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을 본다. 그것은 어떠한가. 매우 두껍다. '지혜를 찾아 138억 년을 달리는 시간 여행서'라 쓰인 부제를 훑는다. 살펴보니 어떠한가.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감이 오질 않는다. 지은이는 다만 이렇게 밝힌다. 이전의 1, 2권에서 3권으로 나아가지 않는 까닭은 이번 판이 나머지 두 권의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라고. 그렇다면 조금 알만하다 싶기도 하지만, 막상 읽어보니 그렇지도 않다.
사상사로 보았을 때는 1, 2권의 전에 와야 하는 게 맞다. 두 권의 책이 펼쳐 낸 고대 이후의 사상, 철학, 정치, 종교 등과 같은 내용보다 역사적으로 앞서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사상, 혹은 생각들의 집합, 그 자체로 본다면 1, 2권과 동등한 선상에 놓여야 한다. 이는 저자가 책의 말미에서 밝히는 내용과 들어맞는다. 0권은, 이원론이라는 1, 2권과 대비되어 일원론의 세계를 그려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본서는 매우 낯선 내용을 담아낸다. 일원론이라는 용어가 무엇을 담아내는지도 알기 어렵지만, 그것이 그려내는 모습도 낯설다. 저자, 채사장은 이 지점을 지적한다. 우리가 잊어버린 무엇, 인류의 절반을 찾아가자고 한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 절반은 대부분 고대의 동양 사상을 가리킨다. 우리에게 동양인으로서 동양 사상은 무엇인가. 털어내야 할 옷 위의 먼지와 같은 것인가, 혹은 어쩔 수 없이 끼는 창문의 때와 같은 것인가.
최소한 채사장에게 동양사상은 고리타분한 옛이야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는 자아와 세계를 연결하는 다리가 되고 자아와 세계, 그 자체의 합일이 된다. 과학적 세계관에 익숙한 우리에게 이것은 허황된 설화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세계가 내가 되고, 내가 곧 세계인가. 이것은 종교적 해석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주목해볼 만하다. 그가 의도한지는 모르겠으나 책의 수미상관으로 그 근거로 과학을 제시한다.
138억 년 전 모든 것이 하나의 점에서 시작했다. 그 안에서 세계와 자아가 시작되었다. 세계와 자아는 그 본질이 같다. 그리고 베다, 도가, 불교, 칸트 이후의 철학, 기독교 신비주의가 세계와 자아를 이루는 법이 같다고 주장한다. 이제 138억 년이 지나 현재에 도착한다. 마침내 인류는 양자역학이라는 세계를 발견했다. 이 발견은 의도치 않게, 세계 홀로 존재한다고 주장하던 과학의 자리에 관찰자라는 자아를 소환하였다.
채사장의 책이 지닌 장점이 여기에서 빛을 발한다. 저자는 하나의 거대한 주제로 여러 영역을 꿰어내는 재주가 있다. 누군가는 너무 과감한 보편화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을 저자가 몰랐을 것 같지 않다. 다만 그는 정리되지 않는 내면세계와 혼란스러운 외부 세계에 대처하여 안전한 마음의 수영장을 만들어주려 한 듯하다. 그는 세상이라는 혹은 사람의 마음이라는 큰 파도의 바다로 나서려는 나름 진지한 이들을 위해 잔잔한 파고의 물을 가둔 울타리를 선-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