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엽은 12와 1/2
이 소설을 읽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워낙 유명해서 도서관에서는 늘 ‘대출 중’이었다. 몇 달을 기다린 끝에, 버스를 타고 남의 동네 도서관까지 가서야 책을 손에 넣었다. 그렇게까지 해서 읽은 책이라 기대가 컸던 탓일까. 초반에는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았다. 뒤늦게 알았다. 이 책이 장편이 아니라 아홉 편의 단편을 묶은 소설집이라는 것을.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은 표제작이자, 여러 단편 중 하나의 제목이었다. 목차를 꼼꼼히 읽지 않은 내 탓이었다. 그러나 책을 끝까지 읽고 나서야 분명해졌다. 김기태 작가의 소설은 서둘러 읽을수록 멀어지고, 천천히 읽을수록 가까워진다는 것이다.
가장 기억에 남은 단편은 〈태엽은 12와 1/2〉이다. 바닷가에서 혼자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남자가 있다. 서울에 사는 딸 은혜가 방문할 예정이라 그는 들떠 있다. 그러던 중 늘 무심히 걸려 있던 괘종시계가 멈춘다. 자주 있는 일이라 평소처럼 태엽을 열두 번 감으면 제 기능을 해왔다. 그런데 그날따라 태엽이 반 바퀴가 더 돌아가 있었다.
눈이 펑펑 내리는 정오. 사마귀를 닮은 외모의 남자가 손님으로 찾아온다. 그는 20여 년 전 이곳이 여관이던 시절 신혼여행으로 왔었다고 말하며, 괘종시계와 어린 시절의 은혜를 기억하고 있다.
신혼여행이었습니다. 늦었습니다만…… (p.223)
이 문장을 읽는 순간부터 이야기의 공기가 달라진다. 설명되지 않은 과거가 현재로 스며들며, 자연스럽게 긴장하게 만든다. 작가는 아무것도 단정하지 않지만 나는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괘종시계는 왜? 딸 은혜는 아빠를 만나러 오기는 하는가? 독자의 신경을 긁으며 더 몰입하게 한다.
다음 날, 손님은 검정 비닐봉지를 방에 남긴 채 떠난다. 주인장은 그것을 돌려주기 위해 뒤쫓아가지만 손님은 끝내 받지 않는다.
깜빡한 거라고 쳐주십시오. (p.233)
검정 비닐봉지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대신 주인장의 내면이 조금씩 드러난다. 하지 못했던 일들, 미뤄두었던 감정들, 이미 지나가버린 순간들.
이 단편은 추리소설처럼 읽히지만 답을 주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사건이 아니라, 사건 이후에 남은 감정이다.
괘종시계의 태엽이 12와 1/2에서 멈췄다는 설정은 현실의 시간에서 살짝 벗어난 틈처럼 느껴진다. 그 틈에서 잊고 있던 기억과 후회가 조용히 고개를 든다. 이 이야기의 마지막, 바닷가 앞에 서 있는 주인장은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쩌면 그는 그 순간 가장 많은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김기태 작가의 단편을 읽다 보면 짧은 드라마를 보는 기분이 든다. 깊게 끌어 올린 묘사가 눈 앞에 선명하게 펼쳐지지만 결말은 내 손에 쥐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책을 덮은 뒤에도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은 읽는 동안보다, 읽고 난 뒤에 더 오래 남는 소설집이었다.
예전에 ‘페이퍼’의 레전드 편집장으로 불리던 황경신 작가를 좋아했다. 김기태 작가의 소설을 읽으며 문득 그녀가 떠올랐다. 2003년, MBC 〈한 뼘 드라마〉를 통해 60분짜리 단막극이 아닌 5분짜리 짧은 극을 선보였던 황경신 작가처럼, 김기태의 소설 역시 짧지만 밀도 높은 이야기를 짧지만 강렬하게 그려내고 있다. 어색하지만 신선한? 한 번 더 맛보고 싶어지는 매력이 있다.
다음에는 또 어떤 결로 다가올지 김기태 작가의 작품들이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