽돌무덤만이 남아있다. 임시방편으로 표면을 판자로 댄 가건물이었기에 먼저 사라졌을 뿐이다. 그리고 아마 신축한 원룸 건물이 들어설 것이다. 이 동네는 대학생들의 바람을 따라(혹은 땅주인의 계산에 따라) 원룸촌으로 빠르게 변하고 있다.

건물의 무덤

만약 이 땅을 오래도록 지켜보는 이가 있다면 단 한 번도 허전하지 않았던 적이 없을 것이다. 어쩌면 나무가 울창한 숲(실제로 이 동네는 꽤 큰 언덕 위에 있는데 주로 밤나무가 자랐다는 소문이 있다) 일 수도 있었던 땅 위에 건물이 들어서고 스러져가는 것을 반복한다. 그 건물을 따라 사람도 죽었다가 태어나며 사라졌다 돌아온다.




상처 입은 마음을 치료하거나 인간의 영혼이 성장하는 과정 중엔 오래된 자아를 버리는 단계가 있다고 한다. 세계를 보는 관점을 바꾸고 익숙해진 자신의 모습을 버려야 하는 일이어서 매우 고통스러운 과정이란다. 그래서 본디 풍요로운 삶은 고통도 풍요롭다고 그런다. 하지만 자기 이해를 확장하는 과정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무덤에 들어가기까지 '번데기의 허물'을 벗겨야만 한다. 그런데 우린 그 수많은 탈피의 시간을 홀로 견뎌낼 수 있을까?


건물이 소리를 지른다. 자신의 소멸에 강하게 저항하며 굴삭기의 강렬한 힘에 대항한다. 완전히 무너지고 산산이 조각이 날 때까지, 덤프트럭이 자신의 조각을 실어 나를 때까지도 데굴데굴 구르며 자신의 존재를 외친다. 하물며 인간은 더욱 래야 하지 않을까. 자신이 무너지는 순간, 거대한 힘이 영혼의 귀를 울릴 때, 이때가 성장인지 죽음인지 알아채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선택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누가 알까?


죽음은 모든 가능성에 제동을 건다. 자아를 버리는 마무리만 있다. 자신을 내팽겨치는 이유는 고통을 이해해서가 아니라 끝마치는 데 있다. 고통을 끌어안아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대신 쏜살같이 종말을 향해 달린다. 누군가에게서 살아갈 의지를 빼앗는 일은 건물을 예고도 없이 무너뜨리는 일과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건물을 기억하는 이가 있다면, 그리고 그곳에 다시 세워질 무언가를 기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돌 한 무더기의 무덤이 조금 귀찮은, 하지만 함께 한다면 금방 해결할 청소 거리로 보일 수 있다.




우리는 보통 지도를 보고서 이곳을 '이곳'으로 정의하지 않는다. 우리는곳에 그 건물이 있음을 보았기에 '그곳'이라 말한다. 한 장소는 그곳에 물든 사람의 생각과 추억과 목소리로 구별된다. 하나만 떼어보면 아름다움은 코빼기도 안 보일지 몰라도 그 거리를 걷는 사람에겐 부는 바람마저도 설렘과 낭만이 된다.


건물이 만들어내는 거리의 심상이 그러하다면 사람의 영혼은 더욱 그러해야 마땅하다. 함께 살지 못하고 사라져 가는 사람들에 관하여, 스스로를 소멸시키야만 살아가는 이들에 관하여, 강제로 철거당해야만 했던 이들에 관하여, 목소리를 잃어버린 이들에 관하여 기억하고 여기 사람 있어요,라고 외쳐야 한다. 그래야만 언젠가는 반드시 마지막을 맞이할 운명을 앞에 둔, 우리 각자와 서로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할 수 있다. 비록 고통이 따를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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