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과 환장 사이
방송작가가 되면 대본부터 쓸 줄 알았다. 영상 위에 흐를 근사한 문장을 수놓으면, 성우의 목소리를 타고 전국으로 퍼져나가는 상상을 했다. 하지만 막내에게 허락된 것은 ‘문장’이 아니라, ‘환장’이었다.
어느 날, 팀에 1년짜리 대형 다이어트 프로젝트가 떨어졌다. 이름만으로도 습한 긴장감이 전해지는 별 다섯 개짜리 특급 미션! 조건은 단순하고도 가혹했다. 체중 100kg이 넘는 사람을 세 명 섭외해야 했다. 회의실의 에어컨 바람이 갑자기 멈춘 듯 숨이 턱 막혔다. 직접 발로 뛰지 않은 이들은 늘 말이 쉽다. 펜을 굴리며 “금방 찾겠지?”라고 툭 던지는 그들의 말은 내 목에 연자맷돌을 걸어 준 것처럼 무거웠다. 나는 졸지에 도깨비방망이를 손에 쥔 광대가 된 기분이었다. 휘두르기만 하면 금 나와라 뚝딱, 출연자가 나타날 거라 믿는 이들 앞에서 나는 무력했다.
보통 이런 대형 프로젝트는 공개 모집 자막이나 예고를 한다. 거기에 실낱같은 희망을 걸었으나 위(?)에서 비밀리에 진행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저항의 깃발은 단 한 번도 펄럭여 보지 못한 채 구겨졌다. 비밀의 이유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까라면 까야하는 것’. 이 바닥의 피할 수 없는 생존 수칙이니까.
당시는 SNS도 없던 시절이었다. 인터넷 카페, 지역 신문에서 출연자의 단서가 될 만한 것들을 이 잡듯 훑었다. 전국 곳곳에 빅사이즈 의류 매장과 헬스클럽의 전화번호를 따내 생명줄 같은 팩스 앞에 서서 모집 문구를 밀어 넣으며 수화기를 들었다.
“장난해요? 우리 손님들이 이런 거 보면 얼마나 기분 나빠하겠어요!”
날 선 거절의 말에 여기저기 찔려 만신창이가 됐다. 전화를 끊을 때마다 내 목소리는 조금씩 작아졌고, 자존감은 방전 직전의 핸드폰 배터리처럼 위태롭게 깜빡거렸다. 섭외는 막내의 능력이라는 선배들의 가스라이팅 속에 억울함만 독처럼 쌓여갔다. 더는 책상 앞에서 답이 안 나올 것 같아 명함을 움켜쥐고 밖으로 나갔다. 출연자를 찾기 위해 한낮의 뙤약볕 아래 헬스클럽과 요가 학원을 전전했다. 평소 같으면 절대 하지 않을 등산까지 하며 휴일을 통째로 반납했다. 하지만 내가 찾는 그들은 신기루처럼 보이지 않았다. 설사 마주친다 해도 그다음이 문제였다.
“저기...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몇 킬로그램이세요?”
이 말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혀끝에서 맴돌았다. 대뜸 물었다간 뺨 세례를 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뺨을 맞더라도 무엇이라도 해야만 했다. 오죽하면 ‘차라리 내가 지금부터 미친 듯이 먹어서 출연할까?’ 섭외하는 것보다 이게 더 빠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했다.
사무실로 돌아오면 어김없이 선배의 송곳 같은 질문이 쏟아졌다.
“막내야, 어떻게 됐니? 아직도 섭외 0명인 거지?”
‘아직도’와 ‘0명’이라는 단어가 내 무능력을 정면으로 찔렀다. 한 달 가까이 섭외 지옥에 시달리다 보니 내가 지금 출근한 건지, 퇴근한 건지 현실감마저 희미해졌다.
‘나 몰라. 배 째’라고 소리치며 도망가고 싶던 순간, 거짓말처럼 전화벨이 울렸다. 모집 제안서를 보냈던 곳에서 출연 희망자가 있다는 구원의 연락이었다. 역시, 세상은 죽으라는 법만 있지는 않았다. 떨리는 손으로 수첩에 적어 내려가는데, 뒤에서 들려오는 선배의 한마디가 공기를 갈랐다.
“거 봐, 하면 된다니까, 고생했어.”
그날, 나는 선배의 입을 찢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