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에게 내려진 어명

최종은 언제쯤...

by 이너프

* 작가 보호 차원에서 시기는 밝히지 않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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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 하나 같이 하실래요?"


아는 PD의 연락에 내 머릿속은 이미 통장에 꽂힐 숫자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들어오는 알바에 어깨춤이 절로 났다. 나의 행복은 철저히 통장에서 나온다. 그 행복의 기준은 아주 소박하고도 명확하다.

보통 미팅은 거래처나 근처 카페에서 한다. 하지만 이번엔 많이 달랐다. 장소가 무려 '청와대'란다. 청와대? 그 단어를 듣는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가문의 영광인가?' 싶다가도 '글 한 줄 잘못 써서 어디로 끌려가는 건 아니겠지?' 하는 망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러는 사이 내 다리는 이미 가만히 있지 못하고 경련하듯 떨리고 있었다.


며칠 후, 제작진은 청와대 근처에서 비장하게 모였다. 혹시라도 대통령을 마주칠까 싶어 평소엔 입지도 않던 정장을 칼같이 차려입은 PD들 사이에서, 나 역시 옷장 깊숙이 모셔둔 가장 비싼 가방을 꺼내 들었다. 기싸움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나 혼자만의 의지였다.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워지는 회의실에서 받은 특명은 '대통령 국정과제 성과 영상 제작'. 한 달 뒤, 대통령이 참석하는 행사에서 공개된다고 덧붙였다. 비록 내 이름은 어디에도 남지 않겠지만, 기분만큼은 어명을 받은 암행어사가 된 것 같았다.


"청와대 측에서 꼭 넣고 싶은 성과를 추려서 자료를 먼저 주시죠."

"그거 좋겠네요, 윗선과 의논하고 드릴게요."


담당자는 흔쾌히 답했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나도 자료는 오지 않았다. 앵무새처럼 '윗선에서 추리고 있다'라는 말만 반복했다. 두 번째 미팅에는 관계자가 두 명 더 늘었지만, 정작 말수는 더 줄었다.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꾹 닫아버린 건지, 아니면 국가 보안상 발설 금지인 건지 답답함에 내가 먼저 제안을 던졌다.

"그럼, 제가 5가지를 임의로 정리해서 보낼 테니 컨펌만 해주실래요?"

"네, 다음 미팅 때 정하시죠."


그때 깨달아야 했다. 미팅 횟수가 늘어날수록 이미 약속한 페이의 짠맛은 점점 강해질 거라는 걸. 우여곡절 끝에 5차 미팅을 넘기고 대본 작업까지 마쳤다. 이제 수정만 조금 하고 해방되길 기도하며, 내 목줄... 아니, 칼자루를 그들에게 넘겼다.


역시나 '청와대 윗분'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대본을 보자마자 다른 아이디어가 샘솟았는지, 성과 주제를 통째로 바꾸고 개수도 늘리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영상 분량은 10분인데 소개할 주제가 10개라니. 1분에 하나씩 랩이라도 하라는 건가? 따지고 싶어도 그 '위'가 대체 누구인지 알 길이 없어 허공에 대고 삿대질만 해댔다.


사실 청와대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방향을 못 잡은 클라이언트는 언제나 제작진에게 "내 마음을 맞춰봐"라는 독심술을 요구한다. 회의실엔 늘 사람이 가득했지만, 결정은 늘 자리에 없는 그분의 몫이었다. 누가 바꾸랬는지, 누가 늘리라고 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다만 "위에서요"라는 무책임한 말만 메아리처럼 떠돌 뿐이었다.


‘어디서부터 이게 잘못된 건지 모르겠다.’


나는 분명 알바하러 왔는데, 정신 차려보니 수정 지옥에 갇혀 있었다. 노트북 속 ‘청와대’ 폴더에는 수정 1부터 수정 10까지의 파일이 켜켜이 쌓였다.

[최종], [진짜최종], [제발- 최종], [제발_최종_진짜최종_이거안되면망명_최종.docx] 같은 비명 섞인 파일들이 여전히 대기 중이었다.


메일을 보냈다. 더는 못 하겠다는 기색을 최대한 공손하게 문장 사이사이에 담아서.

담당자도 양심이 있었는지 "수고했어요, 행사 끝나고 회식해요"라는 답 메일로 훈훈한 마무리를 지었다. 드디어 지옥의 문이 닫히는 듯했다.


다음 날 아침. 뉴스를 보다 눈을 질끈 감았다.

청와대 관계자가 대통령의 성과를 발표하는데, 내용이 어제 보낸 '제발_최종_망명' 대본과 전혀 달랐다.

그 말은 즉, 행사장 영상 내용도 다시 갈아엎어야 한다는 뜻이다. 뉴스가 채 끝나기도 전에 휴대폰이 울어댔다. 닫혔던 수정 지옥의 문이 다시 요란하게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날 이후, 나는 한동안 들어오는 알바를 거절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아예 '보이지 않는 윗선'에 질려버렸기 때문이다.


이제는 일을 제안받을 때마다 꼭 확인하는

서글픈 습관 하나가 생겼다.

"저기, 그쪽 결정권자 말이에요.

...실존하시고 살아계신 분 맞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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