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결핍에...
지난 10월, 오랫동안 미뤘던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처음에는 호기롭게 유럽을 생각했지만, 이동하는 시간이 10시간이 훌쩍 넘어 여행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방전될 것 같아 결국 친구와 함께 태국의 치앙마이로 방향을 틀었다. 6년 만에 떠나는 해외여행이라 더 잘 준비해서 가고 싶었다.
그런데 설렘이 과잉된 것일까? 여행 전날, 짐을 싸는데 걱정 인형이 ‘까꿍’하고 튀어나왔다. ‘멀티탭이 없으면 불편하겠지?‘ 태국의 전압이 우리나라와 같다는 걸 알면서도 굳이~굳이 친구에게서 멀티탭을 빌려왔다. ‘배가 자주 아프니 핫팩도 챙겨야지?‘ 치앙마이는 섭씨 30도가 넘는 곳이다. 더운 나라로 가면서 핫팩을 챙기는 딸이 답답했는지, 엄마는 째려보며 한마디 하셨다. “그냥 거기 가서 사!” 그러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운 나라에 핫팩이 어디 있겠냐 ‘며 핫팩을 5개나 챙겼다. (쇼핑하다 알게 됐지만, 치앙마이엔 핫팩부터 쿨팩까지 아주 다양하게 팔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5일 다녀오는 건데 다 신지도 못할 신발을 종류별로 챙기고 오지 여행이라도 가는 양 비상약까지 야무지게 넣었다. 태국 여행이 처음이냐고? 아니다. 이번 여행을 포함하면 네 번째다. 치앙마이만 처음일 뿐. 짐과 알 수 없는 불안까지 캐리어에 쑤셔 넣다 보니 출국할 때 위탁 수하물 무게 제한에 아슬아슬하게 통과했다. 수하물을 부쳤어도 나는 자유롭지 못했다. 등에 메는 가방, 휴대폰과 여권을 넣은 가방, 기내가 추울까 봐 담요와 두꺼운 양말을 담아 온 가방까지... 그렇게 온몸으로 보부상의 DNA를 널리 알리며 여행길에 올랐다.
평온한 일상을 꿈꾸는 여행자들의 힐링 스폿으로 알려진 태국 치앙마이. 특히 자연을 품은 올드타운은 걸어 다니기에 참 좋은 곳이었다. 이른 아침엔 뜨거운 햇볕을 피해 거미줄 같은 동네 골목을 구석구석 돌았고, 저녁에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강변이나 공원 주변을 산책했다. 투명할 만큼 맑은 하늘과 그 위에 흐르는 구름을 보고 있으면, 마음도 함께 깨끗해지는 듯했다. 익숙함에서 벗어난 이색적인 풍경은 어디든 얽매이지 않고 갈 수 있는 자유로움을 선사했다. '치앙마이에선 길을 잃어도 괜찮다‘는 말을 사람들이 왜 입이 닳도록 하는지 알게 됐다.
그러나 나의 힐링 여행은 하루 만에 끝이 났다. 욕망의 뇌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언제 또 오겠어, 남들이 하는 건 다 해 봐야지!‘ 그 속삭임이 나를 쿡쿡 찔렀다. 여유롭게 짜 두었던 여행 일정은 금세 빽빽해졌다. 아침 8시에 숙소를 나와 쇼핑하고, 지역을 옮겨 또 쇼핑하고, 밤 10시가 돼서야 두 손 가득 봉투를 들고 귀가했다. 처음 의도했던 ’사유하고, 쉼을 누리는 여행‘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함께 여행 간 친구와 나는 먹는 것도 잘 맞지만 쇼핑의 합은 기가 막히게 잘 맞는 환장(?)의 관계다.
서로를 부추기고 흥을 돋우는 데 일가견이 있다.
“야 이거 안 사면 완전 후회 백퍼!!! 지금이 기회야. 사버려!”
“여기서만 살 수 있어. 보이면 사는 게 진리야~”
우리는 내일 없는 사람처럼 휴양이 아닌 쇼핑으로 여행을 채웠다. 한국에서 큼직한 가방을 여러 개 챙겨 온 나를 셀프 칭찬하며 쇼핑 일정을 계속 추가했다. 작은 도시라 쇼핑할 곳이 없을 거라 생각한 건 큰 착각이었다. 유명한 마켓이 10곳이 넘고 요일별로 열리는 마켓도 수두룩했다. 밤에는 나이트 바자라는 이름으로 곳곳에서 여행자들의 발길을 붙잡았다. 특히 주말엔 아침부터 밤까지 마켓 투어를 해도 시간이 모자랐다. 욕망의 뇌가 지칠 때면, 달달하면서 고카페인이 든 차이티로 각성시키고는, 또다시 쇼핑의 세계로 걸음을 옮겼다.
심지어 여행자들의 성지라고 소문난 약국은 두 번이나 들렀다. ’코리아 키트‘가 따로 있을 정도로 한국인에게 인기 많은 제품이 한데 모아 팔고 있었다. 그들의 상술에 홀렸던 걸까, 아니면 그때는 정말로 필요하다고 느꼈던 걸까. 캐리어 3분의 1을 채울 만큼 비타민 크림, 치약, 파스, 모기약 등을 사 왔다. (한국은 겨울로 들어가고 있는데, 대체 모기약은 왜?) 또 치앙마이에서 유명하다는 캐시미어 실크 스카프도 여러 장 사 왔는데, 현지에서는 고급스러워 보이던 것이었는데 한국에 와서 펼쳐보니 어쩜 그렇게 촌스러운지! 선물용으로 산 것인데도, 주면 거절할 것 같은 슬픈 예감이 들었다. 여기에 다 나열할 순 없지만, ’예쁜 쓰레기'를 종류별로 돈 주고 사 왔다.
짐을 꾸릴 때나, 쇼핑을 할 때나, 나는 늘 뭔가 ’ 부족하다 ‘고 느껴 계획한 것보다 더 많이 준비하고 사게 된다. 대체 왜 그럴까? 바로 ’가짜 결핍‘ 때문이다. 저널리스트이자 탐험가인 마이클 이스터는, 가짜 결핍이란 욕망의 뇌가 계속 부족하다고 인식하게 만들어 장기적인 만족과 성장 대신 순간적인 위안을 좇게 하는 상태라고 설명한다. 현대 사회는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지만, 인간의 뇌는 여전히 자원이 부족하던 시절의 방식으로 작동해 이를 ’결핍‘으로 판단한다는 것이다. 즉, 이것은 단순한 개인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뇌의 생존 본능이 만들어낸 메커니즘이라는 말이다.
내 의지 부족이 아니라 가짜 결핍 덕분에 변명할 여지가 생긴 것 같아 다행인 걸까. (그런데, 누구에게 변명하는 건데?) 치앙마이에서 도파민 폭발하며 긁어댄 카드 값을 울면서 갚을 미래의 나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에도 가짜 결핍의 고리를 완전히 끊지 못하고 있다. 오늘도 또 당한 걸 보면 말이다.
내 방 한 켠에는 아직 주인을 만나지 못한 기념품과 예쁜 쓰레기들이 점점 쌓여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