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초 후에 공개됩니다!
지난 연말, ‘2025 SBS 연기대상’을 보다가
채널 돌리기를 멈췄다. 화면 속에는 생방송 시상식 진행을 처음 맡은 듯한 어느 배우가 서 있었다.
또 다른 MC였던 신동엽 씨가 “AI처럼 하지 말라”며 그에게 농담을 던졌지만, 그의 동공은 갈 곳을 잃고 눈꺼풀은 정지 화면처럼 굳어 있었다.
분명 화면 밖에서는 제작진이 손짓하며
속이 타들어 가고 있을 텐데, 이상하게도
그날은 제작진보다, 초 단위로 영혼이
촛농처럼 흘러내리는 그 배우의 모습에서
지독한 동병상련을 느꼈다.
서브 작가 5년 차 시절, 대한민국은
‘슈퍼스타 K’라는 거대한 오디션 열풍에 휩싸였다. 시즌제가 되면서 서브 작가를 구한다는
공고가 떴고, 조회수는 폭발했다.
오디션 프로그램이라면 사족을 못 쓰던 나는
‘덕업일치’를 꿈꾸며 이력서를 보냈다.
며칠 뒤, 메인 작가에게 면접 일정 문자가 왔다.
1차 서류 통과. ‘이제 다 된 밥이다’ 싶었다.
5년 동안 밥 먹고 잠자는 시간 빼고 한 일이 출연자 설득하고 입 터는 일이었으니, 면접쯤이야 껌이라 생각했다. 합격률 80%를 확신하며 기세등등하게 방송국으로 향했다.
하지만 면접 당일, 하늘도 내 앞날을 예견했는지 난데없는 폭설이 내렸다. 눈보라를 뚫고 도착한
Mnet 로비는 난방조차 되지 않아 오돌오돌 한기가 돌았다. 그러나 더 살 떨리는 일은 따로 있었다.
로비를 가득 채운 30여 명의 사람들.
알고 보니 모두 나와 같은 ‘서브 작가’
면접자들이었다. 자신만만했던 합격률이
순식간에 50% 밑으로 곤두박질쳤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이건 면접이 아니라 ‘슈퍼작가 K 오디션’이었다. 순번지가 배부됐다. 내 번호는 29번.
대기 시간이 길어질수록 멘탈은 가루가 되고 있었다. 정말 옆 사람이 “노래 뭐 준비하셨어요?”
물어볼 것 같아 현기증이 났다.
면접은 방송국 앞 카페에서 두 명씩 짝을 지어 진행됐다. 드디어 내 차례. 메인 작가는
내 이력서를 훑으며 미간을 찌푸렸다가
입술을 오므리기를 반복했다.
그녀의 얼굴 근육 하나하나에 내 심장도 움찔거렸다. 마침내 질문 하나가 날아왔다.
“지금까지 섭외한 사람 중에, 우리 프로그램에
세울 사람 누구 있어요?”
순간, 머릿속에서 ‘징~’ 하는 소리와 함께
셔터가 내려왔다.
“저… 그게…”
예상 질문 리스트에는 없던 직구였다.
그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숨 쉬는 일뿐이었다. 그녀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동그랗게 모아졌다가 펴지는 입술은 이미 마음속으로 “탈락”을 외치고 있었다.
마치 독설가 버전의 이승철 씨가 선글라스 너머로 도끼눈을 뜨고 나를 심사하는 듯했다.
내 옆에 앉은 30번이 나를 애처롭게 보고 있었다.
면접에서 붕어가 된 건 오디션 프로그램의 모든 출연자가 자발적으로 지원할 거라는
내 안일한 팬심 때문이었다.
사실 화제와 재미를 위해 특이한 재능이나
별난 사연의 참가자들을 추가로 섭외하기도 한다. 오해는 말아 주시라. 참가 기회만 줄 뿐, 예선부터는 실력으로 겨뤄야 한다.
집에 돌아와 신발을 벗는 순간,
꾹 닫혀 있던 입술에 빗장이 풀리며 정답이 튀어나왔다
“작년 다큐에서 전국 팔도의 뱀을 다 잡는다던
그 약초꾼 아저씨!”
꼭 중요한 말은 뒤늦게 생각난다.
침대에 누워 이불킥을 하며 머릿속에서
면접 장면을 다시 돌려보았다.
내가 못한 말들, 보여주지 못한 열정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나는 3초 컷으로 광탈한 걸.
그날, 사실 말이 막히면 이 멘트를 하려고
야심 차게 준비한 게 있었다.
하지만 뇌정지가 먼저 오는 바람에
입술 밖으로 꺼내지도 못했다.
두고두고 한이 된 그 말은....
“작가님, 제 답변은... 잠시 후, 60초 후에 공개하겠습니다!”
(이 말했어도 떨어졌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