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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희 씨는 길어진 낮을 따라서 ‘선일 책방’ 문을 늦게 닫을 예정이다. 곧 닫을 철제 자물쇠를 확인하는데 콩나물을 들고 가는 화순 씨와 눈이 마주쳤다. 애써 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역시 돌아오는 말은 같았다. 아예 문 닫으면, 나한테 먼저 말하는 거야, 알겠지? 선희 씨는 그것이 무슨 말인지 안다. 헌책이 골동품이 아니라 고물이 되어버리는 날 말이다. 자기에게 먼저 알려주면 좋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선희 씨는 절대로 그럴 마음이 없다. 절대로. 이곳은 나만의 공간이 아니니까. 일웅 씨가 남겨둔 흔적을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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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씨는 무엇 때문에 과 내부 문학 동아리에 가입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시를 쓰고 싶었던 자신의 욕망 때문인지, 자신을 몰라주는 주변 사람들과 부모님에 대한 섭섭함 혹은 반항심인지, 아니면 나에게 웃어주던 누나의 웃음소리가 듣기 좋아서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선화 누나가 자신에게 다가와 준 덕분에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잠시 태희 씨에게 들려주던 자신의 이야기를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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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씨는 선화 씨가 자신에게 구원을 주었다고 생각했다. 법이 줄 수 없는, 다시는 법으로 돌이킬 수 없는 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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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웅 씨는 일용직 노동자였다. 선희 씨는 무엇 때문에 그와 동거를 시작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마도 무뚝뚝한 선희 씨의 표정과 다른 일웅 씨의 환한 웃음 때문이었을까,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의 눈이 생각났다. 탁하게 그을린 피부에도 마치 뭐가 뭍은 듯하게 진했던 다크서클. 그의 눈에는 자신에겐 없는 사근사근함이 묻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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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웅 씨는 이사가 잦은 이 동네의 이삿짐을 거드는 데 도움을 주곤 했다. 체력이 남아도는지 일이 없는 날이면, 서슴없이 물건을 나르며 도와주었다. 헌책방에서 일하는 직원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면서 그 나름의 마케팅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