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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로 믿음 씨는 헌책방을 들렸다가 동네 유일한 놀이터를 배회하는 일을 반복했다. 늦게 하루를 시작해서 태희 씨와 우연히 마주치면 이야기를 나누다가, 헌책방에서 이것저것 들쳐보며 하루의 절반을 보냈다. 그러다 간단한 요기를 하고, 저녁 먹기 전까지 그네에 앉아 가만히 석양을 바라보다가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오곤 했다. 그러다 보면 책방에 앉아있던 선희 씨가 생각났고 이름이 비슷한 선화 씨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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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 고민 끝에 법전을 팔기로 결정했다. 믿음 씨는 선화 씨를 생각하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는 시를 써 보겠다고, 자신이 건넨 시를 칭찬해주던 선배를 생각하며 새로운 길을 걸어 보겠다고 자신의 습작시를 읽으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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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갯길>
비가 오는 곳엔
누가 울고 있어서
비가 오는 것은
누군가 울고 있다고 하는
낡은 시간 속의
늘어진 그 읊조림이
이토록 나타난 까닭은
어젯밤 고갯길
멈출 것 없이 내리던
늦은 비 때문이었을까
한참을 고였던 것이
낡은 운동화를
흠뻑 적시고도
아래로
더 아래로 흐르는 것을
오르막의 끝자락까지
물끄러미
놓아두고서
흐르는 것은 왜 이리도
슬픈가 하며
슬그머니 고개를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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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 씨는 주말에도 폐지를 주으러 나선다. 폐지는 주말에 많이 나오는 편이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온 사람들이 쓰레기를 몽땅 박스에 모아서 버리는 날이기 때문이다. 화순 씨는 오늘도 밤이 되기 전에 평소처럼 동네 한 바퀴를 순찰했다. 그러다 백합아파트 단지 옆 분리수거장에 놓인 큰 물체를 보았다. 눈이 좋지 않은 화순 씨는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커다란 판다 곰 인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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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 씨는 이해가 가질 않는다. 저번에는 노란 의자 더니 이번에는 판다 곰 인형이다. 도대체 누가 이런 걸 버리는 걸까. 쓰레기는 자고로 냄새나는 끈적끈적한 물기가 묻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