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쓸모
관계 맺기
누구에게나 자신만 알고 있는 소중한 곳이 있다. 의미와 추억이 켜켜이 쌓여있는 자신만의 성이자 다른 사람들은 보아도 알아보지 못할 의미가 담긴 장소가 있다. 영혼의 고향이라 여길 정도로 어리고 어둡던 자신까지도 조심히 내놓을 수 있던 곳이 있다. 소중한 물건도 있었을 것이다. 구연동화를 하듯 구구절절 사연을 꺼내놓을 수 있는 물건이 있다. 소유물이 아니어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의 그 무엇일 수도 있다. 좋아하던 나무 그늘이나 그 아래서 소꿉장난하려고 모아두던 돌멩이와 같은 것들 말이다.
장소나 물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정말 자연스러워서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던 도로변은 곧 누군가와 함께했던 곳이 된다. 신중히 밑줄을 치며 읽은 책은 인생의 책이 되고 몇 차례 본 영화인데도 그 장면에선 매 번 눈시울이 붉어진다. 살아있지 않던 사물과 장소가, 개념이나 추상적인 대상이 생명력을 얻어서 살아있는 이와 함께한다. '이곳은 내가 있던 곳', '이것은 우리가 먹던 것', '이것은 너랑 같이했던 것'. 세상에 가득 찬 존재 중에 나와 관계를 맺은 것들은 소중해진다.
스마트폰은 고사하고 휴대폰이 보급되기도 전에 살던 아이들은 친구들과 만나는 집결지로, 일명 '아지트'를 꾸며 이런 소중함을 공유하기도 했다. 굳이 폐쇄적이거나 음습한 곳이 아니어도 좋았다. 친구들과의 만남이나 관계는 그 장소와 합쳐지면서 더 깊어졌다. 좀 더 내성적이고 내면세계에 민감했던 아이들은 '있는 그대로의 사물'에 조그만 '인공'을 가미하고는 자신만의 멋진 이야기를 꾸며내기 좋아했다. 어린 '사람'이 인형이나 장난감과 대화(어른들에겐 혼잣말처럼 보이는)하며 노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대화하는 사람
말을 할 수 있기 시작한 어린이는 끊임없이 말한다. 주위 사람들의 행동을 모방하고, 대화를 모방한다. 끊임없이 질문하며 사람들의 주위와 관심을 받기도 한다. 그리고 자신에 움직임에 반응하는 상대방의 존재를 발견한다. 소리만 지를 줄 아는 갓난아이도 '소리'가 부모를 부르는 방법임을 안다. 그러니 더 자세히 자신을 표현할 줄 아는 어린이는 이제 분명한 표현을 한다. 더 나아가 상대의 존재와 반응 덕분에 자신을 분명히 이해하고 표현하게 된다.
청소년은 영화에서 종종 먼지 쌓인 물건들이 가득한 다락방, 공구로 차있는 지하실, 여러 브로마이드로 도배된 십 대의 방으로 표현되곤 힌다. 자신을 찾아가면서도 여전히 대화를 요청하고 있다. '이것이 나다. 그러니 나를 이렇게 바라봐줘. 나를 이해해줘'라고 말이다. 타인이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더 중요한 점은 청소년기의 사람도 자신을 이해 못하고 있는 시기를 보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를 보여줄 만한 어른을 찾아 대화를 요청한다. 자신을 찾았다고 생각할만한 유명인을 찾아서 저 사람이 나의 롤모델이라고 내가 저 사람을 닮았다며 나는 저 사람처럼 될 거라고 주위에 말하고 다니기도 한다.
공부
이러한 대화과정을 막는 존재가 등장힌다. 존재감이 너무 뚜렷해서 외면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존재, 공부다.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끔찍한 인류 공공의 적이다. 간혹 공부가 재미있다고 양심 고백하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좋아하지 않는 행위다.
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공부가 재미있을 수 있을까, 물어보면 '알아가는 과정'과 '무엇을 알고있다'는게 너무 기쁘다고 한다. 부럽지만 정말 이상적인 생각이 아닐 수 없다. 공부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시험, 시험하면 대학, 대학이면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능력을 떠올리게 하는 한국사회에서 살면서 공부를 재미로 하다니 신기하다. 재미로만 하면 모르겠지만 잘하고 있으니 딱히 할 말은 없을 경우가 많긴 하다.
