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소크라테스의 변명

이데아를 향하여

by 쓴쓴

서양 철학의 흐름을 절대주의와 상대주의로 나누는 시선이 있다. 이것이 타당한가를 따지기란 다소 난해하지만, 쓸모 있냐는 질문에는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 세상을 바라볼 때 항목 하나하나에 집중하여 경험을 중시하는 감각적인 방법은 매우 실용적이어서 실재를 이해하는 데 용이하다. 또한 이 모든 대상을 아우르는 상위의 무언가가 있다고 보아 일이관지 하는 체계 내로 나열하는 방법 또한 전체를 파악하고, 상정된 그 전체 내의 각 항목이 위치하는 자리를 확인하기에 용이하다.


본서에는 <소크라테스의 변명> 외에 <크리톤>, <파이돈>, <향연>이 실려있다. 소크라테스라고 이름 붙여 있으나 실은 그의 제자인 플라톤이 쓴 글이며, 앞에서 말한 두 흐름 중 절대주의를 주창했던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소개한다. 이 책으로 보았을 때, 마지막 작품인 <향연>을 제외하고는 모두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서술된다. 그리고 독자는 죽음과 죽음 근처의 묘사에서 이데아 사상을 발견한다.


<소크라테스의 변명>부터 차근차근 살펴보자. '변명'은 변론이라고도 번역될 수 있는데, 이는 소크라테스가 진리를 찾는데 중요한 방법이라 주장한 변증과도 맞닿아 있다. 그는 자기가 죄를 짓지 않았음을 말할 때에도 변증을 이용한 셈이다. 이를 현대의 말로 번역하면 이성을 이용한 사고 실험 정도가 될 텐데,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죽을 만한 죄를 짓지 않았음을 자신의 이성을 근거로 하여 차분히 반박한다.


<크리톤>에서는 소크라테스에게 내려진 사형 선고를 괴로워하는 친구의 등장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죽음이 그리 잘못되지 않았음을, 그리고 철학자에게 죽음이란 얼마나 귀한 사건인지를 알려준다. 누군가는 이곳에서 '악법도 법이다'라는 명언이 나올 거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알려졌다시피 소크라테스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앞서 말했듯, 그는 단지 삶의 끝을 받아들이는 철학자의 사고 양식에 관하여 말했을 뿐이다.


다음으로 마저 넘어가기 전에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현대인으로서 우리가 잠시 눈을 감아야 할 부분이다. 이를 간과한 채로 본서를 읽다 보면 고개만 계속 갸우뚱하다 책을 덮게 된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소크라테스와 그와 대화를 나누는 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전제하고 있는 무언가를 발견해야 한다. 신과 신령의 존재, 영혼의 유무, 고대의 국가론, 노예제, 여성의 지위와 대우가 그것이다. 조금 인상을 찌푸리게 되는 영역으로 어설픈 철학적 가정뿐만 아니라, 인간사 대부분을 지배해 온 차별에 관한 오래된 당위성에 관해서다.


<파이돈>을 보면, 이외에도 물론 고대 철학에 대해 실망하게 되는 어떤 지점이 있다. 소크라테스가 이렇게 허술한 논리의 사람이었던가, 하는 지점들이 있다. 그러나 그가 진행한 논변들의 의미를 찾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한다면 여기에 있다. 바로 근대 이성으로 환원되는 영혼의 역할로, 영원한 인간 본질의 지위가 절대적인 이데아를 담보할 것이라는 그의 사상이다. 이 세상을 붙드는, 부동의 무언가가 있다고 여긴 그의 변증을 토대로 서양 철학사가 발전해왔다고 하여도 크게 달라질 것이 없다.


<향연>에서는 아름다움을 향한 갈망이 이데아를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를 포함한 각 사람들의 '에로스'에 관한 예찬이 다소 낯간지럽고, 어색하기는 하다. 그러나 이들이 무언가를 추구하고 있는지를, 무엇을 궁극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지를 살펴보면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이것은 나머지 각 책에도 적용되는 독법으로, 결국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플라톤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이다.


이데아가 실재인가, 아니면 추상으로 머무르는 개념에 불과한가는 여기서 따질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지점은 소크라테스가 자신이 믿는 바를 삶의 양태와 분리시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현대인인 우리는 나누어야 파악하기 편하다 생각해서 삶을 이루는 사건들을 해결하는 책략을 이론과 실전 혹은 기본과 적용으로 이분한다. 그런데 플라톤의 스승은 그러지 않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는 내면에서 찾아낸 진리를 그저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다시 말하건대, 필자는 지금 이데아를 상정하고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 않다. 다만 진리라고 여겼던 어떤 실재들 앞에서 자신을 말갛게 드러내었던 선구자가 있었음을 바라볼 기회가 이 책을 통해 주어진다는 사실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게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점은 무언가를 바라볼 수 있는 자는, 그것을 맞아들일 수도 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독자는 자신이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를 궁금히 여기고 그 무엇을 맞아들일 만한가 생각해봐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