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한 점 없던 날의 예상치 못한 소나기였다. 굵은 줄기만은 구전되던 기억을 닮아서 잠깐의 흙냄새 뒤로 대지의 온기를 앗아가는 것이었는데, 내리는 모양새가 영 달라서 이상기후라 불리는 요즘의 것 같았다. 그러니 기와로 만든 처마나 정자, 내지는 조그만 움막 따위는 없을현대 소도시의 풍경은 무채색의 탈 것 말고는, 고요하고 정적인 것이었다.
이런 날은 특정한 것들을 떠올리기 마련이어서 몇 사람의 구두 소리 사이로 베어든 고소한 기름 냄새를 마침내 맡기도 한다. 해가 구름 뒤로 숨은 지 오래고 외견상 저녁이 조금 이르게 찾아왔기에 다들 요리에 나선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집에 부침가루가 없어서 알맞은 우산을 찾는 중이었다.
커다란 것을 들쳐 매듯 어깨에 걸치고 가까운 가게로 향했다. 얼마나 많은 비였는지 아스팔트 길 위로 개울이 생길 정도였다. 그러니 파라솔에 가까운 우산을 폈던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고 발은 바빴야 했다. 평평해 보이던 곳 여기저기에 생긴 검은 웅덩이들을 피해 보폭을 늘렸다 좁혔다를 반복하였다.
가게의 입구는 염치를 무릅쓴 손님들이 더위를 잠시 피하는 넓은 그늘이었다. 길게 쳐진 차양막은 맹렬히 쏟아지는 비에도 매우 요긴해서 젖지 않은 채로 우산을 접기에도 충분했다. 통행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라면 눈치 보지 않고 머무를 만한, 플라스틱 처마인 셈이다.
그곳에서 쉬고 있는 나그네가 있었다. 맨바닥에 앉은 이 객은꽤 지쳐 보였는데, 이 명제가 분명하다 생각하였던 이유는 한 입 베어 문 자국의, 녹아가는 수박 맛 아이스크림이 왼손에 들려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생각에 잠겼다기보다 멍을 때리는 것에 가까운 눈빛이 문을 열고 닫는 찰나에도 느껴졌다. 검은 바닥에 흐르는 물들을 간신히 피해 뻗은 노곤한 다리에 먼지 자국이 묻어있었다.
마치 놓인 고삐를 본 것 같았다. 힘없이 처진 어깨 위로 빠져나온 마음이 흐르는 모든 것들과 함께 꾸준히 흘러가는 듯 보였다. 그날은 해가 지도록 하늘에서 땅으로,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이 끊어지지 않고 흘렀다. 창가 안쪽에 앉은 나는 잘게 씹은 파전을 목 너머로 넘기며, 쉼을 청하던 차양 아래의 손님을 생각했다.
오늘은 쓰기 시작한 지 반년 만에, 고민하고 연구했던 결과물인 논문이 나온 날이었다. 올해 들어와 마무리지은 계획 중 가장 오래 걸린 항목이어서 하루 동안은 뿌듯할 줄 알았지만, 검은 표지의 제본된 것을 제출한 후에 마신 말차 프라푸치노 한 잔에 들뜬 감정은 사라졌다. 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고 그러자면 오늘도 들여다봐야 할 것들이 꽤 되었기 때문이었다.
단절과 연속에 관하여 떠올렸다.정해진 계획표를 따라 맺힌 시간의 매듭은 다시 풀어질 일이 없겠지만, 너무 서운해할 필요가 없는 이유가 있다면 맺어진 다음이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흐르는 것이 멈춰서는 곳이 있듯이 끊어지는 것 다음에는 반드시 이어지는 사건이 있어서 분절된 개념들은 시간의 덩어리로 합쳐지기 마련이다.
때문에 이 무슨 선문답인가 싶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차양 밑 아이스크림을 생각했다. 흐르는 빗물과 베어 문 것이, 나아가는 시간과 새겨진 것이 공존한다. 그렇다면 가두어 두어야 흐르고, 흘려야만 가둘 수 있는 것일까, 하는 괴상한 추상적 질문을 떠올리던 나는, 인쇄된 검은 표지의 논문이 누군가가 쉴만한 맨바닥이 될 수 있을까 걱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