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려 깊음에 관하여

무식을 중화시키는 것

by 쓴쓴

유독 바람이 많던 날이었다. 비구름이 몰려올 거라 했지만, 대기의 빗줄기는 샤워기에 끝에 맺힌 물방울처럼 조용히 떨어지다 힘없이 날릴 뿐이었다. 예상과는 다른, 우산은 써야겠는데 뭔가 애매해져 버린 날, 옅은 회색빛이 강하게 지나치고 있었다.

수채화를 그리는 화가의 붓이 떠올랐다. 지평선 먼 곳의 반사된 배경색부터 칠한다면 이런 것이 아닐까, 하면서. 그리고 그 붓이 나도 지나치고 있는 것이다. 차마 마르지 못한 내 안의 가벼운 무엇이 스윽 일어나 조금 전까지 채웠던 곳을 비우고는 나보다 앞서 날고 있었다.


놓쳐버린 마음을 쫓아가는 와중에 떠오르는 것이 몇 장면 있었다. 일종의 사회불안이라고 불리는 것들일 텐데, 내게 익숙하지 않은 것들과 지척을 두고 앉아있는 기분이랄까. 아니 더 정확히 하자면, 익숙과는 먼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지식과 관련 있는 것이어서, 미지의 세계를 떠올리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미지의 세계. 그것은 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좀 더 나아지려나. 그러나 실은 나의 무식보다 무서운 것은 타인의 무식인데, 무식이 품은 독성을 중화시키려면 지식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가 만약 사려 깊은 마음을 가지지 않았다면 별로 기대할 게 없다. 그는 나를 넘겨짚기 바쁠 것이고, 나는 여전히 무방비한 상태다.

사려 깊음은 상냥함과는 다른 태도다. 상냥함은 예의라는 말에 가까울 수도 있고, 그런 이유로 사회성과 연관 지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높은 사회성을 가진 사람은 도리어 자신을 잘 모르는 타인의 섣부른 지적과 판단에도 상냥하게 답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을 사회성이라 정의할 이유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침 뱉는 사람에게 웃어주는 것을 격려하기보다 웃는 낯에 침 뱉으려는 사람을 나무라는 게 '사회'성에 가까운 것 같아서다.

잊었다 여긴, 과거의 사람들을 만나 마음이 흔들렸었다. 그래서 맹렬히 부는 바람 탓을 하며 빗속을 좀 걸었고 오래전 습관처럼 자책해야 하나 고민했다. 오지도 않은 일을 그려보았고 꼬박 하루가 걸려서야 그들이 무례했었음을 알아챘다. 배제의 논리는 그렇게 강했다. 그래서 이젠 알아버린 자존심에 관한(마음이 강하다는 것은 모든 타인의 의견을 다 받아내어 나만의 '정신승리'를 쟁취하는 게 아니고, 적절한 때에 나를 위해주고 여전히 난 너에 대해선 무식자라는 사려 깊음을 유지하는 것) 다소 긴 문장의 태도 유지를 상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