성인이 된 사람은 마침내 사회에 숨겨진 공공연한 비밀을 깨닫는다. 공부는 고등학교에서 혹은 대학교에서 끝이나지 않는다는 현실이다. 턱이 빠질 듯이, 머리가 다 빠질 듯이 충격적인 소식일 수 있다. 하지만 더 끔찍한 현실이 여기 있다.
어른이 되면 공부가 끝날 거라고 생각하던 아이들의 이야기는 벌써 옛 말이다. 요즘엔 그런 '뒤쳐진' 아이들은 별로 없다. 뉴스를 자주 보지 못한다고 해도 명절만 되면 친척들의 소식으로 알 수 있다. 이미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교를 바라보며 공부하는, 아니 유치원부터 선별해서 다니는 사회다.
공부의 목적
한국과 같은 동양에선 공부의 목적은 주로 극기와 자기 수양이었다. 자신을 이기고 자신을 닦아내기 위해 배움은 자발적으로 응당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입신양명이라는 말도 존재했지만 출세와는 다른 말다. 이 말은 공부의 결과로 발현하는 부산물이었다. 입신, 즉 자기 수양에 정진하다 보면 얻게 되는 덕과 인과 같은 덕목으로 양명, 곧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일들을 감당하는 사람으로 살아감을 말하는데 이는 공부의 결과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이 온전한 사회를 이루고 살기 위해 추구해야 할 것 중 가장 중요한 덕목은 무엇인가'. 공부의 목적을 분명히 알았던 옛사람들은, 공부가 왜 어려울 수밖에 없는지 대해 납득할 수 있었다. 자신을 닦아내기 위해 책과 씨름하거나 무예를 익히는 일상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에도 공부를 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대해서도 충분히 이해했다.
서양의 공부도 이와 많이 다르지 않았습니다. 신의 창조세계를 알아가는 것이 곧 신을 알아간다고 믿었던 기독교 전통과 세상을 관통하는 진리를 탐구하려는 헬라철학이 함께 이 세계를 움직여갔다. 그러니 세상을 이해하는 다양한 사상을 서로 주고받는 토론문화가 발전했다고 말해주는 역사의 기록은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사람이 세상과 신, 그리고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 여겼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수사학과 같은 학문이 발달했던 이유도 공부를 하는 주체가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무엇을 아는지 보다 알고 있는 지식과 이에 대한 생각을 분명히 말하기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사람을 설득하는 일에 공을 들였던 이유는 결국 공부의 목적은 많은 것을 아는 데 있지 않고 세상을 이해하는 진리를 깨닫는 데에 있다고 믿은 까닭이다.
공부는 오래도록 이처럼 삶과 동떨어져있지 않았다. 사람에게서 시작된 공부는 사람에게 다시 돌아와 공부가 삶에 적용되고 개인에게 체화되고 사회에 적용되었다. 인격을 가진 살아있는 존재와 연관을 맺은 공부는 생명력과 인격성을 얻어 살아 움직였다. 책이라는 매개체는 저자와의 소통을 주선했고 옛사람들이 자주 했던 토론과 대화를 통해 교육을 진행하며 사상들은 움직이는 생물처럼 전파되었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도 그러하고, 공자와 맹자의 내용이 제자들과의 대화록이라는 사실도, 유대인의 교육방식인 토론과 랍비의 존재도 그러하다.
명예실추
안타깝게도 공부는 이러한 자신의 명예를 잃어버렸다. 사람을 사랍답게 해주는 '명예로운 고민'을 제공해주던 공부는 이미 힘을 잃었다. 명예를 담는 그릇은 '고상하고 아름다운 대상을 추구', 혹은 '그것을 위해 희생하는 정신'라는 '고루한' 의미를 쏟아내어 버렸고 경제가치를 담아내는 그릇으로 전락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명예는 '경제적 위치'와 더 연관성이 깊은 단어가 되어버렸다. 혈통으로 이어져 오던 사회가 전복되고 많은 세대를 거쳐 개선된 결과 현대사회를 누리는 곳에선 모두가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었지만 그 자유로 인간은 점점,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공부'에서 벗어났다.
소위 경제적 위치를 얻기 위한 방편과 수단으로 취급받기 시작한 공부는 현대판 과거제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공부가 가장 공정한 게임이라는 생각인데,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공부의 정의나 목적에 따라서 보면 우리가 지금 하는 공부는 진정한 공부의 의미가 아니다. 공부는 '인간답게 사는 것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해왔으니 말이다.
