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출근해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커피를 내리는 것도, 메일을 확인하는 것도 아니다.
뉴스 포털 사이트에서 사회면을 훑는 일이다. 밤사이 대형 화재는 없었는지, 다리가 무너지진 않았는지, 미스테리한 죽음은 없었는지. 하루의 시작은 늘 ‘타인의 불행’이었다.
그렇게 모은 불행을 회의실로 가져간다. 시사 프로그램 아이템 회의에서 불행은 감정이 아니라 방송 소재다. 같은 사고라도 그림이 되는 것, 시청률 그래프를 끌어올릴 수 있는 것만 살아남는다. 숫자와 조건, 자극성으로 분류된 비극만이 아이템 리스트에 오른다.
“00동 교통사고? 이미 뉴스에 깔렸잖아. 패스.”
슬픔에도 유통기간이 있듯, 신선하지 않다는 뜻이다.
“이너프 작가, 아이 의료 사고는 어떻게 됐어?”
“부모님 설득 중입니다.”
“그게 제일 ‘센’ 거니까,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붙잡아.”
네 살 아이가 수술 도중 사망한 사건이었다. 부모는 의료 과실을 의심하며 외로운 싸움을 준비 중이었다. 지역 뉴스 구석에 단 몇 줄로 실렸었다. 나는 그 몇 줄을 단서로 유족에게 전화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오후 회의에 보고할 ‘확답’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무도 없는 복도 구석에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에 맞춰 심호흡을 내뱉는다.
이런 전화에서 “안녕하세요”는 금물이다. 최대한 빨리 의도를 밝혀야 한다. 머릿속으로 멘트를 정리하던 순간, 아이 엄마가 전화받았다.
“저희는 000 방송국인데요, 상심이 크시겠지만 그 억울함을 풀려면...”
뚜- 뚜- 뚜-
예상했던 거절이다. 하지만 멈출 수 없다. 이번엔 아이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은 아무 말도 못 하겠습니다.”
“아버님, 잠시만요...”
뚜- 뚜- 뚜-
전화받았다는 건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고 수차례 전화를 시도했다. 답은 없었다. 결국 집으로 찾아갔다. 문전박대는 기본 옵션이라 생각하며 벨을 눌렀다. 의외로 문이 빨리 열렸다. 거실 한쪽에는 주인을 잃은 장난감들이 흩어져 있었고, 아이의 영정 사진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엄마는 침대에 누워 천장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 텅 빈 눈과 마주친 순간 고개를 숙였다. 차오르는 감정을 억지로 미뤄둬야 했다.
아이 아빠는 병원 자료를 내밀었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덧붙어진 포스트잇이 너풀거렸다. 사고의 진실을 풀어달라는 그의 눈빛은 간절함으로 번져있었다. 그는 얼마나 많은 밤을 지옥 같은 고뇌 속에서 보내다, 이 고통을 처음 보는 나에게 맡기기로 한 걸까.
“병원이랑 싸우는 건 달걀로 바위 치기라더군요.”
“아버님, 억울한 건 언론에 알려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끝까지 지켜봐 줍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우리 아이가 너무 불쌍해서...”
그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옆에 있던 PD의 팔을 툭 치며 낮게 속삭였다.
“이거 찍어”
진심으로 돕고 싶다는 마음과, 이 결정적 장면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이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뒤섞였다. 뷰파인더 너머 클로즈업된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선명해졌다. 나는 그를 돕기 위해 온 사람이 아니라, 불행의 무게를 재러 온 사람이었다.
회사로 돌아온 뒤에도 나는 습관적으로 뉴스를 검색했다. 이보다 더 큰 불행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윗사람들은 우리가 의미 있는 일을 한다고 말했다. 그 말을 믿지 않으면 출근할 수 없었다.
세상의 불행을 섭외하는 동안, 나는 내 하루가 비교적 안전하다고 착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더 이상 섭외할 수 없는 마지막 불행이 내 앞에 놓였다.
까만 모니터 속에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비극에 닳아버린 얼굴이었다.
며칠 후, 나는 사직서를 냈다.