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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심자의 덕목

나의 글 선생님

by 이너프

올해가 가기 전, 이루고 싶은 꿈이 하나 있었다. 내 이름이 떡 하니 박힌 에세이 책을 갖는 것. 원래 모르면 용감하다고 하지 않는가. 에세이는 많이 읽어왔지만 제대로 써 본 적 없는, 그야말로 ‘생초짜’다. 에세이 책을 낸다는 게 얼마나 많은 준비와 글력이 필요한지 가늠하지도 못한 채, 노력 없이 욕망만 이글거리고 있었다.

무모한 도전을 시작하면서 에세이를 전문적으로 배워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나의 글 스승을 찾기로 했다. 섬세하고 솔직한 글이 매력적이라 생각했던 한 에세이스트가 떠올랐다. 마침 그녀의 SNS를 보니 1:1 글 수업을 유료로 진행한다는 공지가 올라와 있었다. 얇은 지갑을 탈탈 털어, 초등학생 때도 받지 않았던 글쓰기 과외를 난생처음 신청했다. 독자에서 제자가 되었다는 설렘과 출간의 꿈에 한발 다가섰다는 기대감이 머릿속에서 꽃길을 만들어 팔랑팔랑 뛰어다녔다.


첫 번째 레슨! 앳된 얼굴, 공기반 소리반의 목소리를 가진 나의 글 선생님을 대여한 룸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이미 책을 통해 예민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성격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말보다 카톡을 선호한다는 건 그때 처음 알았다. 좁은 공간, 노트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는데도 수업 대부분을 카톡으로 진행했다. 어색했지만 낯을 많이 가리는 그녀만의 수업 방식이라 생각해 존중하기로 했다.

선생님은 나에게 열 가지 감정을 선택해 열 개의 문장을 쓰라고 했다. 내가 쓴 문장 중 어색한 부분을 빨간 글자로 고쳐 톡으로 다시 보내주었다.

“이 단어는 앞쪽으로 배치해야 해요.”

그 순간, 침묵을 고수하던 그녀가 먼저 적막을 깼다. 무겁게 눌러서 터져버린 침묵의 파편에 찔러서였을까, 아니면 생각보다 더 어린 선생님의 글력을 시샘해서였을까.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해서는 안 될 말을 내뱉고 말았다.

“그건 임팩트 주려고 일부러 그런 거예요!” 거짓말이었다. 단어 순서로 임팩트를 줄 계산 따위 내가 했을 리가 없었다.


방송 대본과 에세이는 엄연히 다르다. 전하는 매체가 다르듯 글 쓰는 방식도 다르다. 그래서 내돈내산 에세이 공부를 결심한 게 아닌가! 습관이 무섭다고 방송작가 후배들의 대본을 검토하고 피드백하는 일을

오래 해온 탓에 그녀 앞에서 아주 중요한 한 가지를 놓쳤다. 바로, 내가 초심자라는 사실.


초심자에게 필요한 덕목이 있다. 뭐든 배우겠다는 '의지와 겸손'이다. 그런데 그날은 미처 집에서 겸손함을 챙겨 오지 못했는지, 건방짐부터 튀어나왔다.

사실 별 일 아니었음에도 선생님의 피드백을 받고 긁혔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거 같다. 늘 후회는 내 발걸음과 한 발 떨어져 늦게 쫓아온다. 한참 뒤에 깨닫고는 삐죽 튀어나온 마음의 못을 망치로 두드리며

다짐했다. '나는 초심자다'

두 번째 레슨! 지난 시간에 미안함도 있고 해서 커피를 준비해 찾아갔다. 하지만 1시간이 지나도 연락이 없었다. 처음에는 ‘나랑 수업하는 게 불편했나?’ 싶어 반성 모드로 기다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책은 걱정으로 번졌다. 그녀의 책에서 여러 번 등장했던 사연이 떠올랐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네이버 검색창에 수차례 그녀의 이름을 확인했다. 나의 불길한 예감이 틀리길 바라며. 마치 애인이 갑자기 증발하기라도 한 것처럼 종일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다음 날 오전,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다. 역시 카톡이었다.

- 수업 오는 길에 차 사고가 나서 급하게 수술했어요. 어제 연락이 안 돼서 답답하셨죠? 핸드폰이 고장 나서 노트북 카톡으로 연락드려요. 언제 퇴원할지 몰라서, 남은 수업료는 환불해 드리는 게 낫겠죠?

그날 밤. 수업료 반환과 함께 우리의 인연도 끝났다.

내 의지와는 다르게, 첫 번째 레슨이 마지막 수업이 되고 말았다. 초보자의 덕목을 갖춘 제자가 되고 싶었는데 아쉬움만 남았다.


그녀가, 감정이 태도가 되어버린 내 실수를 부디 잊어주길 바란다.

나도, 언제 퇴원할지 몰라 취소된 그녀의 수업이 재오픈한다는 글을 안 본 것처럼 잊기로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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