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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씨는 몇 해 전 시험 준비를 그만두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이 동네 고시원으로 이사 왔다. 그러다 고마운 이웃을 만났다. 무거운 책을 같이 날라주었던 헌책방 남자였다. 그것이 인연이었는지 믿음 씨는 한 때 애증 하던 법전을 싼 값으로 팔아넘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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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만큼이나 무거운 그 책들을 다 처분하던 날 갑작스레 소나기가 내렸다. 마음도 식힐 겸 터덜터덜 집으로 걸어오다가 창문을 열어 두었다는 생각에 바삐 뛰어왔지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자신이 가장 아끼던, 차마 팔 수 없었던 시집이 다 젖어버렸다. 표시해 두었던 페이지를 급하게 넘겼는데 다행히 잉크가 조금만 번졌다. 그런데 그것이 시를 더 슬프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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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믿음 씨는 정호승 시인의 <수선화에게>를 조심히 읽어 내려가다, 비처럼 흐느꼈다. 창문을 닫을 생각도 못한 채 그 구절을 계속 읽고 또 읽었다. 그는 그날 또,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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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선화였다. 이선화. 이름도 예쁘고 마음도 곱던, 과 동아리 누나였다. 믿음 씨는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태희 씨에게 ‘전수’했다. 표정이 없는 태희 씨를 보고 있자면, 아니 그의 딱딱한 말투를 듣고 있자면, 이 더 맞으려나. 아무튼 믿음 씨는 자신을 대하는 그의 태도를 신뢰했다. 공허해 보이는 눈동자였지만, 이해한다는 듯한 눈길만큼은 진심을 보여주는 듯했다.
아무튼, 믿음 씨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공부를 잘했던 믿음 씨는 미래에 대한 기대감으로 버무려진 부모님의 권유로 법대에 진학을 했다. 하지만 언제나 자기에게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모의재판을 할 때 입던 법복도 품이 맞지 않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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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진로와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던 도중 만났던 사람이 선화 씨, 아니 선화 누나였다. 동아리 홍보 부스가 차려진 벚꽃 나무 사이를 지나가다가 우연히 마주친 사람이 선화 누나였다. 하지만 그 만남이 거의 마지막이었다. 선화 씨는 졸업을 준비했고 믿음 씨는 법전을 읽느라 좋아하는 것들을, 사람들을 멀리해야만 했다. 그때부터 사람들을 피하던 믿음 씨였지만 태희 씨에게만큼은 자기가 살아온 이야기를 털어놓아도 될 것 같았던 믿음 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