그러기에 현대의 공부는 공정한 게임이 아니다. 부모를 잘 둔 금수저와는 게임이 안 된다는 이야기까지 갈 필요도 없다. 우리가 공부라고 정해놓은 '현대판 공부'의 범위는 너무 좁은 까닭이다. 그 범위 안에서 잘해내는 사람은 확률적으로 보아도 많지 않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떠오를만한 삶과 사회, 목적과 미래에 관한 질문들은 제쳐두게 한다. 그리고 공부로 세상에 나와 출세하여 세상을 바꾸라니 애초에 말이 되지 않는 공부를 우리 모두가 자발적으로 하고 있다.
살아있는 존재는 관계로 존재한다
사람은 습관적으로 그리고 천성적으로 소중한 것, 의미 있는 것을 자신의 주변에 남긴다. 그래서 주변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살아있지 않은 모든 것에 '동력'을 부여하고, 생명력을 갖게 해준다. 이는 사람이 세상을 차갑고 무의미한, 그저 존재만 하는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성인이 되어서 현실에 치이다 보면 비관하게되고 냉담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아이들의 넘치는 호기심과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보면서 세상의 존재와 목적에 관해 낙관할 수 있는 근거를 찾곤 한다.
기계가 아니기에 사람은 단지 실용적 목적으로도 살아갈 수 없다. 간혹 지나친 경제적인 논리로 어처구니없는 사회현상과 마주하면, 우리는 숫자와 소유물로 존재의 의미가 정의되거나 결정되는 존재일 수 없다는 강한 부정이 저절로 일어나는 이유이다.
사람이 첫째, 인격을 잃어버리고 물질화가 되어버렸다면 둘째는 관계다. 사람 간의 만남이 형식적인 경우가 많아졌다. 소유할 수 없는 사람의 인격을 인위적으로 지워서 경제활동의 대상으로 소유하려 하는 시도를 해왔듯이 관계도 시장의 상품이 되어 거래대상이 되었다. 공부를 관계로 배우지 않은 사람은 공부로 얻은 힘으로 사람 관계를 경제적 유익이라는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사용하게 될 것이다.
관계를 사물처럼 대하는 일이 반복되는 사회에서는 사람들은 대화를 자주 나누지 못할 뿐만 아니라 대화하기를 꺼려하고 무서워하기까지 한다. 진정한 대화를 나눠본 경험이 별로 없어서, 사람과 사람 관계에 대한 신뢰가 사라져버렸다.
스마트폰은 이 불안을 덜어주는 가장 보편적인 물건이 되었다. 사람들이 많은 모이는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나만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숙인다. 얼굴을 서로 쳐다보거나 대화를 나눌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만남을 갈구한다. 대화하기 싫어서 앱으로 주문을 하는 대학생이 동아리나 독서모임에 가입하는 까닭은 모든 게 물질로 취급받는 현실에서 관계로 맺어진 인격체로서의 자신을 다시 되찾고 싶어서이다.
공부의 목적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소중한 관계를 맺는 인간의 천성, 그리고 이 천성은 사람 사이에서 더 다채롭게 대화라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 공부를 해오던 과거의 사람들과 달리 우리는 본 목적을 잃어버린 공부를 하고있다.
우리는 앞에서 말했듯 공부를 항상 하도록 강요받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자신을 다그쳐서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이다. 그런데 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 같지 않을까. 앞서 말했듯, 더 많이 알고 더 많은 능력을 갖추려는 게 공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공부는 삶의 의미를 찾는 일이다. 살아있고 살아간다고 말하는 현실과 이 의미에 답해봐야 한다.
또한 내 주변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일이다. 공부해서 남을 준다. 도움을 주고 행동하려는 사람에는 생기가 있다. 그리고 공부는 내 안에 지식을 쌓아서 나의 존재를 부각하는 게 아니라, 세상에 가득 차 있는 것들 하나하나와 관계를 맺어 소중한 존재로 탈바꿈하는 행위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과 그 중에 특별히 사람은 소유가 아니라 관계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마음에 질문이 남는다. 그렇다면 사람은 관계에서 무엇을 얻으며 살아가는 걸까? 공부를 통해 발견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부분에 있어서 우리는 옛사람의 지혜가 필요하다. 지혜를 구하고 진리를 얻으려 했던 사람들의 삶을 모방해보는 것도 답을 구하는 방법이지만, 그들이 자신들이 발견한 지혜와 진리를 기록해두었다면 그 기록을 읽는 일도 하나의 방법이다. 만약 읽는 일에 관심이 간다면, 필자는 톨스토이가 남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소설을 추천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